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이 있을지어다
요한복음 20:19~23
<서론>
한 미국인이 이혼 직전의 아내와 예루살렘 성지순례 갔다가 돌연 아내가 죽었습니다. 시신을 미국으로 운구하면 5천 달러, 성지(聖地)에 매장하면 150달러… 남자가 잠깐 생각하다 미국행을 택하겠다고 합니다. 장의사가 “아니, 매장하면 여기는 성지이고, 150달러 밖에 안 드는데 왜 거금 5천 달러를 들여 굳이 운구하려 합니까?” 남편 왈, “오래전에 한 남자가 여기 묻혔다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데 내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까 불안해서요.” 대답했다나?
2천 년 전에, 죽었던 그 ‘한 남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첫 말씀은 무엇일까요? 19절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1절, “평강이 있을지어다!” 부활의 첫 선언은 평강입니다.
헬라어 평강(平康)은 히브리어로 '샬롬'입니다. 유대인에게 샬롬은 사회 안녕을 뜻하는 평화 샬롬, 마음의 고요함을 뜻하는 평강 샬롬, 공평한 세상에서 얻는 정의 샬롬, 질서가 있는 곳의 샬롬, 조화로운 삶의 샬롬입니다, 이런 세상이 유대인이 바라는 평화 유토피아입니다.
히브리인들은 민족 태동기부터 평화를 갈망했습니다. 그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온 이주민입니다. 가나안에는 원주민들이 기득권을 주장하고 쉴 새 없이 공격해 옵니다. 동서양의 교차로이기에 강대국들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됩니다. 그러니 마음 놓고 살 수가 없습니다. 근심과 염려, 두려움… 그래서 수도를 예루살렘이라고 명했습니다. 샬롬, 평화의 성읍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참 평화를 주지 못했습니다. 이방군대가 공격하고 약탈했습니다. 성전은 탐욕으로 가득 찼습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성이 아닙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도 평화의 도성이 선지자들을 죽이고 파송된 자를 돌로 친다(눅 13:34) 탄식했겠어요?
이런 때 예수님께서 부활해서 평강이 있을지어다! 첫 인사를 합니다. 안녕? 인사말 같지만 그게 아닙니다. 예루살렘이 만들어 주지 못했던 참 평화를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준다! 그 평강을 받아들이라! 새로운 정의, 조화, 평강, 새로운 질서에 대한 평화의 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평화는 어떤 평강일까요?
1. 회개로 오는 평안
3년 전, 공생애에 나선 예수님의 첫 선언은 “회개하라!”입니다(마 4:17).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부활하고 하신 첫 말씀과 같은 연상선입니다. 누가 평강을 얻을 수 있을까요? 회개하는 사람들입니다. 회개는 뉘우침과 돌아선다는 의미입니다. 행동의 잘못을 뉘우치고 범죄한 행위를 회개하고… 이런 것은 지엽적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과 다른 생각을 가져왔음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것입니다. 천국은 율법으로 간다 생각했던 것, 성(城)을 쌓고 왕의 통치나 인간제도로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생각에서 돌이키고 하나님의 생각으로 마음을 바꿔 하나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는 것이 진정한 평화, 평강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죽으셨어요? 바울이 말합니다. 예수는 우리 죄를 위해 내어주심이 되고…(롬 4:25)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내 죄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못했다면 예수님도 죄인입니다. 죽음을 이기지 못했으니 우리 죄도 죄 안에 갇혀 그냥 있는 것입니다. 이런 죄된 인생은 아무리 좋은 것으로 치장하고 명예를 얻고 모든 것을 다 소유했어도 진정한 평강이 없습니다. 죄의 탐욕은 끝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라, 는 말씀은 내가 죄와 함께 죽고 죄는 땅속에 옷처럼 벗어놓고 살아났으니 이제는 너희들에게 죄가 없다, 죄가 없으니 더 이상 죄의 문제에 시달리지 말고 내 안에서 평강하라는 것입니다. 죄의 특징은 불안입니다. 그래서 법적 처벌기간이 끝났는데도 자수합니다. 죄가 마음의 평강을 누리지 못하도록 막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에게도 죄의 문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스승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기 직전 제자그룹은 무너졌습니다. 유다는 배신으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부인함으로, 요한은 겉옷까지 벗어던지고 줄행랑을 쳤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니 이제 남은 것은 죄에 대한 책망이고 형벌입니다, 그래서 내 죄로 떨고 있는데 평강을 말씀하시니 얼마나 고맙겠어요?
미국에 사형제도가 생긴 이래 사형여죄수 1호는 벨파 마필드입니다. 어머니와 약혼자… 네 명을 죽인 살인자입니다. 청교도국가에서 네 명을 죽였으니 하나님도 용서해주지 못할 큰 죄인입니다. 모두 외면했습니다. 오직 한 사람 다정했던 친구 앤 드래함 렛츠는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고 전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평안을 찾았으나 사형날짜가 가까워지면서 불안했습니다. 이렇게 무서운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실까? 의심이 든 것입니다. 앤은 구원을 확신하도록 이런 말로 설득했습니다.
“어릴 때 놀던 바닷가 갯벌을 생각해봐! 게들이 사는 크고 작은 구멍들, 우리가 모래성을 쌓으면서 파놓은 구덩이, 포클레인이 모래를 퍼낸 큰 웅덩이도 있었잖니? 밀물시간에 바닷물이 들어오면 구멍들은 크던 작든 물속에 잠겨서 모두 덮여졌지 않았니? 하나님의 은혜는 크든 작든 모든 죄를 가리지 않고 덮는단다.”
그 말에 벨파 마필드는 내 죄의 산보다 하나님의 은혜의 태산은 더 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회개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죄사함의 평화를 간직한 채 떠났다고 합니다.
우리가 평화로운 삶을 살려면 죄의 문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죄인의 신분에서 의인이 신분이 되고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스런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이 불안한 세상에서 참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걸 주고 계십니다. 그걸 리시브~ 받으십시오!
2. 부활로 오는 평강
유대인들은 평화도시를 만들고, 평화성읍에 살면서도 평화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외부적인 평화만 생각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이 되면 복의 근원이 되고 번영을 누리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에 거주하게 되면 거룩한 도성이기에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성전을 거창하게 화려하게 잘 꾸미면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다… 이런 종교적 이유에서 예루살렘을 성역화한 것입니다. 형식만 있으니 거짓 평화로 살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에게 이 날은 언제입니까? 19절 안식 후 첫날… 아직도 안식일의 여운이 남아있는 이른 시간입니다. 안식일은 노동에서 전면 해제되는 날이자 사방의 불안과 갈등, 경쟁에서 자신을 차단하고 하나님 품에서 안식하는 날입니다. 안식은 고요함입니다. 숨조차도 고르게 쉬는… 마치 어린아이가 고른 숨소리로 쌕쌕 숨을 쉬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상태입니다.
마르바 던은 <안식>이란 책에서 안식의 의미를 네 가지로 말합니다.
*안식은 그침이다-일을 그침, 생산과 성취를 그침, 근심 걱정 염려를 그침, 하나님이 되려는 노력을 그침, 우리의 소유를 그침, 세속적 문화 순응을 그침, 단조로움과 무의미를 그침
*안식은 쉼이다-영적인 쉼, 육체적인 쉼, 정서적인 쉼, 지적인 쉼, 사회적인 쉼이다.
*안식은 받아들임이다-공동체를 받아들임, 요구대신에 주기를 받아들임, 샬롬을 받아들임, 세상을 바르게 받아들임, 소명을 받아들임
*안식은 향연이다-영원이 있는 향연, 음악이 있는 향연, 아름다움이 있는 향연, 음식이 있는 향연, 애정이 있는 향연, 축제가 된 향연… 이런 날이 안식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안식을 위해 노동하지 않습니다. 회의도 없습니다. 불을 피우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불이면서도 분노의 불입니다. 이러면 안식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죠.
유대인 제자들은 어제 하루 종일 안식일을 보냈습니다. 교회가 세워지기 전이고 부활을 경험하지 못했기에 철저히 구약중심으로 안식일을 고요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이라고 사람들까지 안식을 만들어주지는 못했습니다. 안식일에도 두렵고 불안했습니다.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도, 쉼의 안식일도 제자들을 평화롭게 만들어내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로마 군병에게 체포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19절, 모든 문을 닫았습니다. 문을 단단히 잠그면 불안이 문에 막혀서 못 들어올까요? 그러나 계속 불안합니다. 불안한 모습들이 서로를 불안하게 합니다. 누가 밀고자? 라는 의심이 불안이 됩니다.
알고 보니 불안의 근원은 내 마음입니다. 마음에서 불안이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이 왜 불안을 만드는 생산 공장이 되고 있나요? 부활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심의 불안 샘을 극복하지 못하면 예루살렘성읍도 안식일도 교회에 있어도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 무엇도 나를 불행하게 할 수 없다. 나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나 자신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그 무엇도 나를 불안하게 할 수 없다.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나 자신 뿐이다”입니다. 불안은 환경으로 오는 것보다 내심(內心)에서 발생하는 게 더 많습니다. 그러기에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평안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안한 제자들에게 부활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라… 내가 부활했다! 나를 의심 말라! 나는 부활했다! 나에 대해 두려워 말라! 책망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라 회복시키고 사명을 주려고 왔다!~ 부활하신 주님의 평강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자 거짓말처럼 불안의 안개는 걷히고 평강이 임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 평강을 외부에서 찾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부에서 찾으셨습니다. 외부적인 요인이 여의치 못하여 평화롭지 못해도 주님께서 내 마음을 붙잡아 주심으로 마음의 평강을 이룹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나의 평강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고 하신 것입니다.
불교는 비움으로 마음의 평화를 가르칩니다. 비움을 통한 내면의 고요함, 이게 보통 수련으로는 힘듭니다. 기독교는 비움이 아니라 채움으로 평화를 얻습니다. 불안을 극복하고 평강을 얻으려면 부활의 주님을 마음 중심에 채우면 됩니다. 주님으로 채우면 자긍심, 자기만족도가 높습니다. 죽음의 터널을 지난 분은 죽음을 이기신 승리자입니다. 승리자가 내 안에서 주시는 내적 평강을 소유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사방의 두려움에서 우리 자신을 지켜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주시는 내면의 평화입니다. 이걸 리시브! 받으세요!
3. 성령으로 오는 평강
예수님께서 왜 제자들을 찾아오셨나요? 선생님이 찾아왔으니 이제는 죽었다, 생각했습니다. 부활한 분이 오셨으니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심판이 아니라면 왜 굳이 찾아올까요? 그들은 주님을 버렸습니다. 선생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거두고 무덤에 안치한 것은 제자들이 아니라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부활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졌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허물 때문에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히려 평강이 있으라고 하십니다. 떨지 말라! 무서워 말라! 그렇다고 두려움이 어디 갑니까? 그때 주님께서는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성령을 받으면 23절,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해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이제는 죄 때문에 가책을 느끼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사도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 가운데 성령대망을 사모하는 기대감을 갖게 했습니다.
예수님과 작별해야 한다는 두려움 속에서 조마조마했던 그들에게 예수님의 영 성령을 받으라~ 했을 때 그들은 아멘! 했습니다. 그러자 상황은 반전이 됩니다. 20절,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기왕에 부활의 주님을 만나 기쁨을 회복하는 중인데 성령을 받으라! 그 선포에 아멘! 하니 그나마 있던 불안감이 가버리고 너무 즐겁고 행복한 것입니다. 바로 그 평강이 있었기에 제자들은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두렵지 않고 담대했던 것입니다(행 13:4-12).
바울이 이걸 터득한 사람입니다. 빌립보교인들에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영으로 우리 평강을 위해 세상 끝까지 함께 해주마! 약속하셨습니다.
19세기 미국 시카고의 법의학교수이자 변호사 스패포드는 4명의 딸을 둔 행복한 가장입니다. 유럽가족여행을 계획했는데 사정이 생겨 아내와 딸들만 먼저 출발했습니다. 얼마 후 스패포드는 아내에게서 청천벽력의 전보를 받았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나 혼자만 남았습니다. 어찌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가족이 탄 배는 대서양에서 충돌사고가 일어나 침몰하고 딸 넷은 익사했습니다. 스패포드 부인은 프랑스 배를 만나 혼자 구조 받았습니다. 불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은행이 파산되고 재산은 망했습니다. 그가 이 사실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그는 배를 타고 딸들이 익사한 대서양으로 갔습니다. 배가 침몰한 해역에 도착했을 때 마음속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찬송을 읊조리고 있었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스패포드는 대학교수와 변호사직을 버리고 복음전도자로 헌신하여 남은 생애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하나님의 평화를 간직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회복의 스토리입니다.
딸 넷의 죽음에서도 “내 영혼 평안해…” 찬송했던 스패포드, 오늘 우리에게 그런 평안을 요구하시는 주님이 아니라 훈련하고 기도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평강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생각을 지켜주실 때 놀랍게도 우리에게도 평안을 소유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이런 평안을 리시브! 받으십시오!
<결론>
유대인은 샬롬~ 인사합니다. 예루살렘의 평화! 성전의 평화! 안식일이 만들어 주는 평화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로마인들은 팍스! 라고 합니다. 무력에 의한 평화, 평화의 질서입니다.
초대교회는 사람들이 만드는 평화를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재림 예수님께서 만드실 진정한 평화 평강을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샬롬! 에서 인사말을 바꿨습니다. 마라나타! 주님께서 곧 오신다! 그 때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평강은 맛보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 맛보기 평강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평강을 토스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라! 리시브! 그 평강을 받으십시오! 그 평강을 누리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