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성탄절] 동방박사의 믿음(마태복음 2:1~12)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8. 3.
반응형

품절, 중고서적에서

동방박사의 믿음

마태복음 2장 1~12절

 

 

<서론> 
성경 66권속에 총 5천명 인물이 등장합니다. 5천명의 주인공은 당연히 인류의 구세주 예수님입니다. 주인공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한 책이 구약성경 39권이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구약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기록이 신약성경 27권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인물이 아무리 출중해도 예수님을 높이는 일에 실패하면 의미가 없습니다. 삼손처럼 출중하고 변화무쌍해도 예수님을 드러내지 못하면 시시하고 한두 줄로라도 예수님을 드러내면 중요한 인물이 됩니다.

성탄절에 가장 유명인사는 동방박사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조연도 못되고 엑스트라에 불과합니다. 조연(助演)은 주역을 도와 극을 전개해 나가는 역할을 맡은 사람입니다. 주인공 부럽지 않는 인기를 얻습니다. 유해진 이문식 임현식 성동일 같은 배우는 주연급 조연들이잖습니까? 주연에 못 미치는 엑스트라는 비중이 크지 아니한 단역으로 ‘곁다리’ 역입니다.

성탄실화에서 주인공은 아기 예수, 조연은 요셉과 마리아, 단역이 몇 나오는데 그중 돋보이는 단역이 동방박사들입니다. 오늘은 동방박사들의 믿음을 살펴보고 우리도 재림예수를 맞으려면 어떤 신앙을 가져야할까, 바른 믿음을 세우는 성탄절을 준비하도록 합시다.

 

동방박사는 말 그대로 동방의 박사들입니다. 예루살렘도 동방입니다. 그러니까 동방박사는 예루살렘 동쪽에서 온 박사입니다. 예루살렘 동쪽에 위치한 특정한 땅이라면 페르시아, 바벨론, 메데, 아라비아… 등입니다. 그 중 '동방'이 바벨론이라는 견해가 많습니다. 박사들은 그 ‘동방’에서 살던 서남아시아 옛 왕국 메디아종족입니다. 메디아는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문화민족이었으나 망한 후에는 여러 제국을 이어가면서 망국의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메디아종족이 살던 바벨론에는 유대인 포로들이 많았습니다. 유대인도 바벨론에서 70년 포로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유대인과 메디아종족은 같은 동방포로들로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아픔이 있습니다. 메디아종족은 유대인들과 교류하면서 메시야에 관한 구약예언을 전해 듣습니다. 세계에 평화를 주는 메시아가 유대민족에서 탄생하신다는 예언입니다.

메디아종족은 자력(自力)으로 주권을 회복할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오랜 전설에 기댑니다. 만왕의 왕이 탄생할 것이며 그 왕은 제국들을 심판하신다는 전설입니다. 제국들이 망하면 메디아는 주권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동방박사는 점성가입니다. 점쟁이가 아니라 천문학박사입니다. 옛날에는 과학적 천문대가 없었기에 하늘 징조를 보면서 풍년이 올까 흉년이 올까, 국가에 재앙이 올까 경사가 올까…를 점쳤습니다. 천문학박사들인 이들은 왕의 자문관, 왕의 고문, 제사장 역할도 합니다.

동방박사들은 바벨론 천문학자로 바벨론 왕을 위해 별을 탐구하고 있었지만 내심은 유대성경에 예언된 대왕의 탄생을 알려주는 징조로서의 별을 탐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두들 자기 살길을 찾아 땅만 보고 땅의 것을 추구하는데 박사들은 땅보다는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의 징조를 살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메시아 탄생을 기다렸지만 정작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이방인 박사에게 경배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하늘을 보지 않고 땅의 것에 연연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에 오신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만왕의 왕으로 하늘에 재림하실 심판주 예수님을 기다리는 새 백성입니다. 우리가 어디를 바라보며 살아야 할까요? 하늘을 바라보면서 영원한 천국을 고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걷는 땅에서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노동하는 6일을 주신 것 아닙니까? 6일을 열심히 일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6일을 성실하게 예배하며 살아온 사람이 주일을 바르게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생활중심은 6일이 아니라 주일입니다. 해바라기가 해를 따르듯이 6일은 주일중심으로 돌아야 합니다. 주일은 하나님께 예배하며 영성을 높이는 날입니다.

헬라어로 인간을 ‘안드로포스’라고 합니다. ‘하늘을 보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대부분 짐승은 두 발로 땅을 보며 걷습니다. 흙으로 지음 받았기에 땅을 본향으로 얼굴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꿈도 비전도 영혼도 내세에 대한 관심도 없이 땅을 보며 살다가 끝납니다.

 

전도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했습니다(전 3:11). 내세지향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죽음 이후를 생각하고 영원을 생각합니다. 무신론자들은 아예 죽음 이후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사는 것이 단순합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가 없다면 억울한 사람들… 장애인들… 인생이 너무 불공평한 것이 아닙니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1,2), 위에서 났기에 하늘을 사모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거듭날 때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생명이 두 개입니다. 어머니 생명으로는 땅의 것을 위해 열심히 노동하며 살고 하나님의 생명으로는 하늘의 것을 사모하며 하늘양식으로 영혼을 양육하며 성장하고 성숙하고 성화하라는 것입니다.

땅과 하늘, 육신과 영혼이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하늘과 땅 비율이 50대 50이고 나이가 들수록 반비례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되면 땅이 많고 하늘이 작고 믿음이 늘어 가면 땅이 작아지고 하늘을 넓혀야 합니다. 그럼에도 땅의 것으로 채워지는데 급급하면 이게 성화를 더디게 만들고 주님께서 재림의 심판주로 오실 때 예루살렘의 서기관, 제사장, 아기 예수를 위해 마구간 밖에 내어주지 못한 여관집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한 소년이 길을 가다가 동전을 주웠습니다. 아하~ 고생하지 않고 돈 버는 방법도 있구나…. 소년은 평생을 땅을 내려다보며 걸어 다녔습니다. 물론 많은 동전을 얻었습니다. 평생 262개의 일 페니 동전, 16개의 25센트의 동전, 2개의 50센트의 은화, 못, 쇠붙이들…. 등을 합쳐 13달러 26센트를 땅에서 주웠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그의 인생에 31,369회의 아름다운 노을이 졌습니다. 눈부시게 빛나는 영롱한 무지개가 157회나 떴습니다. 몇 천 개의 단풍잎이 가을을 물들인 풍경, 몇 천 번의 흰 구름, 행인들의 아름다운 미소로 삶을 빛낼 소중한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땅을 바라보느라 등은 크게 굽어버렸습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인생은 참으로 아름다워야 하고 사랑스럽게 보내야 합니다. 더 높은 세계를 지향하며 영원을 바라보며 나가야 합니다. 이웃들과의 다정스런 교제, 사랑, 친절, 부드러운 미소… 죽은 이후 좋은 평판과 하늘나라로… 우리 인생은 이런 것들로 엮어야 합니다. 아기 예수를 경배했던 박사들은 이런 꿈의 사람들, 영원을 지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이 심판주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평생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입니다. 이걸 얻지 못하면 서기관 바리새인들처럼 종교인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왕을 찾아 걸어왔던 바벨론~예루살렘까지는 얼마나 될까요? 에스라서에는, 2차 귀환 시에 5월 1일 출발, 8월 4일에 도착합니다(스 7:9). 3개월이 걸린 셈입니다. 직선거리는 1,000km, 돌며 왔다면 2,000km는 족히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부산(400km)을 두 번 왕복하는 거리를 박사들은 걸어왔다는 결론입니다. 엄청난 거리입니다. 박사들은 오직 별에만 의지해서 걸었기에 낮에는 쉬고 밤에 걸었습니다. 그러니 3개월이 아니라 6개월 이상 걸렸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독교신앙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신앙은 단거리가 아니라 장거리입니다. 단거리는 생각 없이 속사포로 달리기에 지루함도 인간관계의 갈등도 외로움도 없습니다. 순식간에 끝납니다. 100m 달리기에 무슨 고독이나 갈등요소가 있겠어요? 동창회나 동네회의는 1년에 한두 번, 그러니 갈등도 없습니다.

장거리는 다릅니다. 마라톤선수에게는 달리고 있을 때 가장 외롭고 회의가 든답니다.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는가? 마라토너들이 오직 앞만 보며 달리기에 아무 생각 없을 것 같은데 그때가 가장 외롭답니다. 믿음의 길에는 늘 회의가 있고 갈등이 있습니다. 성향이 다른 하늘과 땅의 원리,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예배당에서 꾸중 듣는 심정도 힘들고 한 교회를 오래 다니다보면 교우간의 갈등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왜 그리 섭섭함이 많은지요. 섭섭마귀가 가장 득실대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도중하차하고 방관상태로 빠지기도 합니다.

 

박사들은 먼 길을 뚜벅뚜벅 걸었습니다. 안내자도 지도도 네비게이션도 없습니다. 오직 별만 의지했습니다. 의심 들고 짜증나고 두렵고… 우려 섞인 모습으로 떠나보냈던 사람들에게 빈손으로 돌아가게 되지 않을까, 큰 별이 대왕의 탄생을 예고한 것일까, 우연일까… 하루에도 수없이 갈등하고 고민도 했지만 유대인의 언약신앙으로 뚜벅뚜벅 먼 길을 걸었습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단거리로 너무 열심 내다 금방 식어져 버리고 무슨 일을 맡기면 열심 내다 식어져 버리면 남도 낙심하게 만들고 실망을 줍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낙타처럼 뚜벅뚜벅… 기도응답이 안 되어도 낙타처럼 뚜벅뚜벅… 원하던 일이 안 되어도 낙타처럼 뚜벅뚜벅… 믿음의 표본을 박사들은 보여줍니다. 우리에게는 많이 모자라는, 아쉬운 부분입니다.

 

박사들이 걷던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자동차로 달리고 마차로 달리는 길이 아닙니다. 도보로 가야 하는 길, 낙타가 전부였겠지요. 그 길을 정처 없이 몇 달을 걷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힘듭니다. 그것도 별을 보고 가야했기에 낮에는 잠자고 밤에만 움직여야 합니다. 얼마나 막막하고 지루하고 힘든 고난도의 길입니까? 오죽했으면 우리 어머니가 목사 아들 때문에 억지로 교회에 다니면서 언제까지 다녀야 하는 것이냐고 집사 딸에게 하소연했겠어요? 

 우리 주님께서 보이셨던 제자도(弟子道)는 바로 그 길입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자기 부인(否認)은 자기 부정(否定)이고 자기부정은 자기 안티입니다. 믿음생활에서는 내가 손해 보아야 하고 내가 억울해야 하고 내가 참아야 합니다. 이런 십자가의 고통만이 사실은 우리를 성화시켜주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믿음대로 살지 못하고 기분대로 삽니다. 자존심 하나로 뭉쳐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내 자존심을 건드리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 믿음이 원숙된 맛이 없습니다. 믿음의 길이는 큰데 믿음의 맛은 ‘초짜’(初者)입니다. 자기부인이 없으면 우리 믿음이 죽을 때까지 지식은 서기관급인데 성화단계는 헤롯왕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물론 박사들도 헤맬 때가 있었습니다. 기다리지 못할 때 길을 잃었습니다. 박사들은 별을 보고 따라나섰습니다. 그러다가 예루살렘에서 별이 보이지 않자 길을 잃었습니다. 별이 보일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조급함이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왕이니까 왕궁에 가면 있겠지… 사람의 생각이 화근입니다. 헤롯왕을 만났다가 결국에는 두 살 미만의 남자아기들이 죽임을 당하는 엄청난 불행을 초래했습니다.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사람을 따르거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을 따르면 이런 결과를 맞게 됩니다. 성경이 교훈합니다.

롯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삼촌 아브라함을 따르다가 저주 받은 모압과 에돔 부족의 조상이 됩니다. 나오미 며느리 오르바는 언약이 아니라 자기종족을 따르다가 성경에서 이름이 사라집니다. 삼손은 육체의 정욕을 따르다가 이방인들의 노리개가 됩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왕의 주는 음식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노라고 뜻을 정합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뜻이 그들을 세속화의 길에서 막아주었고 살려냈습니다. 

 

우리 믿음생활에 하나님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흔들리는 유행이나 내 유익을 쫓아서는 안 됩니다. 말씀대로 결정하고 말씀에 순종해야 바른 교인들이 됩니다. 이것이 동방박사들의 믿음입니다. 먼 길을 가듯이 오랜 세월 예수님을 믿으며 재림을 기다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세속에 물들지 않는 정결한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오래 걸으면서 오래 정결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이 재림주 예수님을 경배하게 됩니다.

동방박사들은 다시 나타난 별을 쫓아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들어오신 성자 하나님 아기 예수를 만났고 예물을 드렸습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 아기에게 이런 예물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기라면 먹을 것 입을 것 장난감… 이게 더 좋습니다.

박사들은 아기 예수가 아니라 구세주에게 합당한 예물을 드립니다. 그냥 아기였다면 먹을 것 입을 것 장난감… 이런 예물을 드렸겠지요. 그러나 아기 예수는 만왕의 왕이고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입니다. 그들은 구세주에 맞는 경배와 예물을 드린 것입니다. 

황금. 만왕의 왕에게 영원한 왕관을 씌워드리는 심정으로 선물합니다. 값비싼 향료 유향. 세상에 사랑과 구원과 평화의 향기를 내는 왕이 되어주시라는 선물입니다. 시체를 썩지 않게 하는 방부제나 마취제로 사용하는 몰약.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하는 선물입니다.

 

예수님에게 최고의 선물입니다. 받는 사람의 신분에 맞는 선물이 최고입니다. 그 사람에 대한 인정과 신뢰가 최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게 선물을 드렸으면서도 책망당한 것은 하나님의 격에 맞지 않는 자투리 헌금, 가라지 예물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박사들의 선물이 귀한 것은 되돌려 받기 예물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고 고국으로 돌아갑니다. 아무런 보답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만왕의 왕이면 한 자리를 해도 엄청난 일을 맡을 것입니다. 대통령후보를 위해 뛰었고 당선되면 대통령인수위원회에 참여해서 엄청난 보상을 받으려 할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예루살렘에 머물지 않고 조건 없이 돌아갔습니다. 박사들은 되돌려 받기 거래를 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믿음의 순수함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 교회생활에 이런 순수함이 결여되었기에 걸핏하면 섭섭하고 억울하고 장거리경주가 아니라 단거리 경주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견딤의 길이가 쓰임의 길이를 결정하는 원리를 놓치는 것입니다!

 

<결론>

교역자 수련회 중에 전라남도 영광군 염산교회 순교사에 관한 글 한 편을 읽었습니다. 공산당에게 77명의 성도가 순교를 당한 교회입니다. 담임목사를 비롯하여, 한 집안에 네 살배기까지 9명이 순교했고 김만호 장로의 딸 넷도 순교했습니다. 언니가 15세인데 협박하는 공산당원에게 어린 동생이 울자 “울지 마라 우리는 천국 간다. 우리는 지금 천국에 가는 것이란다.” 달랬습니다. 바닷가 수문통에 수장되기 위해 새끼줄로 묶이는 과정에서도 “우리는 천국 간다. 우리는 더 좋은 곳에 가니까 두려워 말라” 위로했답니다. 네 자매의 의연한 모습에 공산당원이 오히려 떨다가 대검으로 목을 쳤답니다. 나중에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목이 잘린 네 소녀의 시신을 보며 온 교우들이 울면서 합장묘를 만들어 주었답니다.

 

세상이 점점 순수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앙인들조차 신앙을 담보로 너무 많은 것들을 대출 내지는 보험을 뽑아내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믿음이 세속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2012년 성탄절에 아기 예수님에게 선물을 드리는 것보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으면서도 먼 길을 뚜벅뚜벅 장거리 신앙경주자로 살았던 동방박사의 조건 없는 믿음을 선물로 달라고 우리가 그분에게로 손을 벌리고 나가야 할 때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