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쓰실 때
여호수아 1장 1~6절
<서론>
제가 요셉의 성공스토리를 설교로 하고 단행본으로 내면서 제목을 ‘신수성가’라 했습니다. 창세기 49:24, “요셉의 활은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에 근거한 것입니다. 자수성가가 내 힘으로 나를 들어 성공시킨다면 신수성가는 하나님의 손에 들려 내가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나 들어 쓰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들어 쓰려면 가벼워야 됩니다. 뚱뚱하면 못 들어 씁니다. 살을 빼야합니다. 교만, 게으름, 자아, 자기 의(義), 자기자랑… 이런 데서 살을 빼고 자아를 가볍게 해야 하나님의 손에 들려 하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성경인물들 똑똑하고 잘 나서 쓰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평범했고, 위인들 기준에 못 미칩니다. 베드로. 갈릴리 수산고등학교는커녕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온 무학(無學)입니다. 기도하라니까 잠잤고 칼을 사라니까 진짜 칼을 사서 휘두릅니다. 도무지 센스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3년을 다듬고 가볍게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오순절 성령이 임하니 3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강력하게 사용된 것입니다.
본문은 여호수아가 쓰임 받을 때의 상황입니다. 여호수아는 광야 40년 모세의 부목사(?)로 사역했습니다. 모세가 죽으면서 지휘권을 계승합니다. “모세가 죽은 후에”(1절) 이미 여호수아는 모세의 부관으로서 충분히 지도자 수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죽은 후에… 참 막막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좋은 팔로워들은 아닙니다. 쉽게 불평하고 원망하고 은혜를 잊어버리고… 모세처럼 대단한 사람도 거절당하고 반역을 당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어찌 2백만 명의 지도자가… 누구나 이런 상황에서는 약해지고 불안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모세 뒤를 이어 훌륭하게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넜으며 동료 정탐꾼들이 거인이라며 입성하기를 두려워했던 가나안 원주민을 내쫓고 정복했습니다. 원래 참모풍인데 대단한 일을 해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니 가능하더라, 이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들어 쓰실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요?
1. 하나님께서 사람을 쓰시기 전에 메시지를 주십니다.
1절,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사용하기 전에 말씀을 주십니다. 전에는 모세와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와는 친구처럼 대면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그 광경을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군대를 이끌고 전투도 했지만 백성들 지도자는 아닙니다. 그러니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모세에게 주시는 말씀을 구경하면서 힘을 냈을 뿐입니다.
니체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자기 길을 걸어가는 사람과 남이 가는 길을 구경하며 걸어가는 사람이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까? 남들이 하나님 믿는 것을 구경하는 사람입니까? 예배드리며 은혜를 받는 사람입니까? 남들이 은혜 받는 것을 구경하는 사람입니까? 내 간증이 있나요? 남의 간증에 은혜나 받으며 갑니까?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모세와 대면하여 친구처럼 말하는 것을 보며 살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하나님과 직접 대화합니다.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까지는 모세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살았습니다. 가나안 정탐하라면 정탐했고 아멜렉과 싸우라면 군사를 이끌고 나갔습니다. 말씀은 항상 모세를 경유했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모세로 전달된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내게 주시는 말씀을 받습니다. 내가 말씀의 전달자가 되고 명령자가 됩니다. 그러니 말씀에 사로잡히고 능력의 지휘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용하시기 전에 말씀을 주십니다. 여호수아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처럼 내게도 말씀을 주십니다. 내 말씀으로 사는가? 남의 말씀으로 사는가? 받은 말씀으로 사는가, 엿들은 말씀으로 사는가? 이 차이가 나를 일꾼이 되고 구경꾼이 되게 합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결핵 3기, 죽음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외국생활에서 결핵이 발생했고 학업을 중단하고 요양원에서 죽음을 기다렸습니다. 그때 주신 말씀이 데살로니가전서 5:16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그는 기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감사했고 행복했고 웃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느새 병이 나았습니다. 98세까지 살았습니다. 말씀이 그를 살렸고 말씀이 그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말씀에 붙잡히니 병도 낫더라는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님도 결핵환자로 죽음 직전까지 갔습니다. 서대문예배당에 가마니 깔아놓고 각혈을 했습니다. 하루는 성경을 읽다 요한3서 2절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기를 원하노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영혼이 잘 되면… 믿음으로 살면 모든 일이 잘 되고 육신도 강해진다는 말씀에 아멘~ 했습니다. 지금은 기독교 2천년 역사에 가장 큰 교회를 세웠고 장수무대로 원로목사로 있지만 건강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빈민운동가 김진홍 목사님은 감옥에서 시편 57:8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는 말씀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빈민들에게 밀가루 갖다 주면서 가난을 이기도록 도왔습니다. 데모하다 감옥에 들어가 묵상하는데 말씀을 받은 것입니다. 허구한 날 어둠과 싸우면서 어둠이 되지 말고 네가 일어나 빛을 발하면 어둠은 저절로 물러간다는 진리의 말씀에 먹을 것이나 갖다 주는 빈민운동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주어야 제대로 자립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씀강해의 목회자로 돌아왔고 한국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더 큰 목사가 된 것입니다.
가나안농군학교 김용기 장로는 “너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는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그는 민족이 사는 길은 자기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복민운동을 펼쳤습니다. 복민운동은 복을 짓는 운동입니다. 밥을 지어야 밥을 먹는 것처럼 복도 지어야지 복만 달라고 손 내밀면 거지근성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는 근검절약하면서 하나님의 복된 성민이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박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을 펼칠 때 멘토 같은 분이 되었습니다. 말씀이 그를 세운 것입니다.
저는 사사기 6:12을 받았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큰 용사여… 기드온은 큰 용사가 아니라 좀생이였습니다. 밀을 포도주 틀에서 수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를 큰 용사라! 불렀습니다. 처음에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조롱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15절)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너는 큰 용사다! 내가 너와 함께 하니까! 이 말씀은 소형 어선에 비행기엔진을 달아준다는 것입니다. 통통 어선에 비행기 엔진을 달면 바다 위를 납니다. 배가 납니까? 엔진이 날게 합니다. 그 말씀에 기드온은 아멘! 했습니다.
저도 그 말씀을 내 것으로 받았습니다. 처음에 받은 사람은 기드온이었지만 나도 그 말씀을 받아버렸습니다. 남에게 주신 말씀을 읽은 내가 내 것으로 아멘! 하고 받아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나도 큰 용사가 된다! 이 말씀이 오늘의 나를 있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책 중의 하나로 생각하지 마세요! 설교 들을 때 강연처럼 듣지 마세요! 지금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세요! 모세가 받았어도 내 것으로 아멘! 하세요! 여호수아에게 주셔도 아멘! 네 것으로 받아버리세요! 그러면 말씀의 운동력이 내게 일어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말씀을 아멘! 하고 붙들면 붙든 말씀이 기도가 되고 찬송이 되고 체험이 되고 내 간증을 만들어 낼 줄 믿습니다.
2. 하나님께서 쓰실 때는 건너가게 하십니다(2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소포타미아 유프라테스 강 건너 쪽에서 살던 유목민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고 강을 건너왔습니다. 강은 하나님의 언약과 축복 안에 들어서는 경계선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강을 건너온 사람들이라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강을 건너온 그들은 대강 살 수가 없었습니다. 강을 건너온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지가 컸습니다. 하나님의 원대한 목적 가운데 자신들을 놓았기에 자존감이 높았습니다.
지금도 그래요! 2절,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일어나 요단을 건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가나안은 언약의 땅이고 축복의 땅입니다. 그 땅을 얻으려면 강을 건너야 합니다. 강을 건너는 모험이 싫으면 축복도 없는 것입니다.
세계역사를 보면 강을 건넌 사람들이 성공합니다. 대서양을 건너간 청교도들이 초강대국 미국을 세웠습니다. 동남아 경제권은 화교(華僑)가 잡고 있습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서열 우대정책을 쓰던 중국에서 차별 당하던 상인(商人)들이 강을 건너 동남아로 흩어졌고 세계 화교권은 형성되었습니다. 화교는 유대인들과 대등하게 세계 상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부산국제시장, 자유시장, 남대문시장도 고향과 친척들을 버리고 월남한 사람들이 상권을 잡고 있습니다. 강을 건너고 38선 넘고 배를 타고 북에서 남으로 바다를 지나온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강(江)은 고난이고 아픔이고 질병으로 사선(死線)을 넘었던 사람들입니다. 사선을 넘고 나니 겁이 없어졌고 담대해 집니다. 누가 성공할까요? 건너오는 경험이나 고난의 한 지점 통과자들이 성공합니다. 병에 걸리던지, 파산의 경험이 있던지, 감옥에 가든지, 한 시대의 사선(死線)을 넘은 사람들이 성공률이 높습니다. 그런 경험자들이 믿어도 잘 믿습니다.
아브라함은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고 야곱은 얍복 강을 건너고 모세는 자기백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고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그들이 강을 건너지 않았다면, 죽음의 사선을 넘지 않았다면 씨족, 부족, 노예수준의 유목민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인도로 강을 건넜을 때 대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라는 기득권을 포기하고 강을 건너 강을 건너온 이브리-히브리인이 될 때 복의 유통센터를 만들게 됩니다. 저는 제주 앞바다를 건너와 성공한 것입니다. 제주바다가 무서워 주저앉았다면 오늘의 저도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수지맞은 사람이 우리 두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강을 건너라 합니다. 강은 역경이고 장애물이고 사선입니다. 강을 건너다 물에 빠져 죽고 떠내려가기도 합니다. 때는 수확 철이기에 요단에 물이 흘러넘칩니다(3:15). 강을 건넌다는 것은 생사(生死)를 맡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 앞에서 철저한 순종이고 자기해체입니다. 이런 요구에 여호수아가 아멘! 하고 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 크게 들어 쓰시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에게도 강을 건너라 하십니다. 내 앞의 시련을 건너야 합니다. 어떤 역경도 극복해야 하나님께서 쓰십니다. 눈앞의 강, 돌아서려 하지 말고 힘들고 두렵고 무서워도 건너야 합니다. 세상과 하나님이라는 중간지점의 강을 제대로 건너야 하나님께서 들어 사용하십니다. 호박에 검은 줄을 그어 수박이라 우기듯이 겉에만 살짝 색칠하고 교회 다니면 종교인은 되도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는 능력 있는 믿음의 사람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내게 당하는 고난과 아픔을 강을 건너는 기회로 삼기를 바랍니다. 강을 건넘으로 더 많은 능력을 받고 축복을 소망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께서 쓰실 때는 발바닥의 축복을 주십니다(3절)
고대 근동의 왕들은 왕좌 아래에 발판이 있고 발판에 주변 국가들의 이름과 지역을 그린 지도가 있습니다. 왕들은 항상 지도의 국가들을 발로 밟으면서 승리하는 상상력을 갖고 정복욕을 불태우는 것입니다. 다윗의 경우도 그랬을 것입니다. 발바닥 밑에 애굽, 아람, 모압… 등등의 국가명과 지도를 그리고 발로 밟으면서 제국화의 꿈을 키웠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도 꿈을 주십니다. 3절,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모세가 밟았던 땅은 승리의 땅입니다. 성공하는 땅이 되었습니다. 여호수아에게도 같은 능력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밟으라. 크게 밟으라. 다 네게 주겠다! 밟은 것을 얻을 수 있도록 모세에게 주었던 능력도 네게 주겠다! 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밟으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갈렙과는 달리 관리형입니다. 그러니 저돌적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계산을 먼저 하고 셈법을 동원합니다. 그런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는 강하고 담대하라고 합니다. 5절, 내가 함께 해주마! 9절,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니 밟으라! 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여호수아는 팍팍 밟았습니다. 요단강에 물이 철철 넘칠 때도 여호수아는 밟았습니다. 여리고성 앞에서도 침묵 가운데 밟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밟았습니다. 그랬더니 요단강의 물은 멈추었고 여리고성은 7일 만에 무너졌습니다.
가나안 땅에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 평도 넘겨줄 수 없다고 벼루고 있습니다. 모세가 떠나갔지만 여호수아는 밟으라! 밟는 곳을 네게 주겠다! 는 말씀을 의지해서 가나안 땅을 밟았고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땅을 밟는다! 땅을 밟아라! 이 말씀을 적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업장을 놓고 누구나 그 땅을 밟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내 땅이 되는 것입니까? 서울대학교 땅을 믿음으로 밟으면 내 땅이 되는 것입니까? 이 말씀은 어떤 목표를 세우고 그 땅을 밟기 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란 말씀이 내 안에서 확신과 용기와 평안을 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땅을 밟으려고 기도하고 말씀을 붙들고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 땅을 달라고, 그 사업장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믿고 수지맞은 사람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본 MK택시 유태식 부회장(장로) 유봉식 회장 형제. 형 유봉식 씨는 남해 사람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6세에 일본으로 넘어갑니다. 그는 네가 밟는 땅을 주리라! 는 말씀에 아멘! 했습니다. 고생 끝에 택시를 하면 돈을 번다는 말에 1960년 10대의 택시로 미나미택시회사를 설립합니다. 그 후 30대의 택시를 보유한 가츠라택시회사를 인수해서 합병하고 앞 글자를 딴 MK택시회사를 설립합니다. 지금은 2천대. 주유소만도 수십 개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기적을 일으켰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오히려 너무 평범해서 남보다 두 배는 더 치열하게 고민하며 열심히 살지 않으면 안 되었지요. 나는 끊임없이 생각하며 일했고 좋은 생각이 들면 망설이지 않고 시도해 왔을 뿐입니다.”
망설이지 않고 시도할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한국과 일본의 태평양을 건널 때의 결심과 용기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일본 땅을 밟았습니다. 네가 밟는 땅을 네게 주리라! 그 말씀에 아멘! 하고 지금은 세계 부자 중의 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면 우리도 밟아야 합니다! 말씀 붙잡고 밟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면서 밟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내가 원하는 그 땅들이, 그 목표가 내 것이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