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사의 독립선언
열왕기상 19:19~21
<서론>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과 독립운동이 일어난 지 93주년입니다. 3․1운동은 기독교인들이 앞장 선 운동입니다. 33인 대표 중 16인이 기독교인, 천도교 15인, 불교인 2인입니다.
당시 기독교인수가 겨우 2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1.3%입니다. 천도교는 약 3백만 명으로 10배가 넘습니다. 전체국민의 1.3%에 불과한 기독교에서 16인 대표가 나왔다는 것은 기독교가 숫자에 관계없이 얼마나 영향력 있고 우리 민족의 희망대안세력이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한국교회는 자랑스런 선배들의 유산을 물려받은 교회입니다. 그 말은 기독교가 어느 종교인보다 애국심이 강하고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수호를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민족주의는 신앙적 자세가 아닙니다. 세계를 품는 선교비전을 함께 가져야 합니다.
오늘은 “엘리사의 독립선언”이라는 제목으로 우리 믿음의 독립선언이 어느 시점까지 왔는가, 를 생각합니다. 독립선언이 발표된 지 93주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진정한 독립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남과 북이 통일되는 날, 독립운동은 완성되는 것입니다. 남과 북이 통일된다고 독립선언이 성공하는가, 그것도 아닙니다. 통일은 국가적대사이고 사회적 영역입니다.
진정한 독립선언은 나 자신을 향해 선포하고 참된 크리스천의 자유를 가질 때 완성됩니다. 93주년을 맞는데도 독립이 완성되지 못한 것처럼 우리는 오랜 세월 예수 믿음에도 제대로 된 완성품, 명품 크리스천이 되지 못한 것을 반성하며 새로운 독립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1. 엘리사는 육신에서 영적인 세계로 독립선언을 합니다.
엘리사는 북이스라엘 출신입니다. 호세아 요나 엘리야가 같은 북이스라엘 선지자들입니다. 가장 강력한 선지자는 엘리야입니다. 바알과 아세라 숭배자 아합왕과 이세벨 왕비가 다스리던 우상숭배시대에 활동했습니다. 모세 버금가는 인물로 유대인의 추앙을 받는데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세례요한의 정체를 확인하면서 엘리야냐, 물어 볼 정도입니다(요 1:21).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을 내리고 물을 내리고 우상선지자 850명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선지자입니다. 죽음도 보지 않고 승천한, 그야말로 물불의 사나이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기초가 약했습니다. 이세벨이 죽이겠다고 선포하니 그 길로 도망칩니다. 대결에서 너무 탈진했고 뒷심이 약한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후계자로 엘리사 선지자를 세웁니다.
엘리야의 부름을 받을 때 엘리사는 열두 겨릿소로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겨릿은 쌍입니다. 소 12쌍이니, 소 24마리로 한 조(租)를 이루어 쟁기질을 한 것입니다. 24마리 일하는 소를 소유했다는 것은 대단한 부자요, 강력한 썬파워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엘리사에게 겉옷을 던집니다. 겉옷은 제사장복장처럼 신분과 직무를 나타냅니다. 엘리야가 겉옷을 던진 것은 내 직무를 대신하라는 요구였습니다. 엘리사는 그 동작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렸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부모와 작별인사를 하고 엘리사를 따릅니다. 소 두 마리를 잡고 농기구를 불사른 것은 농사꾼 생활을 마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결연한 의지입니다. 자기 육신에 대해 독립을 선포한 것입니다. 농사꾼이 영적 농사꾼이 되는 순간입니다. 일종의 터닝 포인트지요.
한국교회가 근력(筋力)이 약해졌습니다. 근력은 근육의 힘. 일을 능히 감당하는 힘, 지구력입니다. 근육이 약하면 뒷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일은 시작하지만 끝마무리가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영적 근력이 강해야 하는데 너무 약합니다. 지적인 신앙도 있고 감성도 있는데 의지적인 결단과 실행이 약합니다. 아직도 자신에 매여 있어서 주변만을 맴돌고 있습니다. 30년을 믿어도 생활성장이나 진보도 없고 능력도 나타나지 못합니다.
고린도교회가 이런 꼴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을 세 종류로 나눕니다. 육에 속한 사람. 육체 본능에 지배를 받는 자연인(自然人)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육체의 통치를 받고 육신만을 위해 살아갑니다. 교회와 담을 쌓은 사람으로 영적 분별력이 없기에 성령의 역사가 어리석게 보입니다. 주일성수와 십일조, 교회에 헌신하는 일들을 어리석게 생각합니다.
다음은 육신에 속한 사람. 세례도 받고 거듭나서 머리로 말씀의 지배는 받지만 육체의 통치도 함께 받는 유아기적 크리스천입니다. 머리로는 되는데 생활에서는 말씀 순종 능력이 부족합니다. 크리스천의 모습보다는 종교인의 모습이 더 많이 나타납니다. 교회 안에서도 항상 불평과 시기와 분쟁의 당사자들이 됩니다. 바울은 신앙의 어린아이들이라 합니다.
다음은 영에 속한 사람으로 신령한 사람입니다. 성령의 통치 하에 있기에 육체의 본능 대신 말씀에 지배 받으며 말씀대로 믿고 살려고 애씁니다. 성령의 탄식을 느끼고 기도하고자 하는 충동이 일어나고 성령의 불을 소멸시키지 않으며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삶을 삽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육체의 본능에 독립을 선언했고 종교적 그리스도인으로 출발해서 점점 성령통제를 받는 성령의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나를 희생하고 남을 배려합니다. 영적독립의 완성도가 높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바가 이런 수준이요 생활입니다. 이 정도가 되어야 영적으로 성장하며 성화의 생애를 살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에 미흡한 것입니다.
2. 부분적 헌신에서 완전한 헌신으로 독립선언을 합니다.
엘리야가 부름 받을 때는 아합과 이세벨이 통치하던 시대입니다. 이세벨은 시돈왕의 딸로 바알신을 들여와 북이스라엘의 주신(主神)으로 만들려 합니다. 그러니 때는 비상시국입니다. 비상시국에는 점잖은 사람보다 강한 왕에게 강한 선지자를 붙여야 합니다. 그래서 준비는 되지 않았지만 거침이 없고 두려움이 없는 야성(野性)의 엘리야를 급히 불러낸 것입니다.
엘리야는 850명과의 싸움에서 진을 뺐습니다. 엘리야는 얼마나 격정적이고 격렬한 사람입니까? 그러나 엘리야는 말씀기초가 약하고 신앙연조가 짧습니다. 단거리는 강하나 장거리는 약한 선수입니다. 물불을 불러오는 초능력 선지자이지만 이세벨과 장기전이 예고되자 뒷심이 딸려 “나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듭니다! 이제 나만 남았습니다.” 라고 호소합니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18절, 7천명이 남아있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않고 입을 맞추지도 않는 숨겨진 성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7천명이 선지자들인지, 성도들인지 엘리사가 그 안에 포함되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어떻든 엘리사는 집에서 소박하게 신앙생활을 하며 자기 일에 충실했던 사람입니다. 엘리야와는 신분이나 성향이 다릅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겉옷이 던져졌고 옷에 접촉되었을 때 엘리사는 성령의 능력에 접촉됩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임한 것입니다. 그러자 숨어서 믿던 믿음에서 드러나는 믿음으로, 익명의 믿음에서의 내 이름을 건 믿음으로, 적당히 믿던 믿음에서의 독립을 선언하고 성령의 불덩이가 되는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아마추어 신앙이 프로페셔널 프로급신앙으로, 파트타임 선데이크리스천이 매일매일 주님과 동행하는 데일리크리스천 풀타임 신앙인이 됩니다. 그걸 온 몸으로 독립했음을 선언하고 실행합니다. 사라지는 엘리야의 대타로 스승이 단기간에 이룬 업적을 이어 북이스라엘을 다시 여호와 종교의 본산지로 만들려고 자기생활의 안일과 여유와 개인적 삶의 마감을 독립선언한 사람이 엘리사 선지자라는 말입니다.
엘리야가 선지자생활을 한 기간은 짧습니다. 비상시국에 하나님의 차출을 받고 아합 왕에게 가뭄을 선포하고 그릿 시냇가에 숨습니다. 이후 몇 년 있다 바알과 이세벨 앞에 재등장합니다. 그리고 갈멜산에서 목숨을 건 대결을 벌입니다. 그곳에서 엄청난 승리를 거둔 후 사명을 엘리사에게 떠맡기고 본인은 훌훌 승천해 버립니다. 어떻게 보면 행운아입니다.
이에 비해 엘리사는 부름 받은 날부터 백성들과 함께 합니다. 도피하지 않고 선지학교를 확장해서 사람들을 키웁니다. 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우상숭배자와 치열하게 싸우는 풀타임 선지자가 됩니다. 그것이 바로 파트타임 신앙생활에서 독립해서 풀타임 신앙자로 살려는 독립선언입니다. 그래서 생업인 소들을 잡아 이웃과 나눠먹고 농기구들을 불태운 것입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연한 독립선언입니다. 신앙생활이 프로를 선언한 것입니다.
고인이 된 옥한흠 목사님은 제자훈련을 대중화한 분입니다. 그는 제자훈련에 미치라고 합니다. 미친다는 것은 올인입니다. 미칠 때에 열매가 나타나고 업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미치지 않고 흉내만 내면 짝퉁이 된다는 이야기지요. 그래서 그를 광인(狂人)이라고 합니다.
독립운동가는 독립운동에 대해 파트타임이 아닙니다. 종사하는 생업도 있지만 머리와 마음속에는 오직 독립, 대한독립이 전부입니다. 그들은 독립만큼은 풀타임 사역자들이었습니다.
우리 평서노회 출신인 도산 안창호 선생이 일경에 붙잡혀 재판을 받을 때 이야기입니다.
“그대는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 독립이 가능하다고 믿는가?”
“그렇다! 대한민국 전체가 독립을 믿으니 독립될 것이요, 세계의 공의가 대한의 독립을 원하니 독립이 될 것이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독립을 원하시니 독립이 될 것이다.”
모범적인 장로의 표상이라는 평양 산정현교회 고당 조만식 장로는 이렇게 유언했습니다.
“내가 죽으면 묘비에 아무 것도 쓰지 말라. 두 눈만 새겨 두어라. 한 눈으로는 왜놈이 망하는 것을 볼 것이고, 다른 한 눈으로는 내 조국이 독립하는 것을 보고 싶다.”
김구 선생도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물으면 대한독립이요, 라고 말할 것이다.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물으면 우리나라 독립이요, 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물으면 세 번째 소원도 대한의 완전한 독립이요, 라고 대답할 것이다.” 라고 했답니다.
세 분 모두 독실한 신앙인입니다. 그들은 조국의 독립을 부분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독립운동에 올인했습니다. 그런 씨앗이 30년 후 해방으로 열매가 맺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아니면 말고’ 식의 종교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이 아니라 불 꺼지고 연기 나는 덜 마른나무들로 채워집니다. 그러니 머리를 깎인 삼손처럼 대한민국 어릿광대 노릇이나 하고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전체국민의 1.3%에 불과했던 90년 전의 기독교, 지금은 1.3%가 아니라 스무 배도 넘는 23%도 될 만큼 부흥했지만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연약한 기독교, 성화가 부족한 기독교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여기에 한국교회는 선데이 크리스천에서 독립을 선언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예배당 밖으로 나오는 교인에게 악수를 청하며 작은 소리로 말합니다.
"당신은 주님의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목사님, 저는 벌써 주님의 군사가 됐는걸요."
"그렇다면 어째서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을 빼고는 통 볼 수가 없지요?"
그가 목사님 귀에 대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비밀요원이거든요."
1년에 두 번 나오든 한 주일에 한 번 나오든… 교회는 비밀요원을 원하지 않습니다. 신분과 이름을 드러내놓고 교회 밖에서 당당하게 생활하는 풀타임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3. 대접받던 자세에서 섬기는 자리로 독립선언을 합니다.
엘리사는 24마리의 소를 몰아 농사를 짓던 부농(富農)입니다. 그 만큼 땅이 넓고 소 떼가 많고 하인도 많았다는 것입니다. 농경사회에서 땅과 소와 하인이 많으면 대단한 권력입니다.
뭐가 아쉬웠겠어요? 재산이 많을수록 겁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많아집니다.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모든 소유를 잃게 됩니다. 익명의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옷을 통해 성령의 강력한 영이 접촉되고 강력한 능력을 체험합니다.
엘리사는 고백합니다. 당신을 따르리다… 물론 엘리야가 능력의 선지자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다듬어진 정통파 선지자는 아닙니다. 제대로 코스를 밟아 선지자가 된 사람이 아니기에 엘리야가 다짜고짜로 옷을 던졌을 때 그 무례함에 기분이 나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겸손히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합니다. 그 날로 21절, “엘리야를 좇으며 수종들었더라”. 이는 마치 무인가신학교를 나온 목사가 서울대학생을 부를 때에 학벌을 내려놓고 심부름꾼을 자처하는 겸손, 그게 엘리사의 겸손입니다. 왕하 3:11에, 엘리사를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잔심부름꾼이나 하는 사람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부름 앞에서 여호수아가 모세의 수종을 들었던 역사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자기는 엘리야 같은 능력이 없습니다. 그 능력과 영감이 없었기에 이왕 부름을 받았으니 수종을 들므로 그에게 접촉해서 더 큰 능력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겸손하게 엘리야의 제자로 수종을 드는 자세가 되었을 때 큰 인물이 됩니다. 엘리야가 불렀을 때 교만하지 않고 그의 손에 물을 붓던 그 겸손함을 엘리사로 더 큰 능력의 사람이 되게 한 것입니다.
엘리사는 스승보다 더 큰 일을 합니다. 스승은 하늘에서 불을 내리고 물을 내렸지만 엘리사는 죽은 사람을 살리는 대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스승은 850명을 죽이는 일을 했지만 엘리사는 선지생도를 키우는 생산적인 일을 합니다. 엘리야는 오늘의 일을 하지만 엘리사는 다음세대를 위해 선지생도들을 키우는 내일을 대비하는 미래적인 사역을 합니다.
엘리사를 거친 무례한 인간이라고, 그에게 접촉할 것이 뭐냐고 그의 부름을 외면하고 자기의 삶을 고집했다면 그는 평생을 육신의 종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감하게 자기에게서 자기의 삶에게서 교만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따라나서는 순종의 자세를 보입니다.
엘리야를 수종드는 섬김을 통해 그에게 접촉하며 승천할 때에 영감을 갑절로 달라고 통사정을 합니다. 그리고 엘리야의 능력에 크게 접촉되고 그의 것을 전수함으로 대선지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서 독립해야 합니다. 내 재능과 능력에 의지하면 내 운명대로 살다갑니다. 그러나 내 인생에서 독립해서 겸손히 하나님에게 인생을 드린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에 값진 생애로 만들어 내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안일하고 잘못된 생활에 독립을 선언해야 합니다. 파트타임처럼 선데이 크리스천으로 사는 길에서 독립하겠다고 선언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도 전적으로 우리를 도우시고 성공적인 사역을 감당하게 할 것입니다.
<결론>
찰스 캐스팅은 미국 GM의 수석기술자입니다. 그는 유별나게 큰 손을 갖고 있습니다. 모두들 그 손을 부러워했고 찬사(讚辭)를 보냈습니다.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이 손을 어떤 일에 가장 요긴하게 사용하십니까?”
최고의 수석기술자는 짧게 대답했습니다.
“기도하는 일입니다!”
찰스 캐스팅은 예수님을 파트타임으로 믿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풀타임 신앙인입니다. 자동차부속품을 만지면서도 항상 하나님을 향했고 큰 손을 기도하는 일에 가장 먼저 헌신했습니다. 우리도 풀타임신앙마인드를 가질 때 인생을 밥벌이로 끝내지 않고 삶의 현장에서 엘리사처럼 살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 자신에게서 진정한 독립을 선언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