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려 레일(rail)
마태복음 6장 25~34절
<서론>
설교제목을 염려하지 말라! 라고 했는데 ‘고민’과 ‘염려’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손가락을 이마에 대며) 이렇게 하는 것은 염려이고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이렇게 하는 것은 고민일까요? 내 생각에 고민(苦悶)은 괴로움이고 염려(念慮)는 걱정입니다. 고민은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현실적 반응이고 염려는 아직 일어나지는 않는 예감에 대한 반응입니다. 고민은 머리영역이고 염려는 마음영역입니다. 고민하면 머리가 깨지고 염려하면 가슴이 떨립니다.
여기서 말하는 염려는 체질화된 염려입니다. 어떤 것에 집착되어 그 생각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는 심리적 불안상태, 거의 병적상태입니다. 2000년 전, 전쟁 나간 남편에게 아내가 파피루스 편지를 보냈습니다. “나는 당신의 신상을 염려한 나머지 낮이나 밤이나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잠자야 정상인데, 남편이 전쟁터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걱정되어 일할 때 일도 안 되고 잠잘 때 잠이 안 온다면 이게 염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정신병적 염려를 하지 말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건 교육용어가 아니라 염려 마! 군대명령문입니다. 우리는 염려 마! 명령을 받은 군인입니다. 이거 가능해요? 염려하지 말라! 명령을 받았다고 염려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아요?
인생에서의 염려는 숙명적입니다. 낙원이라던 에덴도 염려가 왔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 숨었습니다. 얼마나 떨었을까요?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제 정식으로 사형언도가 내려질 것입니다. 그 시간에 얼마나 염려합니까? 에덴에서 추방된 후 아기를 가졌는데 열 달 임신기간도 몰라요. 탯줄은 끊어야 하는 건지… 아이 키우면서 얼마나 염려의 연속이었으면 둘째 이름을 아벨이라고 했을까요? 아벨의 뜻은 한숨, 상실, 허무함입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찬송 369장도 말하고 있잖아요? (찬송)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아니진 자 누군가… 어느 사람이 현자(賢者)에게 염려 없는 곳에서 살고 싶다, 고 했습니다. 그러자 현자는 공동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저 사람들이나 걱정이 없다,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나 염려걱정이 있다, 살아있다는 특권은 염려를 몫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염려에서 놓임을 받고 싶은가요? 방법은 딱 하나! 영원히 잠들면(죽음) 됩니다. 빨리 염려에서 벗어나고 싶은 분들! 선착순 접수 받을까요? 손드세요! 저도 염려하지 말라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어떻게 전할까, 자꾸 염려되는 거예요. 그러니 염려는 누구에게나 보편적입니다.
그렇다고 내 삶에 사단으로 염려레일을 깔아놓아서는 안 됩니다. 사단에게 염려레일을 깔아놓으면 계속 염려가 몰려옵니다. 염려는 우울증, 신경쇠약… 등을 불러오고 결국 자기가 자기를 죽입니다. 그래서 “염려는 느린 자살이다”, 라고 말합니다.
사단에게 염려레일을 깔아놓으면 믿음이 자라지 못하게 합니다. 염려는 믿음의 적(敵)입니다! 염려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잘 자라던 믿음이 가시넝쿨 염려에 걸려 중단합니다. 염려 온도가 높아지면 신앙 온도는 낮아지고 신앙이 올라가면 염려온도는 내려갑니다. 그러므로 내게 염려와 걱정이 쌓이거든, 사단에게 레일을 깔아놓은 줄 알고 기도해야 합니다.
염려는 남을 돕지 못합니다. 자기에게 집착해서 골머리를 앓으니 남을 도울 에너지가 없습니다. 나도 힘든데 어떻게 남을 돕겠어요? 남을 돕지 못하니 주님에 대한 헌신도 없습니다. 그래서 염려에 중독되면 기쁨이나 성령 충만을 누리지 못합니다.
1. 염려는 왜 생기는가요?
염려라는 헬라어는 '분열', '나뉘다'는 뜻으로 지나친 근심으로 마음이 분열되는 상태입니다. 한문 염려(念慮)도 생각할 念, 생각할 慮입니다. 이리저리 고려하다보니 마음이 나뉩니다. 어느 정도 나뉘는가? 마음이 사분오열 조각납니다. 마음을 집중해야 공부도 되고 일도 되고 모든 것이 되는데 염려로 분열되니 내 인생이 행복할리도, 잘 될 리도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레일을 깔아놓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왜 자꾸 사단 쪽으로 염려레일을 깔까요?
㈀ 잘못된 경제논리 때문에 사단에게 레일을 깝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사실 의식주(衣食住)는 세상을 사는데 필수적입니다. 먹는 거 마시는 거 입는 거! 이건 염려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필수적이기에 구하고 찾아야 될 문제입니다. 의식주가 갖추어져야 화목하고 행복합니다. 이것을 무시하는 것은 사막 수도사들의 라이프스타일입니다. 매일 일상적인 필수품을 계획하고 살피는 것은 앞일에 대한 예측이며 계획입니다. 이런 것까지 주님께서 금지시킨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일상적으로 필요한 것이 왜 염려가 되었나? 하는 것입니다. 의식주가 내 목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어 염려하지 말라! 는 금지는, 남들보다 더 좋은 먹을거리, 입을 것, 마실 것… 이런 욕심 때문에 병적으로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욕심은 사단의 염려레일을 깔아놓는 것이기에 내 인생에 사단을 불러 옵니다.
염려의 반대말은 평안이 아니라 자족함입니다. 염려는 결국 자족(自足)하지 못함을 뜻합니다. 그래서 채워지지 않아도 될 부분을 남들과 비교하면서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에 무사태평~ 그거 아닙니다. 그 걱정은 본성입니다. 그러나 고질적 근심병(病)이 목숨을 위협하고 몸을 망가지게 하는 중심 선(線)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성장을 막고 헌신하지 못하고 느린 자살이 되기에 염려하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 하나님보다 상황을 바라볼 때 근심레일이 생깁니다. 세상은 크고 작은 사건들, 위기, 힘든 일들이 지뢰처럼 곳곳에 매몰되어 있습니다. 북한 군인들이 남한으로 탈출할 때 한발 한발 내 딛을 때마다 얼마나 걱정하며 고민합니까? 이런 지뢰들이 내 인생에도 언제 어느 곳에 묻혀있는지 몰라, 밟을지 몰라, 꽝! 터져서 내 인생 망칠지 몰라 염려하며 두려워합니다.
또 어떤 일을 당해서 내 관점으로 보면 도무지 역부족,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염려합니다. 감당되는 것들은 염려가 없습니다. 같은 천만 원이라도 감당되는 사람에게는 염려의 대상이 아닙니다. 단돈 백만 원도 없는 사람에게는 천만원이 염려가 됩니다.
내 앞의 어려운 상황을 내 수준으로 보니 염려가 됩니다. 나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 하찮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다의 풍랑에서 제자들을 꾸중하셨습니다. 염려 자체를 꾸중한 것이 아닙니다. 지나친 두려움을 꾸짖은 것입니다.
제자들은 풍랑만 보았지 바다 주인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는 분이기에 주무셨지만 제자들은 풍랑을 잔잔하게 할 능력이 없기에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상황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은 엄청 크게 보였고 염려도 컸지만 기도하면서 하루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상황이 작아졌기보다는 내가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거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믿음이 성장하면 하나님의 관점으로 점점 안목이 변합니다.
㈂ 성격에서 옵니다. 예민한 사람이 근심도 많이 합니다. 경제적 염려, 자녀문제, 앞일에 대한 불확실성… 누가 자녀대학문제로 고민하다가 정신병원에 찾아왔습니다. 우리 아이가 어떤 전공을 해야 할지… 어느 대학에 가야할지… 고민입니다. 아이가 고등학교 몇 학년입니까? 이제 막 돌 지났어요. 이런 사람들 걱정할 것이 없나, 찾습니다. “걱정도 팔자다”라는 말은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걱정 레일을 깔아놓고 내게 오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입니다.
내 일생에 큰 영향력을 준, <적극적 사고방식>을 쓴 노먼 빈센트 필 박사는, 절대 발생하지 않을 사건에 대한 걱정 40%, 일어난 사건에 대한 걱정이 30%, 별로 신경 쓸 일이 아닌 작은 것에 대한 걱정이 22%, 내가 바꿀 수 없는 사건에 대한 걱정이 4%라고 합니다. 결국 사람들은 96%의 쓸데없는 걱정 때문에 기쁨을 쏟아버리며 살다가는 존재입니다. 염려는 주님에게 우리 자신을 맡기지 못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걸 알면서 염려하니 딜레마입니다.
2. 염려를 극복하는 법
㈀ 염려 대신에 하나님께 구하고 레일을 까세요. 염려가 올 때 염려가 나를 주장 못하도록 하세요! 내 힘으로 안 됩니다. 염려를 제압할 수 있다면 왜 염려하겠어요? 애써도 안 되니까 머리 싸매고 끊었던 담배 베란다에서 피우는 거잖아요? 맨 정신으로는 염려를 상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술 힘을 빌려 이기려 합니다. 취했을 때는 염려를 잊어버렸다가 깨면 다시 염려됩니다. 그래서 또 술을 마시고… 이러다보니 술에 깨지 않기 위해 술을 마십니다.
<어린왕자>에서 어린왕자가 술주정뱅이에게 물어요. 아저씨… 왜 술을 마시나요? 술을 마시는 것이 부끄러워서 술을 마신다…. 묘한 말입니다. 술 마시고 염려 쫓는다? 반창고 붙이는 처방입니다. 그렇게 해서 될 것이면 처음부터 염려로 인생이 흔들리는 일은 없습니다.
컵에는 공기가 들어 있습니다. 아무리 공기를 없애려고 해도 없애지 못합니다. 공기를 없애는 방법은? 컵에 물로 채우면 됩니다. 그러면 물이 들어가는 것만큼 공기는 사라집니다.
내 마음 공간에 염려가 가득 들어왔습니다. 이걸 염려가 아닌 것으로! 염려를 제어하고 염려를 없애고 내 마음에 평안을 주는 것으로 채워야 합니다. 염려가 왔을 때 빨리 하나님에게로 레일을 까세요! 큰 염려는 큰 레일! 작은 염려는 작은 레일을 까세요! 즉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평안을 구하세요! 능력을 구하세요! 견딜힘을 구하세요! 구하는 자에게 염려레일을 통해 하나님의 평안의 기차가 도착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교인들에게 말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리라…(빌 4:6, 7). 할렐루야! 할렐루야!
㈁ 성품을 개조하십시오. 인디언의 전승입니다. 마법사 집에 생쥐가 살았는데 같이 사는 고양이 때문에 늘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마법사가 보다 못해 쥐를 고양이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고양이가 되면 편안할 줄 알았는데 개 때문에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마법사에게 부탁해서 개로 변신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제는 호랑이가 무서웠습니다. 호랑이로 변신시켰더니 사냥꾼이 무서워서 견딜 수 없다는 말에 마법사가 말했습니다.
“다시 쥐가 되어라! 무엇을 만들어 줘도 쥐 심장밖에 가질 수 없으니 나도 어쩔 수 없다!”
대범한 사람은 염려와 걱정이 밖에서 들어오고 소심한 사람은 안에서 발생됩니다. 그러니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소심하면 작은 것에서 큰 것까지 도매금으로 염려하고 대심하면 작은 것은 흘려버리고 큰 것만 염려합니다. 그러면 인생에서 염려 횟수가 훨씬 줄어들며 줄어든 것만큼 풍성함을 누립니다. 그러기에 소심을 용량을 넓혀 큰마음으로 자꾸 만들어 내야합니다. 자꾸 담력을 키워야 합니다. 소소한 말에는 그냥 넘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성령 충만을 받으면 됩니다. 고양이에게 쫓기던 개가 술독에 빠져 허우적대더니 잠시 후에 나와서 고양이 앞에 섭니다. 고양이가 잡아먹으려 다가오자 취중에 한다는 말이 고양이 자식! 너 잘 만났다! 너 오늘 제삿날이다! 하면서 노려봅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고양이가 줄행랑… 생쥐도 술독에 빠져 술이 들어오고 술에 취하니 겁이 없어지는 것처럼 성령에 취하면 겁이 없어집니다.
그러니 약한 심정의 소유자일수록 더 열심히 믿고 성령 충만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이 권능이 다이너마이트입니다. 이걸 들고 서 있으면 어떤 태산도 무섭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가랴 선지자는 말합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네가 평지처럼 낮아지리라!(슥 4:7). 이게 사자(獅子) 심장을 갖는 것입니다!
㈂ 염려하도 않아도 될 것을 가려내세요. 염려가 모두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히려, 너희 안일한 여인들아 일어나 내 목소리를 들으라. 염려 없는 딸들아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염려 없는 여자들아 일 년 남짓 지나면 너희가 당황하리니 포도 수확이 없으며 열매 거두는 일이 이르지 않을 것임이라…(32:9, 10)고 합니다.
어떤 염려는 좋은 거예요! 그것은 염려로 내 자신의 영적 부족을 돌아보게 만들고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만드는 선한 염려레일입니다. 사단을 불러오지 않는 레일의 염려입니다. 그런 염려들은 하세요! 문제는 내 믿음에 불필요한 염려들,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염려들… 병적인 염려들… 이런 염려레일은 가려내고 걷어내고 하나님을 신뢰하게 인도하는 염려레일은 까세요! 그 염려가 없으면 감성이 말라버리고 매력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변에 별다른 영향력이 없습니다. 그러니 염려할 것은 하고 무익한 염려만 버리세요!
㈃ 하나님에게 맡기십시오!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인생의 문제들이 있습니다. 중병에 걸렸는데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당장 부도가 났는데… 내일 시험발표가 나는데… 이건 염려하지 않겠다고 발버둥 쳐도 넘어갈 수 없습니다.
이런 염려는 하나님에게 맡기는 레일을 깔아야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고 합니다. '맡기라'는 명령어는 던져버리라! 는 명령단어입니다. 던져버리라! 휴지는 휴지통에! 빨래는 빨래 통에! 염려는 하나님창고에 던져버리라는 것입니다. 휴지를 끌어안고 있는 사람들이 있나요? 빨래를 움켜쥔다고 되나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휴지통, 빨래 통에 던져야 합니다. 그래야 정리가 됩니다!
염려를 왜 친정어머니에게 던질까요? 하나님에게 던지세요! 아이고 하나님 나는 모르겠습니다. 애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처분에 맡깁니다. 그럴 때 내 염려가 하나님에게 전송됩니다. 염려택배를 남에게 던지면 돌아옵니다. 왜? 누구든 그걸 감당 못하니까 염려가 택배로 올 때 문을 잠가버립니다. 그러면 다시 내게로 옵니다. 술기운조차 제정신되면 부메랑처럼 내게 옵니다. 그래서 다시 술에 취하고 이게 안 되면 자살합니다.
하나님에게는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염려를 이기는 분입니다. 내가 염려를 던지면 하나님은 받으시고 염려를 없애주시고… 무게를 덜어주시고… 감당하도록 넉넉한 등판을 주시고 염려를 통해 소심은 대심으로, 작은 믿음은 큰 믿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염려가 성화(聖化)에 이르는 레일이 됩니다. 그래서 염려도 내게 유익이었다! 고백하게 하십니다.
<결론>
어떤 분이 그래요, 신구약성경에서 염려라는 단어가 365회가 나온다고… 확인은 못해보았지만 그게 사실이면, 사실이 아니어도, 1년 365일은 매일매일 염려의 박격포가 날아옵니다. 우리는 염려에서 단 하루도 놓임을 받지 못했습니다.
김포공항 주변에 사니 비행기는 실컷 봅니다. 비행기는 약 3분마다 한 대씩 착륙하고 이륙합니다. 하나가 가면 또 하나가 와요. 염려도 그래요! 수없이 비행기가 날아가고 날아오듯 염려도 수없이 오고갑니다. 염려를 물리칠 박격포가 필요합니다. 날려 보낼 것은 날려 보내고 품을 것은 품으세요! 그러면 그 염려가 진주가 됩니다. 우리 인생의 성화(聖化)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염려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