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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레마 해법(解法), 은혜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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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레마 해법(解法), 은혜

요한복음 5:1~9

 

 

<서론> 

딜레마(dilemma)란 단어 아시지요? 딜레마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어느 쪽을 선택해도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가 나오는 곤란한 상황입니다. 한문으로는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진 것이고 궁지(窮地), 매우 곤란하고 어려운 일을 당한 처지에 몰린 경우입니다.

심순애 딜레마. 이수일을 따르자니 돈이 울고 김중배를 따르자니 사랑이 운다….   

 

유대인 딜레마. 독일비밀경찰이 아버지가 숨은 곳을 대라고 합니다. 숨은 장소 알리면 아버지를 죽인 불효자가 되고 모른다면 거짓말을 말라는 율법계명에 위배됩니다. 진퇴양난.

 

아서왕의 딜레마. 왕비가 왕에게 신임 받던 기사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불륜은 했지만 사랑하는 아내고 사랑은 하지만 법으로 백성을 다스려야 하는 집행관입니다. 아내를 죽이면 왕의 인생이 끝나고 아내를 살리고 법을 죽이면 왕의 통치권이 끝납니다. 사랑과 법의 충돌. 남편과 왕의 신분 충돌. 아서 왕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집니다.

 

하나님의 딜레마. 불순종해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을 죄로 다스리자니 사랑이 걸리고 그냥 용서하자니 공의에 걸립니다.

 

대한민국 남자의 딜레마. 고부간의 갈등에서 아내 말을 들으려니 어머니가 가엷고 어머니 편을 들으려니 아내가 안 됐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 이게 딜레마입니다.

살다보면 어느 한 쪽만 편들지 못하는 딜레마들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도 딜레마입니다.

 

1. 명절 딜레마

1절에 ‘유대인의 명절에…’라고 나옵니다. 칼빈은 오순절 명절로, 여러 성경학자들은 유월절 명절로 해석합니다. 어느 명절이든, 예수님이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목적은, 절기로 모여든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성전 예루살렘에는 수많은 인파들이 있습니다. 사는 것도 괜찮고 종교심도 많습니다. 시간도 낼 수 있는 사람들… 넉넉하고 너그러운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훨씬 효과적입니다.

 

명절날 베데스다의 무리들. 예루살렘 안으로 희생제물 양이 출입하는 양문(羊門), 그 곁에 베데스다 연못이 있습니다. 연못주변에 현관 성격의 행각이 다섯 채나 있었습니다. 명절에는 행각이 빌 것 같은데 오히려 3절,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서 고침받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명절날, 가족과 있어야 하고 맛난 음식과 아늑한 집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어느 하나도 없습니다. 참 안 된 사람들이지요.

 

자, 예수님 입장을 보세요. 명절에 참여한 성안의 사람들과 함께 할 것입니까, 베데스다 병자들과 함께 할 것입니까? 손익계산을 해보세요! 성읍 안, 성전 안에 있으면 많게는 백만 명을 만납니다. 유력한 사람들, 돈줄이 될 사람들,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힘이 되어줄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교훈을 전하고 내 편으로 만들 것이냐?

베데스다 병자들. 별로 쓸 만한 사람들이 못 됩니다. 건강이 있어요, 재산이 있어요? 돈도 없고 건강도 없으면 올바른 정신이라도 있어야 희망세력이 될 수 있는데 그것도 없어요! 예수님에게는 힘이 될 사람들이 아니라 짐이 될 사람입니다.

 

예수님, 어디로 가야합니까? ‘내게’ 힘이 될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 성안으로 가야 합니까, ‘내가’ 힘이 되어주어야 할 사람들을 찾아 베데스다로 가야 합니까? 어느 것이 진정한 유월절의 의미입니까? 은혜를 받는 쪽으로 가야합니까, 은혜를 베푸는 쪽으로 가야합니까?

 

예수님의 딜레마입니다. 예수님은 은혜로 이 딜레마를 해결했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것은 측은지심(惻隱之心), 남을 불쌍하게 여기는 타고난 착한 마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고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어머니의 마음은 누구에게 기울어집니까? 더 아프고 더 못 살고 도 고생하는 아들에게 늘 마음이 기울어집니다. 안타까워합니다. 그것이 측은지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측은지심의 마음을 가져왔습니다. 그랬더니 성전의 힘이 되는 사람들보다는 베데스다의 힘을 들게 하는 사람들에게 발걸음을 옮기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손익계산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 시대는 부흥과 성장을 요구합니다. 어느 교회는 교회를 부흥시키지 못한다고 목사님을 나가라고 해서 분란이 생깁니다. 그러다보니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딜레마에 빠집니다. 교회다운 모습을 위해 성장을 포기할 것인가, 교회 부흥을 위해 교회의 본 모습을 놓칠 것인가?

이런 때 우리의 중심은 하나님의 은혜의 마음, 예수님의 측은지심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내게 힘이 될 사람이 아니라 내가 힘이 되어야 할 사람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베데스다는 은혜의 집이 되었습니다. 베데스다의 원 의미는 은혜의 집입니다.

우리 교회도 측은지심의 마음으로 은혜의 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내게 힘이 되는 사람들이 아니라 짐이 되는 사람들을 향한 측은지심의 마음이 베데스다 은혜의 교회를 만들어 낼 줄 믿습니다.

 

2. 38년 딜레마

베데스다 연못에 가신 예수님, 그중에서 38년 된 병자를 찾았습니다. 회랑이 다섯 채라면 50명 이상(유진 피터슨은 수백명이라고 한다.)의 병자들이 있을 텐데, 왜 그 남자입니까? 아마 병자 중에 가장 오래도록 누워있는 사람 같아요. 태어나면서 그랬다면 38년째요, 중간에 그랬다면 50년은 넘었을 것입니다.

그 환자가 예수님을 가장 절절하게 쳐다보았을 것 같아요. 그의 눈이 가장 절망적일 것 같고요. 생각해 보세요. 38년을 누웠으면 삶 자체가 오욕입니다. 얼마나 자신을 혐오했을까요? 걸어 다녀야 자살하던 뭘하던 할 텐데… 걸을 수 없으니 자살조차도 힘듭니다.

38세 이상 된 남자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6절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합니다. 7절, 물이 움직일 때에… 베데스다연못은 간헐천 같습니다. 간헐천은 주기적으로 분출하는 온천입니다. 언젠가 물이 움직일 때에 병자가 들어갔다가 우연히 가벼운 병이 나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들어가면 낫는다는 전설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사람이 최악의 경우가 되면 전설을 만듭니다.

 

말기암이 되면 별의별 민간요법이 나옵니다. 자기 오줌을 먹고 암에서 나왔다는 치료법이 일본에서 건너왔습니다. 그거 말짱 헛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말기암 환자들은 그걸 반신반의하면서 울면서도 자기 오줌을 마십니다. 딜레마이지요. 낫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희망이라도 없으면 살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설 같은 요법에 의지합니다. 

남자병자가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물이 동할 때 7절,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게 삶의 모순입니다! 물이 동할 때 가장 먼저 뛰어든 사람이 낫는다는 전설이 사실이라고 가정해 보세요! 3절에 누가 있나요?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 제 몸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고 누워서 고침받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일등을 한다는 가능성은 거의 제로입니다.

팔레스타인은 무덥기에 피부병과 잔병들이 많습니다. 무좀, 염증, 덧난 상처, 다래끼… 생업에 크게 지장 받지 않는 환자입니다. 이만한 피부병이나 잔병은 고쳐줄 의원도 많습니다.

그런데 연못물이 흔들리면 두 발 두 손 멀쩡한 사람들이 쏜살같이 달려갑니다. 그냥 살아도 될 사람들이 혜택을 누리고 연못이 아니면 치유 될 수 없는 병자들은 누워있기에 남들이 업고 달려가 주지 않으면 절대 1착(着)이 될 수 없습니다. 베데스다는 치유의 장소면서 꼭 필요한 환자들에게는 치유가 100% 불가능한 곳입니다. 이런 곳에 백날 살아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여기를 떠나지 못하는 38년 된 남자는 딜레마 인생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에 누워있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건강하려고 하염없이 기다립니다. 누가 연못에 1착(着)합니까? 건강한 사람이 선착순 1등을 합니다. 병자들을 위한 전설이 정작 병 때문에 혜택을 못 받고 혜택은 건강한 사람이 누린다는 사실은 베데스다의 모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었습니다. 계명을 지켜야 의인이 된다! 내 나라는 의인이 되어야 들어간다! 정작 이스라엘을 비롯한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38년 병자가 제 발로 걸어 연못으로 나아갈 수 없듯 죄인 인간은 자력으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의인 되는데 정작 죄인 된 인간은 자력으로 38년 된 이 남자처럼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습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하고 부패하고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계명을 지키면 의인이 되어 구원을 받는다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할 수 없는 전설과 신화에 이스라엘은 메여 율법주의자가 된 것입니다. 딜레마입니다.

어떻게 이 딜레마를 해결합니까? 딜레마의 해결은 오직 은혜로 가능합니다. 38년 된 병자는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주님…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베데스다에서는 고침 받을 확률이 1%도 안 됩니다. 기어가도 다른 사람들이 1등을 차지합니다. 이제 나는 당신에게만 희망을 겁니다.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앞장(4장) 마지막을 보세요!

54절,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첫 번째 표적은 물이 변하여 포도주를 만들고 두 번째 기적은 거의 죽게 된 사람을 살려낸 것입니다. 어느 것에 비교해도 내 입장, 내 상태가 나은 편입니다. 그 정도 능력이라면… 명절날 성전을 포기하고 베데스다에 오실 분이라면 목적을 갖고 오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신세타령하고 남을 탓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통한 제3 기적의 체험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치유를 원하는데 정작 치유 받는 사람은 먼저 달려간 건강한 사람… 그 사실을 알면서도 38년을 떠나지 못하는 자신의 모순! 그 딜레마를 해결하는 길은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우리의 딜레마는 어떤 것입니까? 정작 행복한 사람들은 더 많이 행복하고 많이 소유한 사람들은 오히려 더 많이 수입이 늘어납니다. 정작 그 행복이 필요한 내게는 작은 행복조차 없고 정작 돈이 필요한 내게는 그 작은 돈조차 없습니다. 약자의 딜레마! 그러면서도 성공을 포기할 수 없어 로또복권을 사고 일확천금의 용꿈을 꾸고 있는 나의 딜레마! 

이제 남들 탓하고 일확천금의 신화에 기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나보다 더 힘들고 더 아픈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베데스다의 참상은 끔찍합니다. 38년 된 병자보다 더 아픈 사람은 시각장애인, 농아 정신질환자… 이제 그런 사람들이 7절 하반절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먼저 내려가나이다” 경쟁자가 아니라 함께 걷고 함께 동행하는 동반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교회에 있다면 우리교회야 말라 베데스다 은혜의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이 동(動)할 때 말씀과 함께 일어나는 베데스다의 신화를 만들어 낼 줄 믿습니다.
 

3. 일등 딜레마

운동경기에서 뒤뚱뒤뚱 달리는 모습에 뿌듯하다가도 참 안됐다, 고개를 돌리기도 하는 것이 장애인 올림픽, 페럴림픽입니다. 장애인올림픽은 재활에 대한 의지와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장애인 체전입니다. 금메달 은메달보다는 우정과 협동입니다.

이제 올림픽이 국가와 개인의 명예, 돈이 되어버렸듯이 장애인 올림픽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정과 격려보다는 1등입니다. 그러다보니 서로간의 경쟁이 되고 금메달을 따기 위해 오히려 장애인을 학대하고 이용하는 결과가 나옵니다. 등수에 들지 못하면 운동장에 앉아 펑펑 웁니다. 재활에 대한 의지와 자부심보다는 다시 한 번 좌절과 절망을 갖다 줍니다.

그렇다고 장애인올림픽 정신에 맞추려고 넘어진 선수를 일으켜 세우고 함께 달리면 관중들에게 감동은 주지만 금메달은 놓칩니다. 1등 하려니 남을 배려하지 못하고 동료를 좌절시키고 내가 1등하면 감동도 못 주고 올림픽 취지에도 어긋납니다, 장애인올림픽의 딜레마!

 

지금 상황이 그렇습니다! 베데스다에 많은 병자들이 있습니다. 그나마 걸어 다니는 사람들은 양호한 편입니다. 누워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명절날 얼마나 초라하고 민망합니까?

건강한 사람이라면 명절 떡이라도 나누며 명절을 보냅니다. 북한 실향민들도 명절이면 모여 공동 차례를 올리고 고향이야기로 푸근한 정을 나눕니다. 헐뜯고 싸우던 건강한 사람들도 명절에는 다 잊고 화기애애한 절기를 보낼 텐데 베데스다 상황은, 아니올시다!

이 날은 오히려 눈에 살기가 돕니다.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동하는 날이라면 유월절 같은 특별한 명절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눈길도 보지 않고 뚫어지게 연못만 노려봅니다. 명절에 집에도 못 가는 처량한 신세… 이런 생각 자체가 분에 넘칩니다. 모두 내 경쟁자입니다. 여기에는 자비도 없고 우정도 없고 사랑도 없습니다. 가장 먼저 물에 뛰어든 단 1명만 고침을 받는 철저히 1등주의입니다. 2등은 살아남을 수 없는 비정한 사회입니다.

 

이 남자의 말도 보세요. 7절,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다른 사람… 나보다 먼저 앞서 가는 사람… 여기에 우정이 없습니다. 물이 동할 때 엉키고 싸우고… 그러다가 아무 일도 없이 서로의 자리로 돌아오면 미안함과 증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지만 1등만 살아남을 수 있기에 남들을 배려할 수 없는 1등주의, 딜레마입니다.

나 때문에 은퇴한 사람, 나 때문에 승진 못하고 조기퇴직을 한 사람… 그 사람도 안 되었지만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살 수 있는 경쟁사회, 그러면서도 낙오자들을 생각하면 미안해지고 부끄러워지는 마음… 이것이 착한 사람 딜레마입니다. 

베데스다의 1등사회는 철저히 능력위주입니다. 사람이 선하냐 옳으냐? 문제가 아닙니다. 그가 얼마나 빨리 달릴 수 있느냐? 능력이 있느냐? 능력이 인간의 조건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게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 살면서 수없이 딜레마에 빠집니다. 1등주의로 살려니 좋은 사람이 못되고 좋은 사람으로 살려니 남들에게 뒤치는 무능력자가 됩니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은혜로 풀어야 합니다. 남에게 계속 은혜의 자세를 견지하되 내 가는 길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나도 잘 되고 남도 잘 되는 상생의 길, 그런 길을 걷게 해달라고 은혜를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비정한 승부자들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눈, 은혜의 마음으로 보면 저기 누워있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들을 일으켜 세우고 함께 걷는 상생의 길을 찾아보세요. 그럴 때에 나도 병을 고침 받고 남의 병도 고침 받도록 도와주는 진정한 치유자가 됩니다. 그러면 우리교회가 베디스다 은혜의 교회가 될 줄 믿습니다.

 

<결론>

예수님도 딜레마 인생입니다. 9절, 이 날은 안식일이니… 유대인에게 안식일은 철저히 무(無)노동의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병자를 고쳐줄 때 8절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 안식일을 어기는 노동입니다, 사람을 고쳐주는 것도 노동이라고 본 것입니다. 10절 이하에는 결국 이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면 노동으로 율법을 어겼다는 공격을 받고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베데스다를 떠나면 이 남자와는 영영 만날 길이 없습니다. 안식일 무노동제도를 어길 것인가, 그래서 남자를 고쳐주지 말고 모른 척 그냥 갈 것인가? 그냥 가면 율법은 지키지만 그 동안에 가르쳤던 사랑의 교훈에 위배됩니다. 위선자가 되는 것이지요! 남자를 고쳐주면 유대 율법을 어기는 범법자! 그냥 가면 사랑의 위선자가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딜레마!

예수님은 사람을 택했습니다. 사람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의 길입니다. 은혜의 길이 있었기에 하나님도 예수님도 공의와 사랑의 관계에서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요! 은혜만이 모든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베데스다의 이름은 은혜의 집입니다. 은혜가 있었기에 베데스다에 희망이 생긴 것입니다. 이제 우리 늘빛교회가 진정한 베데스다집이 되어 은혜를 보관하고 은혜를 나눠주는 은혜의 교회가 되기를 함께 더욱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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