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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태복음 10:26)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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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마태복음 10장 26절



<서론> 

지난 주일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여기서 보라~는 특정사실을 강조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모두 내 말에 집중해라~”입니다. 그래놓고 엄숙하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양(羊)을 이리에게 보낸다는 것은 이리떼의 먹잇감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늑대 같은 이리를 교화(敎化)시켜 양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가능한 명령인가요? 이거야말로 순결한 처녀를 전과 10범 이상이 수용된 청송감호소 감방으로 들여보내면서 전과범들을 전도해 새사람 만들라는 명령과 같습니다. 차라리 계란으로 바위를 깨뜨리라는 명령이 더 쉽지요.

 

주님은 이리를 양으로 만들라 명령하시면서 뱀같이 지혜롭게 처신하라… 당부하셨습니다.

뱀은, 24시간 긴장하고 온 신경이 360도 사방으로 펼쳐있습니다. 사방이 적이기 때문입니다. 늑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도 항상 긴장하고 깨어서 허점을 보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뱀은, 허물을 벗겨내는 고통을 통해 늘 새로워집니다. 우리도 아집과 고집과 교만과 자기중심에 머물고 있으면 석화되고 성도 노릇 못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늘 변해야 합니다.

뱀은 생명력과 번식력을 통해 흉물이라 혐오하던 사람들에게 숭배대상으로 올라섭니다. 원수를 정복 정도가 아니라 자기 숭배자로 만드는 능력, 예수님은 바로 뱀의 지혜를 통해 늑대도 양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천년 기독교는 강도들이 매달리던 혐오의 십자가를 오히려 생명과 구원의 아이콘-상징으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제대로 믿은 것이지요!   

 

뱀은 좋은 쪽으로 사용하면 약(藥)이 됩니다. 뱀에서 나온 맹독으로 의학자들은 온갖 종류의 약을 만듭니다. 뱀의 독으로 암을 고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뱀독으로 화장품을 만들면 얼굴 주근깨도 깨끗하게 제거되는 효능이 나타납니다.

문제는 뱀독을 잘못 사용하면 죽음을 불러옵니다. 뱀의 특징이 간교(奸巧)잖습니까? 간교는 좋은 쪽으로는 영리함과 총명이지만 나쁜 쪽으로는 간사함입니다. 특히 혀가 두개이기에 이간질 하고 명예를 훼손합니다. 사기꾼들은 대부분 머리가 좋고 말을 잘합니다. 내가 머리도 좋고 말주변이 좋거든, 아하~ 사기꾼이 될 가능성이 내게 있구나… 하고 은사를 잘 살리던지(?) 나쁜 쪽으로 나가지 않도록 스스로를 경계해야 됩니다.

뱀의 지혜로 늑대 속에서 맞짱 뜨면 같은 부류가 됩니다. 서울구치소 교도관으로 박효진 장로님이 있습니다. 청송감호소에도 있었는데 전과범을 많이 전도했고 거듭난 새사람으로 인도했습니다. <하나님이 고치지 못할 사람은 없다>라는 책도 썼습니다.

 

박 장로님이 사명감으로 교도관 일을 하다 명퇴했습니다. 공무원이니 정년보장이 되지요, 퇴직하면 평생 먹고 살 연금이 나오는데 왜 명퇴했을까요?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닮아간다는 거예요. 전과범들과 지내다보니 폭력언어를 쓰고 으름장도 놓고… 자기도 어느새 험악한 사람이 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를 가정을 보호하기 위해 교도관생활을 퇴직했답니다.

뱀의 지혜로만 살다보면 우리도 너무 영악해져요. 머리 굴리고 빠져나갈 구멍 살피고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 하고… 그러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늑대를 양(羊)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양(羊)이었던 내가 늑대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런 명령을 하십니다.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뱀의 영악함이 성공에 대해 빠름빠름~(통신사 광고)이라면 비둘기의 순결함은 바름바름~입니다. 아무리 속도가 빨라도 방향이 올바르게 되어야 합니다. 지금 교회조차 방향은 생각하지 않고 빠름빠름~ 목회성공도 빠르빠름~ 교인들도 빠름빠름~ 그래서 뱀처럼 지혜롭고 영리해 가고 세상은 양(羊)이 아니라 늑대들이 많아집니다. 교회도 늑대들이 되어 으르렁거리며 싸우고 분쟁하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전에 비둘기순결을 심어주신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순결은 성전 제물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제물은 흠이 없어야 합니다. 흠이 없다는 단어가 바로 타밈, 순결입니다. 히브리인에게 흠이 없다는 의미와 가장 잘 어울리는 짐승이 비둘기입니다. 비둘기의 특징은 정절입니다. 암놈비둘기는 한번 짝을 맺으면 영원히 함께 합니다. 짝이 죽으면 다시 짝을 정하지 않고 평생 정절을 지키며 삽니다.

우리 선조들도 비둘기를 부부 금슬을 상징하는 새로 여겼습니다. 비둘기가 한번 짝을 맺으면 바꾸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둘기 그림은 흰색과 검은색 한 쌍으로 그리는 경우가 있는데, 검은 머리가 하얗게 셀 때까지 부부가 해로(偕老)하기를 염원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산모가 출산하면 번제를 드리는데 1년 된 어린 양과 함께 비둘기를 제물로 드립니다(레 12:6). 비둘기는 정절을 상징하기에 산모는 비둘기 제물을 드리면서 남편에게 “내가 낳은 이 아이가 당신의 아이가 맞으며 나는 한 순간도 당신에게서 눈을 돌린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비둘기처럼 나는 영원히 당신을 바라보는 데서 눈을 돌리지 않겠습니다!”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결을 다짐하는 의식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점을 염두에 두신 것입니다. 너희들이 세상으로 나갈 때 세상과 눈높이를 하지 말라! 늑대와 눈높이를 하면 오히려 늑대가 되고 세상과 눈높이를 하면 세속화가 되고 만다! 세상의 공격과 유혹 가운데서도 오직 나에게만 눈을 맞춰라~ 그래야 늑대들을 감동시켜 저들도 양(羊)이 될 것이다~ 그러려면 비둘기의 정결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비둘기는 몸은 밖에 있어도 마음은 콩밭에 가 있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비둘기의 정결입니다. 

 

그래요! 뱀처럼 영리해야지만 비둘기의 순결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전도한다고 같이 화투치고 술을 먹어주고 주일에 등산 가주고 놀아줍니다. 어떤 신학생은 동두천 미군부대 술집여종업원에게 전도한다고 어울려주다 인생이 망쳤습니다. 순결함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교회가 너무 똑똑하고 영리해요. 어떻게 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도해서 교회를 부흥시키느냐? 과정을 중시하고 바른 수단을 추구해야 될 교회가 지나치게 방법에만 의존합니다. 그래서 전도법에 보면, 아파트 문을 열고 일단 한발로 문을 막아서라고 가르칩니다. 잘못된 방법은 아니에요. 영리하지요. 그러나 여기에는 순수함이 없는 것입니다.

양의 순수함은 뭐예요? 늑대들이 뺏어 가고 할퀴고 덤벼들어도 뺏어 가면 뺏기고 때리면 맞고… 이런 순수함을 통해 늑대들을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바보스럽게 순수하게 믿음을 지켜나가면 늑대들이 감동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감동시대, 교회가 영리해서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웃들에게 온갖 좋은 것을 퍼주면서 교회부흥이라는 목표가 빤히 보이기에 세상이 그 영리한 방법에 감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좀 더 순수해졌으면 좋겠어요! 교회에서는 직분에 연연하지 말고 순박하고 순수하고 조금 덜 똑똑하고 덜 영리했으면 좋겠어요! 세상에 나가서는 영리함으로 경쟁해야겠지만 그때도 주님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하실까? 라는 정절과 순결 믿음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유대 랍비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는 순결하고 이방인, 세상에 대해서는 지혜로워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비둘기의 순결함과 뱀의 지혜지요! 이런 자세로 살 때에 세상이 변화됩니다.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하는 새입니다. 중국에서는 비둘기가 안정, 평안, 화평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외교정책에서도 강성파는 매파, 온건파는 비둘기파라고 합니다.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이 된 것은 성경에서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노아 방주시대에 세상이 물에 잠겼습니다. 1년 이상을 방주 안에 머물던 노아는 육지에 물이 마르자 까마귀를 보냈습니다. 육지에 상륙해도 되겠는지 알아보고 오라고 보냈는데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40일 후에 비둘기를 보냈더니 돌아왔습니다. 상륙할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주일 후에 다시 보냈더니 새 감람나무 잎사귀 하나를 물고 왔습니다. 1주일 후에 다시 내보냈더니 이번에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비둘기가 물고 온 푸른 새 잎사귀는 희망이며 평화의 소식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노여움이 풀리셔서 인간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의 상징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임하셨습니다(마 3:16). 비둘기는 온유함과 순결함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온유함에서 나옵니다. 로마의 평화를 ‘팍스로마나’(Pax Romana)’라 부릅니다. 진정한 평화가 아님을 뜻합니다. 창과 칼, 무력으로 얻은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무력으로는 기독교인들을 300년 동안이나 개종시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주후 313년에 천년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합니다. 이제부터 평화의 로마가 됩니다. 맨주먹으로 만들어 낸 진짜 평화입니다. 사랑과 용서, 순교와 인내로 로마제국을 정복한 진정한 평화였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그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총칼로 세상을 정복하려다 실패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로 세상을 정복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제국을 정복하고 세계정복을 꿈꾸면서 제자들에게 비둘기의 온유함으로 늑대세계를 평화민국으로 만들라 당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해요? 비둘기처럼 순수하고 온유하고 평화를 이루면서 살아야 합니다. 놀부처럼 똑! 소리 나게 영리하게 살되 흥부의 착한 마음, 형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을 함께 지니고 살라는 것입니다.

어느 게 대주주가 되어야 해요? 요즘 인기 있는 놀부가 대주주인가요? 인기 없는 흥부가 대주주인가요? 흥부의 비둘기 마음에 놀부의 뱀의 지혜가 합쳐야 영향력 있는 전도자가 됩니다. 그러나 지금은 너나나나 놀부의 영악함, 이기적인 계산으로 살려니 교인숫자는 더 많아지고 교회는 좋은 일들을 더 많이 하는데 정작 변화를 일으키지 못합니다. 오히려 세상은 더 늑대세상이 되어가고 교회도 양들보다 때로는 늑대들이 더 많이 활개를 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될까요?)  

놀부와 흥부 소문이 퍼져 왕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사람됨됨이를 알아보려 왕이 묻습니다.

"너희들 앞에 똥통과 꿀통이 있다! 어느 통에 들어가겠느냐?"

영악하고 계산적인 놀부가 재빨리 "저는 꿀통입니다." 했고, 어리바리 흥부는 놓칩니다.

"그래? 놀부 자네가 꿀통을 원하니 꿀통으로 들어가라! 흥부, 너는?"

“제가 꿀통에 들어가면 제 형은 어떻게 되나요?”

“당연히 네 형 놀부가 똥통으로 들어가야지…”

“그러면 제가 똥통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흥부네 가족이 그걸 보면서 얼마나 속이 터져요? 그래도 이미 각자의 길은 정해졌습니다. 신하들이 놀부는 꿀통으로, 착하고 양보심이 많은 흥부는 냄새나는 똥통에 집어넣었습니다. 잠시 후 형제들은 각자 통에서 나왔고 왕의 명령이 들렸습니다.

"흥부와 놀부는 마주 서거라. 상대의 몸을 핥아라!"

 

왕의 명령을 거절할 수 없어 놀부는 죽을 맛, 똥 맛으로 정신을 잃을 정도였습니다. 약삭빠르고 계산적이던 놀부가 제 꾀에 넘어간 것입니다. 이것이 뱀의 간사한 지혜입니다.

남편들 모습을 보면서 놀부아내는 웃고, 흥부 아내는 눈살을 찌푸리는데 왕이 묻습니다.

"잘 보았느냐? 너희들은 어느 통에 들어갔다 나오겠는가?"

놀부 아내도 남편과 살다보니 잔머리가 있어 얼른 똥통을 선택합니다. 흥부 아내는 제 남편을 욕하다 이번에는 자기도 동서형님에게 당하고 만 것입니다. 

잠시 후, 흥부와 놀부 아내는 꿀통과 똥통에서 나왔습니다. 그때 왕이 명령합니다.

"자, 흥부와 놀부는 아내 앞에 서라! 그리고 아내의 옷을 깨끗하게 핥아라! 깨끗하게…."

실실 웃던 놀부는 그 말에 기절하고 말았고, 다시는 궁궐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나요?

 

오늘 교회도 뱀의 영리함만이 판을 치는 것은 아닐까요? 세상 사람들도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이해하고 양보하며 타협할 줄 아는 비둘기의 유순함을 가져야 합니다. 흥부처럼 약골 같지만 흥부의 박속에서 금(金)이 터져 나오는 결론을 믿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혁명 존경받는 혁명은 인도의 간디 독립혁명, 미국의 루터 킹 흑인혁명입니다. 모두 무저항이고 비폭력 혁명입니다. 어디에서 배웠는가요? 간디는 예수쟁이는 싫어도 예수는 최고로 존경했고 루터 킹은 목사입니다. 비둘기 온유함과 평화를 배운 것입니다.

 

비둘기는 포유동물이 아니면서 젖을 먹입니다. 비둘기는 젖은 없습니다. 가슴 쪽에 젖샘이 있습니다. 새끼를 낳을 때만 잠시 모이주머니에서 생산되는 분비액입니다. 이 분비액은 부리를 통해 새끼에게 전달됩니다. 새끼가 부모 새의 부리 속에 머리를 집어넣어 마치 빨대로 빨아마시듯 먹습니다. 이 젖은 부모 양쪽, 수컷에게서도 생산됩니다.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깨끗한 젖으로 세상을 먹이라는 말씀입니다. 새끼들이 잘 자라려면 젖이 잘 나와야 하고 젖이 좋아야 합니다. 잘못된 젖을 먹으면 아이들은 설사하고 약골이 됩니다. 그래서 엄마가 독한 약을 먹으면 아기들은 엄마 젖을 피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젖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젖은 말씀이고 선하고 착한 말과 행동입니다. 좋은 성품입니다. 교회가 이런 젖들이 많이 흘러나와야 교회가 건강하고 성질이 좋은 양떼들이 됩니다. 그래야 좋은 목장이 되고 목장주를 성공하게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말씀의 젖과 좋은 성품이 좔좔 흐르는 우리 늘빛교회가 교회다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

호세아 7장 11절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고 세상나라의 도움을 구하러 가는 이스라엘의 우둔함을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지혜가 없어서”라고 비유합니다. 비둘기는 먹이를 찾다가 그물로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갔다가 잡힙니다. 순진함은 있는데 지혜로움이 없는 거지요.

비둘기가 늑대를 양으로 만드는 변화의 능력을 보이려면 순결함, 온유함만 갖고 안 됩니다. 뱀의 강한 지혜를 함께 가져야 합니다. 박성민 집사님의 책 제목을 늘 좋아합니다.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긴다.>

이건 우리 현실을 꼬집는 제목이잖아요? 세상이 이러면 안 된다는 제목이잖아요? 옳은 것이 강한 것을 이겨야 좋은 세상 팍스 코리아가 되잖아요?

우리는 예배가 끝나면 다시 세상으로 나갑니다. 어떤 세상입니까? 강한 늑대들이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두렵고 맨날 얻어터지고 지고 살지만 그래도 나를 보내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내가 너희를! 누가? 예수님께서 보내십니다. 세상 끝날 때까지 함께 동행하마! 약속하신 예수님을 믿고 뱀 같은 지혜에 비둘기의 순결함을 더하고, 비둘기의 온유함에 뱀의 강함을 더한다면 그야말로 옳은 것이 강한 것을 이겨 양(羊)이 늑대를 변화시키는 조용하면서도 강한 대혁명이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에 부름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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