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엇이 변화되어야 하나?
누가복음 24장 30~35절
<서론>
국민일보에 SBS 예술단장 김정택 장로의 간증이 연재되었습니다. 서울대학 음대를 나오고 미8군 무대 출신으로 인기 가도(街道)를 달리던 김씨, 부모님과 일찍 교회는 다녔지만 음악하다 보니 술로 찌들고 스트레스 받고… 흥청망청 엉망진창이었답니다. 1990년, 여름비가 내리던 날 심수봉씨가 여전도사님(전몽월)과 찾아왔습니다. 성경을 읽는데 자꾸 눈에 밝혀 찾아왔답니다. 몇 마디 후 전도사님이 불쑥 “단장님, 더 이상 죄 짓지 마세요!” 하더랍니다.
“예? 저 죄 많이 짓지 않는데요.”
“죄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어요.”
그 소리가 천둥번개처럼 머리를 치며 술자리 약속을 마다하고 집으로 가는데 눈물이 쏟아졌답니다. 운전이 힘들어 차를 길가에 세우고 그냥 울었습니다. 집에 가서도 피아노 밑으로 기어 들어가 성경을 보면서 한없이 떠오르는 죄 때문에 울며 기도했습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신 하나님… 내칠 수도 있었지만 안아주신 하나님… 허망한 생활을 그만두고 바르게 살 기회를 주신 하나님이 ‘죽도록’ 감사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흘러내리는 눈물이 뜨거웠다. 눈물에 온도가 있다는 걸 알았다. …내 인생의 BC가 마감되고 AD가 열리는 시점이었다. 죄로 얼룩진 내 인생을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는 때였다.”
B.C before Christ는 예수 이전, A.D 라틴어 Anno Domini는 '그리스도의 해'입니다. “이 날 이후 나는 예수 이전의 아니라 예수 안의 인생이 되었다”고 김 단장은 고백합니다.
여러분도 인생을 나눠보세요! 교회 다니기 이전과 이후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를 다니면서도 예수를 제대로 몰랐던 B.C와 제대로 예수님을 믿게된 A.D를 나눠보세요!
본문에 두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살려고 도망을 가는 중이지요! 이랬던 사람들이 33절, 죽음의 도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갑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기에 도망가다가 다시 죽으러 돌아갈까요? 어떤 변화가 일어났던 것일까요?
1. 지식의 변화
두 사람은 70인 제자 일원인 것 같아요. 하나는 글로바, 다른 사람은 무명입니다(18절). 두 사람은 기적을 보았고 환호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함께 열광했습니다. 그러던 사람들이 왜 도망치고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3일 전에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예루살렘은 계엄령 분위기입니다. 어제는 안식일…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멀리 걷지 못합니다. 어느 이상을 걸으면 노동입니다.
안식일이 지나 일요일, 예수님 부활소식이 제자들 사이에 빠르게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증인들은 대부분 여자들입니다. 당시 여인들의 증언은 법정에서 채택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도 빈무덤은 보았는데 부활의 주님을 직접 대면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이는’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목으로 체포 될 것입니다. 검거령이 내리기 전에 도망가는 것이 유리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셨다는 말도 예루살렘에서 달아나도록 만들었습니다.
도망을 가면서도 두 사람은 14절,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모든 일은 예수님에 관한 지식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탄생 비화, 산상수훈을 비롯한 훌륭한 교훈, 용서와 축복… 기적을 모두 알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까지 압니다. 생생하게 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입니다. 그 이상의 예수님은 알 수 없습니다. 지적인 앎의 한계입니다.
15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왔으나 16절,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길게는 3~1년 이상을 지냈기에 예수님에 대해 훤히 안다고 자신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죽음은 이해하지 못했고 믿지 못했습니다. 부활은 더 믿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교훈들은 알고 믿었지만 죄를 위해 내어주심이 되고 의인됨을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은 동행중에 있었지만 몰라봤습니다.
예수 생전(生前) 가까이서 지내 얼굴을 잘 아는 그들이 정작 예수님을 옆에 두고 왜 몰라보았을까요? 부활의 예수님은 영 다른 얼굴로 변했을까요?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랍오니여! 선생님이여! 외쳤습니다(요 20:16).
두 제자는 왜 알아보지 못했습니까? 16절,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눈이 '가리어져'는 고정되고 변동이 없음을 뜻합니다. 십자가 처형에 쇼크가 커 그렇게 죽은 존재가 결코 살아날 수 없다는 현실과 논리, 과학적 근거에 시선이 고정된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만 생각했지 사흘 만에 부활한다는 주님의 예고는 종교적 수사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30절, 떡을 축사하시고 떼어주셨습니다. 그제야 31절, 알아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자신을 보여주셔야 알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우리도 얼마든지 주님을 설명합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님, 주일학교부터 들은 예수님을 지식적으로는 얼마든지 설명 가능합니다. 그러나 지식으로만 아는 주님은 우리 인생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 이론을 제시한 마르크스는 신학교 출신입니다. 그 비상한 머리는 성경을 빠삭하게 압니다. 성경시험을 보았다면 A+이겠지요. 그러나 그는 예수를 버리고 계급투쟁을 통한 공산주의 이념을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복음은 약자들의 몽상에 불과합니다. 힘과 무력의 계급투쟁을 통한 평등사회 건설을 위해 공산주의를 만든 것입니다.
세례요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과 친척 지간이었고 동갑내기로 친구처럼 지냈지만 예수의 메시아됨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30세가 되어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다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때 성령이 눈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저를 육신으로만 알았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고백합니다.
우리가 아는 예수님은 어떤 예수입니까? 교과서적인 예수입니까? 33년의 예수님입니까? 33년의 죽은 예수는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두 제자처럼 엠마오로 내려가는 하향적인 삶으로 추락시킬 것입니다. 도마와 같은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나의 주인, 나의 삶의 주인, 나의 통치자,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 인생으로 하여금 고생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신 좋으신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믿게 될 때 비로소 영적으로 주님을 경험하며 우리 인생에 부활의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2. 감정의 변화
글로바와 한 제자가 선생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눈이 가려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눈이 가려졌나요? 성령의 역사이지만 슬픔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구세주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21절, “우리는 그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예수님에게 걸었던 기대감! 이제 그들에게 예수님은 20절, 못 박힌 예수님입니다. 죽은 예수님은 더 이상 기대주가 아닙니다.
20절,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대제사장들은 예수만 못 박은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꿈도 기대도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이 죽을 때 그들의 꿈도 기대도 함께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17절, 그들은 슬픈 빛을 띠고…
슬픔은 상실입니다. 자식을 먼저 보내는 어버이의 슬픔은 그냥 동정의 슬픔이 아닙니다. 말로는 불쌍하다, 내 아들이 불쌍하다 하지만 사실은 자기가 불쌍한 것입니다. 자기에게 꿈이 사라졌고 기쁨도 끝나서 웁니다. 이제 껍데기만 사는 것이기에 인생이 슬픈 것입니다. 제자들은 치유될 수 없는 상실감으로 엠마오를 향하여 내려가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멈춘 믿음! 십자가에서 죽어버린 믿음을 살려주시기 위해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17절,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18절, 글로바가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합니다. 구세주로 알았던 예수가 죽었다, 죽기 전에 부활을 예고하셨다, 부활했던 여인들의 증언도 나왔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남자들도 있지만 24절,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그래서 자기들도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슬프고 슬픈 빛을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25절, 성경예언은 물론 예수님의 부활을 더디 믿는 믿음을 나무라며 말씀을 풀어주십니다. 26, 27절. 부활에 대한 말씀! 말씀은 약속이고 그 약속은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에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32절,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불타지 않더냐! 슬픈 빛, 슬픈 감정이 뜨거운 마음이 됩니다. 기대감이 살아난 것입니다. 진정한 감격과 영적 흥분은 말씀에서 나옵니다. 손바닥에서도 나오고 입술에서도 나와야 하지만 말씀에서 나와야 영적 뜨거움입니다. 말씀에서 나온 뜨거움만이 생애를 변화시킵니다. 감정의 뜨거움은 곧 식어버립니다. 인생을 변화시키는 것은 말씀입니다.
교우 여러분! 무엇 때문에 슬픈 빛을 띠고 있습니까? 어떤 기대감이 무너져서 그렇게 슬픈 얼굴입니까? 말씀과 만나세요! 말씀 안에서 심장을 뛰게 하실 예수님을 만나세요!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기대감들이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상실감에 빠졌던 사람들, 더 이상 기대가 없어 슬픔 빛을 띤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그 심령을 기대할 때 설교자로서 가장 행복합니다. 말씀으로 뛰게 할 가슴! 그것이 제 사역입니다.
베드로로 하여금 물속에 뛰어들게 만든 것은 예수님께서 그를 감동시켰기 때문입니다. 배신한 자기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믿어주고 재활용하려고 갈릴리까지 오셨다는 사실 앞에 베드로는 감동합니다. 그 감동이 물속에라도 뛰어들게 했던 것입니다. 사람은 감동하면 일을 냅니다. 일을 내지 못한 것은 가슴이 뜨겁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국 카네기공대 졸업생들에게 성공하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물으니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은 15%이고, 나머지 85%는 감동을 통한 좋은 인간관계”를 꼽았다고 합니다.
우리도 갈릴리 제자들처럼 실패한 마음입니까? 때로는 내가 한심스러워집니까? 예수님을 만나세요! 감동을 받으세요! 불이 붙으면 다시 쓰임을 받습니다. 물속이라도 뛰어들려는 베드로의 열정이 다시 쓰임을 받습니다.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자신을 본 모세는 80세라는 난관을 뚫고 위대한 지도자가 됩니다. 주님은 식은 사람이 아니라 가슴에 불이 있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지식으로 인도되고 그 말씀으로 우리 심령이 뜨겁게 달아오를 때 우리에게서 부활의 변화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3. 행동의 변화
두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 방향으로 두 사람이 가고 있습니다. 길은 방향을 알려줍니다. 경부선은 부산으로 가는구나, 호남선을 타면 광주 쪽으로 가는구나, 길은 방향을 보여줍니다. 지금 예루살렘에는 부활소식이 전해지는데 두 제자는 엠마오로 갑니다. 예루살렘이 뒤숭숭해지니 사명을 포기하고 달아나는 길입니다. 그것은 공동체에서 이탈하는 길입니다.
두 제자에게 지난 날 예수님은 무엇이며 신앙은 무엇일까요? 신기루? 잠시 즐겁게 해주고 이제는 끝나버린 일장춘몽일까요? 하나님왕국에 대한 부푼 기대, 예수님을 이스라엘 구속자로 알았던 기대감, 이제는 예루살렘에 내려놓고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새로운 삶을 찾아서. 그러나 죽은 예수의 추억을 가진 그들이 어디에 희망이 있습니까? 그래서 마음은 상실감으로 슬플 수밖에 없습니다. 행동에 힘이 없고 말에 기운이 없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 인생의 하향 길로 나선 사람들 앞에 부활의 예수가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올라가는 자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려가는 자들에게도 나타나십니다. 죽음을 향해 내려가는 나인성 청년에게 관을 세우며 “청년아 일어나라!” 명령하신 분입니다. 인생의 공허함에 빠져있는 삭개오에게 “뽕나무에서 내려오라! 내가 뽕나무가 되어줄께! 이제 너도 나처럼 세계를 품을 수 있는 영적 거인이 될 것이다!“ 고 하십니다.
일곱 귀신 들렸던 마리아에게는 더 이상 귀신의 조종을 받지 말고 새사람이 되자고, 남자들을 전전하던 수가성 여인에게는 “더 이상 육신의 욕심에 끌려 다니지 말고 내가 주는 영생의 물을 마시자”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항상 내려가는 자들의 편이 되십니다.
그 예수님이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결과는 당연하지요! 33절,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 당연히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만큼 예수와의 만남은 주저할 수 없는 확실한 체험입니다. 더 이상 머뭇거릴 필요도, 엠마오로 내려갈 필요도 없습니다. 즉시로 길을 ‘유턴’합니다.
예루살렘에 무슨 영광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죽음의 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제대로 알아보니까, 부활 앞에 가슴이 뛰니까 더 이상 달아날 수가 없습니다. 부활의 사실을 알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달아나던 예루살렘으로, 혼자 살겠다고 버렸던 공동체로 유턴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의 삶을 항상 유턴시킵니다. 죽음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분열서 화합의 길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실패의 길에서 성공의 길로, 베옷에서 드레스로의 길로 돌아서게 합니다. 그것이 부활이 주는 유턴의 삶입니다. 부활의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이기에 하나님 쪽으로 자석처럼 전기처럼 끌어당기는, 끌어가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유턴되고 힘을 잃었던 삶은 새로운 힘을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세례요한! 고백 후로 그의 삶은 180도 바뀝니다. 모든 영광 명예를 버리고 비껴섭니다.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을 예수에게로 돌립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향할까봐 철저히 낮춥니다. 나는 신들메를 풀 자격도 없는 자라, 나는 등불이 아니라 등불을 든 사람에 불과하다고 자신을 낮춥니다. 예수를 알아본 자들은 이렇게 자신을 제대로 압니다.
<결론>
윌티 모빌리는 <대학의 위기>에서 "만일 당신의 믿음이 십분의 일만 진실이라면 당신은 현재보다 열 배는 더 흥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 내려가고 있습니까? 왜 침체상태로 있습니까? 예수님을 제대로 몰라서 그런 것은 아닙니까?
성경의 예수님은 알아도, 33년 예수님은 알아도 부활하시고 여기 나와 함께 동행하는 예수님을 몰랐기에 달아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부활의 주님을 확실히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내 가슴은 식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도 슬픈 빛을 띠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말씀을 가까이 하세요! 말씀을 사모하세요! 말씀이 나를 뜨겁게 달라고 갈망하십시오!
엠마오로 내려가는 삶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부활의 유턴이 있기를 기도하십시오!
그런데도,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