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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의 종교개혁 (에스라 10:1~5)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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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의 종교개혁

에스라 10장 1~5절

 

 

<서론> 
오늘은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지 495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신학대학 교수인 수도사 마르틴 루터는 돈을 주면 죄를 감해줄 수 있다는 면죄부 판매에 공분(公憤)을 품고 비텐베르그대학 정문에 95개항의 대자보를 붙임으로 종교개혁, 교황청 개혁운동은 시작됩니다. 이후, 종교개혁은 크게 세 방향으로 나눠집니다.

교황청 개혁. 중세기 바티칸이 너무 타락하고 비성경적이기에 교황청은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복음주의교회, 소위 개신교가 갈라져 나옵니다.

교황청 내부개혁. 교황청이 부패하고 타락한 것은 틀림없다, 그렇다고 딴 살림을 차릴 것은 없다, 교회 안에 머물면서 교황청을 개혁하자…. 지금의 로마가톨릭교회입니다.

종교로부터 개혁. 아예 이번 기회에 교황청개혁만 아니라 교회에서 해방되자… 인간은 신의 부속품이 아니라 대등한 존재다…, 이런 가르침은 르네상스, 문예부흥을 일으켰습니다.

그렇게 개혁운동이 시작된지 495주년, 그동안에 종교는 개혁되고 세상은 변화되었나요?  

 

교황청에서의 개혁을 외쳤던 개혁교회는 물질만능 번영신학과 생활 없는 기독교로 세상의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개혁하라고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개혁을 요구 받습니다.

교황청 내부개혁. 루터가 개혁운동을 일으키자 화들짝 놀란 교황청은 자체적인 자정작업, 교황청 개혁을 선포했지만 시늉만 했을 뿐 지금까지 교황청이 변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종교로부터의 개혁. 하나님으로 벗어나자는 르네상스운동은 과학문명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는커녕 1, 2차 세계대전을 겪은 서구지식인들은 인본주의가 만들어낸 문명에 절망을 느꼈습니다. 그렇다고 다시 교황청과 교회로 돌아가서 구속받기는 싫다며 서방세계는 하나님을 떠나고 아예 종교적 신념을 버렸습니다.

교황청 개혁은 왜 시늉만 내고, 개혁주의 개혁운동은 왜 절반(折半)의 성공으로 끝나고, 르네상스의 종교개혁은 왜 인간을 동물로 만들어 버렸습니까? 개혁의 칼끝을 내게로 겨누지 않고 남에게만 겨누었기 때문입니다. 개혁을 사람에게서 시작하지 않고 제도나 특정 인물만 겨냥하다보니 욕하면서 배운다지 않습니까? 개혁교회가 교황청을 욕하면서 교황청의 부패와 권위를 닮아갑니다. 그래서 500년이 되지만 개혁은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그렇다고 종교를 버리려니 인간에 희망이 없고 부패된 종교에서 살려니 영성이 없습니다. 

개혁은 이렇게도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개혁이란 달리는 자동차에서 펑크가 난 타이어를 바꿔 끼는 것보다 더 어렵다”, 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애당초 인간은 완전한 개혁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개혁은 회개를 외칩니다. 회개는 자기희생에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남의 희생을 요구하는 개혁을 외치기는 쉬어도 자신에게 칼을 들이대면 누구나 개혁을 싫어합니다. 희생해야하니까. 그러니 개혁이 성공하기 힘든 것입니다.


루터가 대자보로 붙여놓았던 개혁운동 95개 항목 1~3항을 요약하면 이것입니다.

1항.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 4:17) 하셨기에 우리 삶은 전체가 회개여야 한다!

2항. 회개는,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죄가 용서되는 종교 형식의 회개가 아니다!

3항. 회개는 마음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내적 회개가 육체의 죄악을 철저히 죽임으로써 밖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즉 생활로 나타나지 않으면 진정한 회개는 아니다!

루터의 개혁은, 인간 세상에 사람도 제도도 시스템도… 어느 것도 완전한 것은 없다, 그러니 절대화시키면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푯대로 삼아 계속 성장하고 나태하고 안일한 자신을 꾸준히 개혁해야 한다… 개혁하지 않으면 사람이든 교회든 석화(石化), 굳어진다… 그러니 하나님 외에는 항상 회개하고 개혁적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종교개혁운동입니다. 핵심은 교황청 사제들부터 개혁되고 생활로 개혁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루터가 개혁하고자 했던 것은 교황청의 인본주의 교리입니다. 성경에 없는 행위구원, 교황제도, 사제와 수녀들의 독신제도, 고해성사, 면죄부… 이것을 버리고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절대적 권위, 이신득의(以信得義), 만인제사장제도를 외칩니다.

루터의 또 하나의 개혁은 인간 탐욕입니다. 교황제도로 하나님을 대신하고 대리하고 온갖 부귀와 권력을 누리고… 지금도 교황청 지하금고에 있는 모든 보석과 골동품과 미술품 조각들을 경매하면 아마 세상을 다 사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루터는 교리적으로는 성경중심의 바른 구원관을 갖고 생활로는 탐욕에 빠지지 않도록 매일 회개하며 살자는 것입니다. 종교교리개혁, 종교제도개혁, 종교생활개혁을 외친 셈입니다.

루터의 개혁사상은 성경에서 출발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불완전함을 선언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인간의 추악함을 말합니다. 인간은… 생각이 허망하고 마음이 어둡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 비방, 능욕, 교만, 자랑, 악을 도모, 부모 거역,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 우매, 배신, 무정 무자비한 자라…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성이 하나님을 떠나면 어떻게 됩니까? 오이겐은 “종교를 내어버리면 정신생활도 인격도 개성도 다 내어버리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버리고 종교를 버리면 짐승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은 종교적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묘한 딜레마가 있습니다. 인간은 종교적 동물! 종교적+동물입니다. 종교는 영성입니다. 동물은 본성입니다. 내 안에 영적 성향이 있고 동물적 본성이 혼재합니다. 신자이건 비신자이건 목사나 신부건 내 안에 종교적 영성과 동물적 본성이 대립합니다. 

종교적 영성이 올라가면 점점 거룩하고 가치 있는 인간이 되고 동물적 본성이 올라가면 목사든 사제든 교황청이든 탐욕스러운 종교인이 됩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필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종교개혁은 자기개혁, 신앙개혁입니다. 내 안에 있는 종교적 영성은 밝혀주고 동물적 본성은 굳어지기 전에 계속 선한 쪽으로, 영성 쪽으로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본문에서 에스라가 대안(代案)을 제시합니다! 에스라는 약 2,500년 전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제사장이 기득권을 대표한다면 선지자는 개혁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오랫동안 우상숭배와 형식주의, 세속화로 죄가 굳어졌습니다. 더 이상 스스로는 개혁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70년을 포로로 보내서 묵은 죄, 고착(固着)된 죄를 벗겨냅니다. 에스겔은 70년 포로생활을 놋을 떼어내는 시련의 기간이라고 합니다(겔 24:11).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의 놋은 가나안에서는 스스로 떼어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에 포로로 보내어 시련과 연단을 통해 엄청 회개하게 만듭니다. 회개의 눈물로 죄의 놋이 제거됩니다. 놋이 벗겨지자 세 차례에 걸쳐 고국 예루살렘으로 귀환합니다.

 

에스라는 2차 귀환의 지도자입니다.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도착한 때가 5월, 4개월 정도 상황을 점검해보니 생활이 엉망입니다. 벌써 죄악이 이스라엘 각 계층에 보편적으로 퍼졌습니다. 원주민들과 죄를 짓고 이방여인과 통혼(通婚)합니다. 9장 2절, 방백들과 두목들(지도자)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지도층 인사들이 죄를 더 많이 지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라는 “기가 막혀 앉으니”, 넋을 잃은 것입니다. 백성들의 종교, 성전의 타락에 기가 막힌 것입니다. 에스라는 개혁을 외치기 전에 성전마당에 엎드려 울며 기도합니다. 예루살렘 도착 후 4개월 정도 되는 그 해 9월 20일입니다. 에스라는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죄악임에도 백성들의 죄를 내 죄라 고백하고(9:6-15) 괴로워하며 통회 자복합니다. 그러자 많은 백성이 따라서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남의 죄 때문에 통곡합니다.

 

그때입니다. 2절, 엘람 자손 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말합니다. 학사님… 우리가 이방여인과 통혼으로 죄를 지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서 바벨론 70년 포로생활을 해놓고도 몇 년 안 되어 같은 죄를 반복합니다. 그러나 학사님… 오히려 소망이 있나니… 우리 백성에, 우리 성전에 소망이 있으니 너무 비관하지 말고 울지 말라는 것입니다.

스가냐가 절망적인 상황에서 오히려 소망이 있다는 것은… 에스라의 간절한 자복의 기도와 백성들의 회개로 죄에서 완전히 돌아서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큰 은총을 베푼다는 기대와 함께 이번 기회에 대대적 종교개혁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때문입니다.

 

참 멋진 말입니다. 이게 대안을 제시하는 진정한 개혁입니다. 사람들은 한국교회를 비판합니다. 종교개혁을 맞아 직업적 개혁가들이 언론에 나와서 한국교회가 썩었다고 교회개혁을 외칩니다. 물론 한국교회는 개혁해야할 것들이 많습니다. 위에서부터 개혁되어야 합니다.

목사님들, 개인적 성공으로 아는 목회관이 팽배합니다. 대형교회들의 탐욕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동네 싹쓸이 전도를 합니다. 대형마트도 아니고 버스로 전 시내를 누빕니다. 그래서 큰 교회 만드니 남에게 주기 싫은 것입니다. 당연히 세습이 나옵니다. 한국교회의 명예심도 대단합니다. 우리 교단신문 두 주간 광고난에 얼굴사진이 396명(1886호), 419명(1887호)입니다. 너무 창피한 거 아닙니까?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하기야 사진까지 없이…는 말하지 않아서 그랬을까요? 교계 일간지도 다를 바 없습니다. 매일 수백에서 수십 명 얼굴 사진 나옵니다. 개혁의 첨병이 되어야 할 교계신문이 이러니 어떻게 한국교회가 개혁되겠습니까?

 

그럼에도 한국교회의 치부를 밖에 나가서 떠드는 직업적 개혁가들이 참 섭섭합니다. 그들이 한국교회 개혁을 외치지만 그런 직업적 개혁가들에게 소망이 없습니다. 소망은 누구를 통해 옵니까? 무너진 한국교회, 만신창이가 된 한국교회… 이런 교회를 붙들고 내 죄인 것처럼 하나님의 성전에 엎드린 에스라, 스가야 같은 사람들로 한국교회는 회복됩니다.

주일저녁 광주에 설교하러 갔다 우등고속버스를 탔습니다. 잠결에 한국교회 세습에 관한 내용이 들렸습니다. 참 웃기는 것이 기독교텔레비전에서 다루면 이해가 되는데 왜 KBS나 MBC가 교회문제를 심층적으로 캐대는지 모르겠어요. 저들이 방송사 이름으로 십일조를 했어요? 우리가 방송사를 해되게 한 것이 있나요? 우리가 한국사회에 큰 해악을 끼쳤나요?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로마가톨릭이나 불교에는 칼질을 할 것이 없을까요? 방송들이 건드리지 못합니다! 무서워서! 기독교는 사분오열되니 교회를 만만하게 보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교회치부를 드러내고 공격하는 자칭 개혁가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 남의 교회 가서 세습한다고 외쳐댑니다. 11시 예배시간 자기교회는 어떻게 하고 남의 교회에 가서 외칩니까? 나를 생각하면 그렇게 모질게 남을 공격하지 못합니다.

일전에 아들에게 교회를 세습한 대형교회 목사님이 세습의 정당성을 신문에 크게 광고를 냈습니다. 내가 보기에도 엄청난 광고비를 내면서 세습의 정당성을 주장할 사안은 못됩니다. 그 광고를 보고 한국교회 개혁을 외치는 목사님이 자기 페이스 북에 글을 올렸습니다.

“영적치매 수준의 발언이다… 치매라고 생각하니 이해도 되고 용서도 된다… 치매환자의 행위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은 어리석고 무의미한 일이므로, 그 광고를 보는 세상 사람들이 그 분을 본래 훌륭한 분이셨는데 몹쓸 병에 걸려 그러는 것이라 이해해 주면 좋겠다…”.

세습을 비난하면서 인격적 살인을 합니다.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공개적으로 상대방을 난도질합니다. 오히려 더 비신앙적인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 문제를 외부에서, 남에게서만 찾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중병이라면 중병입니다. 중병일수록 더 불쌍히 여기고 일단 살려놓은 것이 급선무가 아닙니까? 병들고 실패했을 때 누가 가장 섭섭한지 아시지요? 자기는 병에 안 걸릴 사람처럼 왜 병에 걸렸냐고… 내가 평소에 뭐라고 하더냐고… 그런 병에 걸렸으니 고생해서 싸다고… 그렇게 공격하는 사람이 가장 섭섭합니다.

 

지금 개혁의 정당성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지금은  한국교회를 꾸짖는 개혁선지자가 필요한 시대가 아니라 우는 제사장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한국교회를 위해 학사 에스라처럼 내 죄라고 자복하고 회개하며 눈물을 흘릴 사람들… 스가냐처럼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다! 한국교회에 아직도 소망이 있다…라고 위로와 격려를 줄 사람이 한국교회에 새 살을 돋게 하는 개혁가이며 개혁운동입니다. 맨날 한국교회를 비난한다고 문제가 달라집니까? 한국교회가 개혁이 안 된다면 나 자신이라도 개혁해야 합니다. 나 하나만이라도 바르게 믿고 바르게 살면 한국교회가 덜 썩고 썩는 속도가 그만큼 느려질 것이 아닙니까? 비판처럼 쉬운 것이 어디 있습니까? 비판만 한다고 됩니까?

스가냐처럼 개혁의 대안은 나 자신부터 출발합니다. 한국교회에 소망이 있다는 긍정적 희망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성경적 변질이다. 번영신학이 문제다… 이런 교리적 문제들 때문에 한국교회가 이렇게 된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한국교회를 타락시키고 변질시키는 요인은 생활이 없는 기독교, 성화가 없는 그리스도인들 바로 ‘나’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한국교회가 개혁되려면 아래에서부터의 개혁, 생활실천에서부터 개혁되어야 합니다.

스가냐가 뭐라고 합니까? 3절, 우리가 죄를 버리겠습니다… 4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개혁은 에스라가 아니라 백성들의 지원이 있어서 성공한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교단에 맡겨서도 안 됩니다. 직업적 개혁가들이 이루어 낼 수 없습니다. 일어나소서 우리가 돕겠습니다…. 외치는 개혁이 아니라 생활적 개혁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착한 교인 착한 목사가 되어야 합니다. 남에게 배려하는 사람이 착한 사람입니다. 교인과 분쟁이 생겨 경찰서에 오면 경찰관이 질린다고 해요. 교인들 너무 이해심이 없고 인색하다는 거예요! 파출부들도 교인은 싫어한답니다. 일은 많이 시키고 까다롭고 인색하다는 거예요!

우리가 정직하려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무지 노력해야 합니다. 전세금을 어느 선에서 그만 올려야 합니다. 한 번에 5천만 원씩 올리면 어떻게 빛이 되고 소금이 됩니까? 시민질서를 잘 지켜야 합니다. 공공장소에서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내가 손해를 보고 내가 양보해야 합니다. 음란적인 영화나 연속극은 보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돈을 내고 보지 말아야 합니다. 생활로 믿음을 증명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이 늘어나야 한국교회는 회복됩니다.

 

<결론>

베트남 전쟁 당시 머스트라는 사람은 날마다 백악관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의 반전(反戰) 시위에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지만 때로는 혼자 외롭게 서 있었습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머스트씨. 당신이 밤에 혼자 촛불을 들고 백악관 앞에 서 있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고 이 나라의 정책이 변하리라고 생각합니까?”

그때 머스트가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변하지 않지요! 나는 이 나라의 정책을 변화시키기 위해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 나라가 나를 변질시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요! 한국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고 비판만 하다 보니 실패합니다. 개혁은 나에게서 출발해야 합니다. 내가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개혁보다 세상이 나를 변질시키지 못하게 믿음으로 버티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한국교회를 회복시켜 나갈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교회를 믿습니다!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핏 값으로 세워진 하나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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