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에

게 접속(接續)할까?
사무엘상 28:8~14
<서론>
오늘 추석명절입니다. 명절은 즐겁고 행복한 날… 오래전까지는 그래왔습니다. 그래서 추석은 먹을거리가 풍성한 계절에 송편도 빚고 행복도 푸짐했습니다. 휘영청 밝은 대보름 달빛 아래 강강수월래 춤을 추고 가마싸움 소싸움 씨름하면서 우정을 다졌습니다.
얼마나 좋은 날입니까? ‘하늘’이 베풀어주신 은덕에 감사하고 곡식을 수확하는데 도움을 준 이웃끼리 감사하며 애썼다고 격려하는 명절이 언제부터 종일 고생하고 분란이 일어나 사이가 더 멀어지는 고생절이 되어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 조상들이 언제부터 명절이라는 코드를 잘못된 조상제사라는 잘못된 콘센트에 꼽아버렸기 때문입니다. 밝은 에너지에 꽂으면 밝은 에너지를 공급받고 어두운 에너지에 꽂으면 어두운 에너지를 받습니다. 추석을 명절에 꽂아야 즐거운 명절 되는데 고생절에 꽂으니까 실컷 고생만 하는 고난절(?)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원래 우리 조상들은 ‘하늘’을 섬기는 부족입니다. 씨앗을 뿌릴 때 하늘에 제사 드렸고 끝나면 비와 햇볕을 주신 하늘에 감사제(祭)를 올렸습니다. 특별하게 조상제사는 없었습니다. 조상제사는 중국 공자 이전에 하(下)나라와 상(上)나라 때 시작되고 주나라(주전 1100년) 때 성행했습니다. 처음부터 죽은 조상에게 드린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종손(宗孫)을 높이는 뜻으로 높은 곳(上座)에 앉혀놓고 제사형식의 예(禮)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중국황실의 정치목적으로 이용됩니다. 중국황실이 자기네 혈통은 하늘에서 내린 것이기에 누구도 반역이나 정권 찬탈의 엄두를 내지 못하게 황실제사를 거창하게 드리도록 한 것입니다. 하늘과 황실가문을 동일시한 고도의 통치철학입니다.
처음에는 황실 조상에게만 제사 드렸는데 권세 깨나 있는 신하들이 가만 보니 괜찮거든요. 그래야 뼈대 있는 집안이고 조상들 은덕이 자손만대로 이어질 것 같아요. 그래도 대놓고 그러면 무엄하다 하기에 살짝 명분을 바꿨어요! 황실은 제사를 잘 드려 좋은 왕이 계속 태어나고 신하들은 제사를 잘 드려야 좋은 신하가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조상들에게도 제사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뻔히 알면서 서로 이용한 것입니다.
이게 점차 평민들도 신분을 높이는 수단으로 제사를 이용합니다. 평민들이 보니 제사제도가 괜찮아요. 우리는 왜 못하랴. 우리 조상은 조상이 아닌가? 권세 있는 조상들은 죽어서도 좋은 것 먹는데 우리 조상들은 굶기랴! 그래서 춘추전국시대에 조상제사는 일반화되고 효(孝)의 개념이 아니라 가문의 축복을 얻어내는 경배의 대상, 종교가 된 것입니다. 조상제사의 종교적 기반을 유교가 제공한 것입니다.
우리민족의 조상숭배는 고려이전에는 없었습니다. 고려말엽(1392년) 중국 주자학이 들어올 때 제사의식도 들어왔습니다. 이씨조선이 개국하면서 유교가 국교가 되고 조상제사는 일반화됩니다. 결국 뭐지요? 제사는 조상숭배와는 관계가 없다는 거예요! 박태선 문선명이 종교를 수단으로 자기자식들 호의호식하는 재벌이 되고 김일성이 김씨(金氏)왕국을 위해 공산주의를 이용하고, 중동국가들이 정치를 위해 이슬람교를 수단화한 것처럼 조상제사가 정치가들에, 권력 기득권에 이용당한 것입니다. 죽은 우리 조상들과는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지금 조상숭배는 어때요? 제사 드리는 분들의 사정은 이런 마음입니다.
-기념의 개념. 우리 집안의 전통을 생각하고 집안 정신을 후손들에게 길이길이 이어가도록 조상제사를 매개체로 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념일로 집안의 뼈대를 세워나가는 것이지요!
-효(孝)의 개념. 살아서도 효도했지만 돌아가신 후에도 효도하겠다는 선한 마음입니다. 아니면 살아생전에는 제대로 효도하지 못했습니다. 깨달음이 늦어서… 사는 것이 힘들어서… 돌아가신 후에라도 정성을 다하려고 번잡스럽지만 제사를 드립니다.
-축복의 개념. 조상을 내세에서 복과 재앙에 간섭할 수 있는 혼령이라고 봅니다. 제사를 통해 조상에게 정성을 다하면 선한 조상으로 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유교의 개념. 유교는 공자의 가르침에서 시작된 사상이지 종교는 아닙니다. 도덕 사상. 인(仁) 사상을 바탕으로 나라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중시하는 사상입니다. 효도는 생존 부모를 위한 것인데 죽은 부모에까지 드리는 조상제사를 통해서 백성들을 옭아매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유교도 정치를 위해 조상제사를 동원하는 일에 가담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상명대학교 김경일 교수는 조상숭배 도덕은 ‘사람’을 위한 도덕이 아니라 ‘정치’를 위한 도덕, ‘남성’을 위한 도덕, ‘어른’을 위한 도덕, ‘기득권자’를 위한 도덕이라면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을 썼다가 혼쭐이 났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조상제사를 통해 죽은 부모에게 효도한다? 돌아가신 부모에게 효도한다면서 살아있는 형제끼리 친척끼리 조상제사 문제로 얼마나 싸우고 등을 돌리고 있습니까? 조상제사를 통해 죽은 부모의 혼령으로 오는 축복을 받는다? 축복보다는 제사를 드리다가 쓸데없는 허례허식으로 장손 집 재산 다 팔았습니다.
명색은 명절인데 음식 만드느라 며느리들, 명절이 아니라 고생절이 되었습니다. 이게 정말 부모가 바라는 것일까요? 여러분이 죽으면 자식들 고생고생하면서 만들어 주는 음식, 서로 간에 불평하고 지지고 볶고 싸우면서 드리는 조상제사를 받아먹으면서 기분이 좋겠어요?
여러분이 죽어 제삿밥 얻어 잡수려고 태국으로 유럽으로 제주도로 펜션으로 여행 떠나는 그 자식들 따라 가면서 실컷 내릴 축복이 있기나 한 것입니까?
죽은 조상들의 자손 축복! 이게 가능할까요? 조상제사를 시작하던 사람들은 알고 있겠지요! 이게 부질없는 일이에요! 차라리 아버님 어머님 돌아가신 기념일로 지키고 명절은 명절대로 제사 없이 지킨다면 가족은 훨씬 더 편하고 즐거운, 그야말로 명절이 될 것입니다.
공자님을 불러내 볼까요? 내세에 있는 지금도 정말 조상제사가 죽은 부모를 위하는 일이냐고… 공자는 죽은 사람의 일을 물었을 때 살아있는 세상 이치도 다 모르거늘 어찌 내세의 일을 알려느냐… 고 했습니다. 공자는 살아계신 부모에게 효도하는 길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죽은 부모혼령에까지 확대되고 수많은 병폐를 낳는 제사제도를 정착시키고 만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계신 부모님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효도하는 것!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성경도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합니다.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 사람은 돌로 쳐 죽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죽은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명령은 없습니다. 죽은 부모님은 감사의 대상, 기념의 대상이지 물질적 효의 대상, 경배 대상, 즉 종교 대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돌아가신 부모는 그런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육신이 땅 속에 묻혀있고 흙으로 돌아가 버린 부모가 음식을 먹겠어요? 무얼 잡수시겠어요? 조상제사 정성스레 잘한다고 축복을 내리겠어요, 조상제사하지 않는다고 재앙을 내리겠어요? 아무 것도 못합니다. 돌아가신 부모를 종교의 대상, 경배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일은, 미안하지만 헛수고-헛일입니다.
성경은 우상(偶像)을 헛것이라고 합니다. 헛것은 무가치한 것입니다. 헛것은 허깨비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음에도 그렇게 만들어 놓고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복의 대상으로 숭배했는데 헛것에게 빌었으니 헛것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열심히 조상숭배 하면서도 한(恨)이 많고 억울하고 슬픔이 많고… 감사가 없는 백성이 된 것입니다.
왜? 조상들이 한(恨)이 많았고 억울했고 탄식이 많다보니 그런 조상들과 조상제사를 통해 접속하니 우리도 밝은 에너지가 아니라 어둡고 억울한 에너지를 공급받으니 제사 드리고 기쁨보다는 싸우고 미워하고 섭섭하고… 그래서 오죽했으면 시댁(媤宅) 시(媤)자 들어가는 것은 다 싫다고 시금치도 안 먹고 시편도 안 읽으려고 합니까?
조상숭배가 왜 어두운 에너지에 접속됩니까? 그래서 불평하고 싸우고 분란을 일으키고 미워하고… 서로 등 돌리게 합니까? 우리 조상들이, 우리 부모들이 그런 분들이었나요? 우리 조상들은 착한 분들입니다.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내어주셨던 분입니다. 부모에게 잘 하는 것보다 형제들끼리 잘 지내라고… 그것이 부모에게 잘 하는 일이라고…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이 많이 필요하던 때도 오직 자식들 우선으로 챙기던 분들이 조상제사를 정성껏 드렸는데 왜 평화와 화목과 기쁨과 새 힘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까?
살아있을 때 기쁨이 되고 용기를 주던 그 분들이 이렇게 정성 다해 제사 드리는 데도 제사의 끝은 언제나 지치고 원망스럽고 불만으로 가득 차서 동서 간에 형제들 간에 고부간에 요즘에는 장모와 사위-장서 간에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까? 제삿밥이 부실해서 그런가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중국도라지 중국 콩나물 사용했다고 혼령이 화가 나신 걸까요?
아니에요! 우리 부모님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런 분이 아닙니다. 조상제사를 통해 부모에게 접속되고 그 음식 받으셨다면 제사 뒤끝이 이런 식으로 우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조상제사가 왜 이렇게 분란으로 끝나는 것입니까? 조상제사가 왜 이렇게 우울하고 숨이 막힙니까? 좋으신 부모의 영(靈)에 접속되지 못하고 유교의 영(靈)에 접촉되기 때문입니다. 유교의 영(靈)은 충효(忠孝)라는 미명하에 당파싸움, 지역차별, 남여간 성별갈등을 일삼습니다. 그들 영이 조상숭배 안에 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조상제사를 드릴 때 유교의 영들이 집안에 들어오고 조상제사 뒤끝은 항상 갈등의 연장이자 갈등의 또 다른 시작이 됩니다.
그렇다고 명절에 가서 너희들은 잘못된 영에 접속되었다! 갈등을 조장하지 마세요! 그들은 거듭나지 않았기에 말해서 안 됩니다. 우리만 잘하면 됩니다. 우리가 제대로 된 믿음생활로 삶을 통해 증거하면 그들도 소망의 이유를 묻게 됩니다. 이게 그들과의 차별화입니다. 선한 차별화로 증거되어야 합니다.
성경으로 들어갑시다. 죽은 이들과의 접속은 어제오늘이 아닙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새마음, 밝은 영을 주셨습니다(10:9). 하나님과 접속된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했고(9:21) 전쟁을 잘해서 승리의 기쁨을 백성들에게 가져다줍니다. 주변에서 이러쿵저러쿵 비난했지만 침묵합니다(10:27). 하나님과 접속했을 때 밝은 에너지~ 화합의 에너지~ 온유의 에너지가 흘러나와 모두가 기뻐했습니다(11:15).
그러던 사울이 다윗과 경쟁하면서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과의 접속을 끊고 백성들과 접속합니다. 백성들이 다윗에게 뭐라고 하는가? 백성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여론에 접속합니다. 나중에는 미워하면서 다윗에게 접속합니다. 그것도 사랑스럽고 고마운 다윗, 아들 요나단의 단짝, 우리 딸 미갈이 사랑하는 남편, 아들과 함께 하나님의 왕국을 세울 지도자 다윗에게 접속된 것이 아니라 미움의 대상, 시기의 대상 경계의 대상으로 접촉합니다. 그러니 다윗을 생각하면 미움의 에너지, 시기의 에너지, 살인의 에너지가 분출됩니다.
사울은 그 에너지를 이기지 못해 정서적으로 분열증에 이릅니다. 블레셋의 전투를 앞두고는 두려움을 견디지 못해 신분을 숨기고 죽은 사무엘과 접속시켜줄 접신녀(接神女)를 찾아갑니다. 자기가 땅에서 다 몰아내었던 무녀입니다. 왕인 줄 모르고 신접녀가 묻습니다.
11절 “…내가 누구를 네게로 불러올리랴”
사울이 짧게 대답합니다. 사무엘을 불러올리라!
여인이 주문을 외우다가 얼굴이 하얗게 되며 외칩니다.
12절, “…어찌하여 나를 속이셨나이까 당신이 사울이시니이다”
무당여인의 접신(接神)으로 13절, 죽은 사무엘의 영이 올라옵니다. 15절에는 사울 앞에 사무엘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성가시게 하느냐…”
대단한 접신녀지요? 진짜 사무엘 선지자일까요? 해석이 구구합니다. 실제로 사무엘의 혼이 임한 것을 무녀가 보았다… 아무것도 본 것이 없으나 왕 앞에서 본 척 술수를 썼다. 루터와 칼빈은 거짓 혼이 사무엘의 혼으로 행세하면서 나타난 유령을 보았다고 합니다. 루터와 칼빈의 견해라면 사탄의 거짓 영을 여인이 보았고, 15절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하는 것은 여인이 사무엘의 음성으로 말한 것입니다. 사무엘의 모습이 직접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일종의 빙의(憑依)라고 할까요? 진짜 사무엘이라면 하늘에서 내려오지 왜 땅에서 올라옵니까?
어떻든 사울은 접신녀를 통해 죽은 혼령, 거짓혼령에게 접속되었습니다. 죽은 혼령에게 14절, 엎드려 절합니다. 일종의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결과는? 20절입니다.
“사울이 갑자기 땅에 완전히 엎드러지니 이는 사무엘의 말로 말미암아 심히 두려워함이요 또 그의 기력이 다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루 밤낮을 음식을 먹지 못하였음이니라”
21절, “… 그가 심히 고통당함을 보고…”
하나님과 접속했다면 사울은 평안을 얻었을 것입니다. 용기를 얻고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다윗과 화해하고 힘을 합쳐 블레셋 군대를 물리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과 접속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의 에너지와 접속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충만했을 때는 숙청했던 신접녀와 접속했고 죽은 혼령 거짓 사무엘과 접속했습니다. 악한 영은 그의 에너지를 빼앗아 버렸습니다. 죽은 혼령에게 접속되자 기진맥진 엎드려 졌습니다. 죽은 혼령에게 접속하자 두려움으로 떨었습니다. 고통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며칠 후, 그렇게도 두려움에 떨었던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자기만 죽은 것이 아니라 요나단을 비롯한 세 아들이 모두 전사하는 비운의 왕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과의 접촉에서 코드 선을 빼버리고 무당들에게 접속했던 사람, 하나님의 에너지로 넘쳐나던 다윗에게서 코드를 빼버리고 죽은 거짓 사무엘과 접속했던 사람의 비참한 말로(末路)입니다.
<결론>
이제 우리도 선택 할 때가 된 것입니다. 조상제사를 통해 죽은 혼령들에게 접속할 것입니까? 살아계신 생령(生靈)의 하나님에게 코드 선을 연결하겠습니까?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과 접속하며 살 것입니까? 생명력이 넘치는 다윗 같은 사람들과 접촉하며 살 것입니까? 죽은 조상이라는 과거와 접속하며 살 것입니까, 하나님과 미래에 접속하며 살 것입니까? 오늘의 선택이 내일 내가! 내 자식이! 우리 가문이 누구인지를 보여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접속은 정말 중요합니다.
오늘 추석! 조상숭배를 하는 종교가 아니라 예수 혈통 가족들이 기쁨으로 서로 접속하고 밝은 에너지, 행복의 에너지를 공급받고 돌아오는 명절(名節)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8:8~14
<서론>
오늘 추석명절입니다. 명절은 즐겁고 행복한 날… 오래전까지는 그래왔습니다. 그래서 추석은 먹을거리가 풍성한 계절에 송편도 빚고 행복도 푸짐했습니다. 휘영청 밝은 대보름 달빛 아래 강강수월래 춤을 추고 가마싸움 소싸움 씨름하면서 우정을 다졌습니다.
얼마나 좋은 날입니까? ‘하늘’이 베풀어주신 은덕에 감사하고 곡식을 수확하는데 도움을 준 이웃끼리 감사하며 애썼다고 격려하는 명절이 언제부터 종일 고생하고 분란이 일어나 사이가 더 멀어지는 고생절이 되어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 조상들이 언제부터 명절이라는 코드를 잘못된 조상제사라는 잘못된 콘센트에 꼽아버렸기 때문입니다. 밝은 에너지에 꽂으면 밝은 에너지를 공급받고 어두운 에너지에 꽂으면 어두운 에너지를 받습니다. 추석을 명절에 꽂아야 즐거운 명절 되는데 고생절에 꽂으니까 실컷 고생만 하는 고난절(?)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원래 우리 조상들은 ‘하늘’을 섬기는 부족입니다. 씨앗을 뿌릴 때 하늘에 제사 드렸고 끝나면 비와 햇볕을 주신 하늘에 감사제(祭)를 올렸습니다. 특별하게 조상제사는 없었습니다. 조상제사는 중국 공자 이전에 하(下)나라와 상(上)나라 때 시작되고 주나라(주전 1100년) 때 성행했습니다. 처음부터 죽은 조상에게 드린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종손(宗孫)을 높이는 뜻으로 높은 곳(上座)에 앉혀놓고 제사형식의 예(禮)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중국황실의 정치목적으로 이용됩니다. 중국황실이 자기네 혈통은 하늘에서 내린 것이기에 누구도 반역이나 정권 찬탈의 엄두를 내지 못하게 황실제사를 거창하게 드리도록 한 것입니다. 하늘과 황실가문을 동일시한 고도의 통치철학입니다.
처음에는 황실 조상에게만 제사 드렸는데 권세 깨나 있는 신하들이 가만 보니 괜찮거든요. 그래야 뼈대 있는 집안이고 조상들 은덕이 자손만대로 이어질 것 같아요. 그래도 대놓고 그러면 무엄하다 하기에 살짝 명분을 바꿨어요! 황실은 제사를 잘 드려 좋은 왕이 계속 태어나고 신하들은 제사를 잘 드려야 좋은 신하가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조상들에게도 제사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뻔히 알면서 서로 이용한 것입니다.
이게 점차 평민들도 신분을 높이는 수단으로 제사를 이용합니다. 평민들이 보니 제사제도가 괜찮아요. 우리는 왜 못하랴. 우리 조상은 조상이 아닌가? 권세 있는 조상들은 죽어서도 좋은 것 먹는데 우리 조상들은 굶기랴! 그래서 춘추전국시대에 조상제사는 일반화되고 효(孝)의 개념이 아니라 가문의 축복을 얻어내는 경배의 대상, 종교가 된 것입니다. 조상제사의 종교적 기반을 유교가 제공한 것입니다.
우리민족의 조상숭배는 고려이전에는 없었습니다. 고려말엽(1392년) 중국 주자학이 들어올 때 제사의식도 들어왔습니다. 이씨조선이 개국하면서 유교가 국교가 되고 조상제사는 일반화됩니다. 결국 뭐지요? 제사는 조상숭배와는 관계가 없다는 거예요! 박태선 문선명이 종교를 수단으로 자기자식들 호의호식하는 재벌이 되고 김일성이 김씨(金氏)왕국을 위해 공산주의를 이용하고, 중동국가들이 정치를 위해 이슬람교를 수단화한 것처럼 조상제사가 정치가들에, 권력 기득권에 이용당한 것입니다. 죽은 우리 조상들과는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지금 조상숭배는 어때요? 제사 드리는 분들의 사정은 이런 마음입니다.
-기념의 개념. 우리 집안의 전통을 생각하고 집안 정신을 후손들에게 길이길이 이어가도록 조상제사를 매개체로 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념일로 집안의 뼈대를 세워나가는 것이지요!
-효(孝)의 개념. 살아서도 효도했지만 돌아가신 후에도 효도하겠다는 선한 마음입니다. 아니면 살아생전에는 제대로 효도하지 못했습니다. 깨달음이 늦어서… 사는 것이 힘들어서… 돌아가신 후에라도 정성을 다하려고 번잡스럽지만 제사를 드립니다.
-축복의 개념. 조상을 내세에서 복과 재앙에 간섭할 수 있는 혼령이라고 봅니다. 제사를 통해 조상에게 정성을 다하면 선한 조상으로 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유교의 개념. 유교는 공자의 가르침에서 시작된 사상이지 종교는 아닙니다. 도덕 사상. 인(仁) 사상을 바탕으로 나라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중시하는 사상입니다. 효도는 생존 부모를 위한 것인데 죽은 부모에까지 드리는 조상제사를 통해서 백성들을 옭아매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유교도 정치를 위해 조상제사를 동원하는 일에 가담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상명대학교 김경일 교수는 조상숭배 도덕은 ‘사람’을 위한 도덕이 아니라 ‘정치’를 위한 도덕, ‘남성’을 위한 도덕, ‘어른’을 위한 도덕, ‘기득권자’를 위한 도덕이라면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을 썼다가 혼쭐이 났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조상제사를 통해 죽은 부모에게 효도한다? 돌아가신 부모에게 효도한다면서 살아있는 형제끼리 친척끼리 조상제사 문제로 얼마나 싸우고 등을 돌리고 있습니까? 조상제사를 통해 죽은 부모의 혼령으로 오는 축복을 받는다? 축복보다는 제사를 드리다가 쓸데없는 허례허식으로 장손 집 재산 다 팔았습니다.
명색은 명절인데 음식 만드느라 며느리들, 명절이 아니라 고생절이 되었습니다. 이게 정말 부모가 바라는 것일까요? 여러분이 죽으면 자식들 고생고생하면서 만들어 주는 음식, 서로 간에 불평하고 지지고 볶고 싸우면서 드리는 조상제사를 받아먹으면서 기분이 좋겠어요?
여러분이 죽어 제삿밥 얻어 잡수려고 태국으로 유럽으로 제주도로 펜션으로 여행 떠나는 그 자식들 따라 가면서 실컷 내릴 축복이 있기나 한 것입니까?
죽은 조상들의 자손 축복! 이게 가능할까요? 조상제사를 시작하던 사람들은 알고 있겠지요! 이게 부질없는 일이에요! 차라리 아버님 어머님 돌아가신 기념일로 지키고 명절은 명절대로 제사 없이 지킨다면 가족은 훨씬 더 편하고 즐거운, 그야말로 명절이 될 것입니다.
공자님을 불러내 볼까요? 내세에 있는 지금도 정말 조상제사가 죽은 부모를 위하는 일이냐고… 공자는 죽은 사람의 일을 물었을 때 살아있는 세상 이치도 다 모르거늘 어찌 내세의 일을 알려느냐… 고 했습니다. 공자는 살아계신 부모에게 효도하는 길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죽은 부모혼령에까지 확대되고 수많은 병폐를 낳는 제사제도를 정착시키고 만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계신 부모님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효도하는 것!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성경도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합니다.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 사람은 돌로 쳐 죽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죽은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명령은 없습니다. 죽은 부모님은 감사의 대상, 기념의 대상이지 물질적 효의 대상, 경배 대상, 즉 종교 대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돌아가신 부모는 그런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육신이 땅 속에 묻혀있고 흙으로 돌아가 버린 부모가 음식을 먹겠어요? 무얼 잡수시겠어요? 조상제사 정성스레 잘한다고 축복을 내리겠어요, 조상제사하지 않는다고 재앙을 내리겠어요? 아무 것도 못합니다. 돌아가신 부모를 종교의 대상, 경배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일은, 미안하지만 헛수고-헛일입니다.
성경은 우상(偶像)을 헛것이라고 합니다. 헛것은 무가치한 것입니다. 헛것은 허깨비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음에도 그렇게 만들어 놓고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복의 대상으로 숭배했는데 헛것에게 빌었으니 헛것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열심히 조상숭배 하면서도 한(恨)이 많고 억울하고 슬픔이 많고… 감사가 없는 백성이 된 것입니다.
왜? 조상들이 한(恨)이 많았고 억울했고 탄식이 많다보니 그런 조상들과 조상제사를 통해 접속하니 우리도 밝은 에너지가 아니라 어둡고 억울한 에너지를 공급받으니 제사 드리고 기쁨보다는 싸우고 미워하고 섭섭하고… 그래서 오죽했으면 시댁(媤宅) 시(媤)자 들어가는 것은 다 싫다고 시금치도 안 먹고 시편도 안 읽으려고 합니까?
조상숭배가 왜 어두운 에너지에 접속됩니까? 그래서 불평하고 싸우고 분란을 일으키고 미워하고… 서로 등 돌리게 합니까? 우리 조상들이, 우리 부모들이 그런 분들이었나요? 우리 조상들은 착한 분들입니다.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내어주셨던 분입니다. 부모에게 잘 하는 것보다 형제들끼리 잘 지내라고… 그것이 부모에게 잘 하는 일이라고…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이 많이 필요하던 때도 오직 자식들 우선으로 챙기던 분들이 조상제사를 정성껏 드렸는데 왜 평화와 화목과 기쁨과 새 힘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까?
살아있을 때 기쁨이 되고 용기를 주던 그 분들이 이렇게 정성 다해 제사 드리는 데도 제사의 끝은 언제나 지치고 원망스럽고 불만으로 가득 차서 동서 간에 형제들 간에 고부간에 요즘에는 장모와 사위-장서 간에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까? 제삿밥이 부실해서 그런가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중국도라지 중국 콩나물 사용했다고 혼령이 화가 나신 걸까요?
아니에요! 우리 부모님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런 분이 아닙니다. 조상제사를 통해 부모에게 접속되고 그 음식 받으셨다면 제사 뒤끝이 이런 식으로 우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조상제사가 왜 이렇게 분란으로 끝나는 것입니까? 조상제사가 왜 이렇게 우울하고 숨이 막힙니까? 좋으신 부모의 영(靈)에 접속되지 못하고 유교의 영(靈)에 접촉되기 때문입니다. 유교의 영(靈)은 충효(忠孝)라는 미명하에 당파싸움, 지역차별, 남여간 성별갈등을 일삼습니다. 그들 영이 조상숭배 안에 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조상제사를 드릴 때 유교의 영들이 집안에 들어오고 조상제사 뒤끝은 항상 갈등의 연장이자 갈등의 또 다른 시작이 됩니다.
그렇다고 명절에 가서 너희들은 잘못된 영에 접속되었다! 갈등을 조장하지 마세요! 그들은 거듭나지 않았기에 말해서 안 됩니다. 우리만 잘하면 됩니다. 우리가 제대로 된 믿음생활로 삶을 통해 증거하면 그들도 소망의 이유를 묻게 됩니다. 이게 그들과의 차별화입니다. 선한 차별화로 증거되어야 합니다.
성경으로 들어갑시다. 죽은 이들과의 접속은 어제오늘이 아닙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새마음, 밝은 영을 주셨습니다(10:9). 하나님과 접속된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했고(9:21) 전쟁을 잘해서 승리의 기쁨을 백성들에게 가져다줍니다. 주변에서 이러쿵저러쿵 비난했지만 침묵합니다(10:27). 하나님과 접속했을 때 밝은 에너지~ 화합의 에너지~ 온유의 에너지가 흘러나와 모두가 기뻐했습니다(11:15).
그러던 사울이 다윗과 경쟁하면서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과의 접속을 끊고 백성들과 접속합니다. 백성들이 다윗에게 뭐라고 하는가? 백성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여론에 접속합니다. 나중에는 미워하면서 다윗에게 접속합니다. 그것도 사랑스럽고 고마운 다윗, 아들 요나단의 단짝, 우리 딸 미갈이 사랑하는 남편, 아들과 함께 하나님의 왕국을 세울 지도자 다윗에게 접속된 것이 아니라 미움의 대상, 시기의 대상 경계의 대상으로 접촉합니다. 그러니 다윗을 생각하면 미움의 에너지, 시기의 에너지, 살인의 에너지가 분출됩니다.
사울은 그 에너지를 이기지 못해 정서적으로 분열증에 이릅니다. 블레셋의 전투를 앞두고는 두려움을 견디지 못해 신분을 숨기고 죽은 사무엘과 접속시켜줄 접신녀(接神女)를 찾아갑니다. 자기가 땅에서 다 몰아내었던 무녀입니다. 왕인 줄 모르고 신접녀가 묻습니다.
11절 “…내가 누구를 네게로 불러올리랴”
사울이 짧게 대답합니다. 사무엘을 불러올리라!
여인이 주문을 외우다가 얼굴이 하얗게 되며 외칩니다.
12절, “…어찌하여 나를 속이셨나이까 당신이 사울이시니이다”
무당여인의 접신(接神)으로 13절, 죽은 사무엘의 영이 올라옵니다. 15절에는 사울 앞에 사무엘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성가시게 하느냐…”
대단한 접신녀지요? 진짜 사무엘 선지자일까요? 해석이 구구합니다. 실제로 사무엘의 혼이 임한 것을 무녀가 보았다… 아무것도 본 것이 없으나 왕 앞에서 본 척 술수를 썼다. 루터와 칼빈은 거짓 혼이 사무엘의 혼으로 행세하면서 나타난 유령을 보았다고 합니다. 루터와 칼빈의 견해라면 사탄의 거짓 영을 여인이 보았고, 15절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하는 것은 여인이 사무엘의 음성으로 말한 것입니다. 사무엘의 모습이 직접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일종의 빙의(憑依)라고 할까요? 진짜 사무엘이라면 하늘에서 내려오지 왜 땅에서 올라옵니까?
어떻든 사울은 접신녀를 통해 죽은 혼령, 거짓혼령에게 접속되었습니다. 죽은 혼령에게 14절, 엎드려 절합니다. 일종의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결과는? 20절입니다.
“사울이 갑자기 땅에 완전히 엎드러지니 이는 사무엘의 말로 말미암아 심히 두려워함이요 또 그의 기력이 다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루 밤낮을 음식을 먹지 못하였음이니라”
21절, “… 그가 심히 고통당함을 보고…”
하나님과 접속했다면 사울은 평안을 얻었을 것입니다. 용기를 얻고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다윗과 화해하고 힘을 합쳐 블레셋 군대를 물리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과 접속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의 에너지와 접속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충만했을 때는 숙청했던 신접녀와 접속했고 죽은 혼령 거짓 사무엘과 접속했습니다. 악한 영은 그의 에너지를 빼앗아 버렸습니다. 죽은 혼령에게 접속되자 기진맥진 엎드려 졌습니다. 죽은 혼령에게 접속하자 두려움으로 떨었습니다. 고통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며칠 후, 그렇게도 두려움에 떨었던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자기만 죽은 것이 아니라 요나단을 비롯한 세 아들이 모두 전사하는 비운의 왕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과의 접촉에서 코드 선을 빼버리고 무당들에게 접속했던 사람, 하나님의 에너지로 넘쳐나던 다윗에게서 코드를 빼버리고 죽은 거짓 사무엘과 접속했던 사람의 비참한 말로(末路)입니다.
<결론>
이제 우리도 선택 할 때가 된 것입니다. 조상제사를 통해 죽은 혼령들에게 접속할 것입니까? 살아계신 생령(生靈)의 하나님에게 코드 선을 연결하겠습니까?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과 접속하며 살 것입니까? 생명력이 넘치는 다윗 같은 사람들과 접촉하며 살 것입니까? 죽은 조상이라는 과거와 접속하며 살 것입니까, 하나님과 미래에 접속하며 살 것입니까? 오늘의 선택이 내일 내가! 내 자식이! 우리 가문이 누구인지를 보여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접속은 정말 중요합니다.
오늘 추석! 조상숭배를 하는 종교가 아니라 예수 혈통 가족들이 기쁨으로 서로 접속하고 밝은 에너지, 행복의 에너지를 공급받고 돌아오는 명절(名節)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