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의 원리
베드로후서 1장 19~21절
<서론>
독일의 신학자 마르틴 루터가 로마가톨릭에 대항하여 종교개혁을 할 때, 오른팔로 일하던 프레드릭 니코니우스가 있었습니다. 그가 갑자기 병이 들어 소생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느낀 니코니우스는 루터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편지를 받은 루터는 깜짝 놀라. 바로 병석에 누운 친구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친구여, 나는 자네가 더 살 것을 하나님 이름으로 명령하네. 교회를 개혁하는데 자네가 필요하니 주님은 자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나로 하여금 듣도록 하지 않을 걸세. 자네가 살아야 한다는 것은 나의 뜻이네.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네."
임종을 앞둔 니코니우스는 루터의 편지 내용을 전해 듣고 다시 소생하게 됩니다. 루터의 확신에 찬 기도와 믿음으로 죽음조차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후 니코니우스는 6년 동안 루터와 함께 일을 하다가 주님 품으로 갔습니다.
오늘 종교개혁이 일어난지 494주년이 됩니다. 교인들에게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고 베드로대성당 건축비를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를 팔고 다니는 교황청의 비리를 침묵하다 못한 루터가 로마교황청의 개혁을 부르짖으며 일어났던 날이 바로 1517년 10월 31일, 내일입니다.
오늘 종교개혁주일을 맞으며 루터처럼 건강을 위해서 명령합시다! 병에서 놓여 깨끗하라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깨끗하라고! 루터처럼 재정을 위해서 명령합시다! 가난에서 놓여 풍성해지라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풍성하라고! 루터처럼 한국교회를 위해서 명령합시다! 눌림에서 놓여 다시 일어나라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다시 일어나라고!
이것이 말씀 종교인 개혁주의입니다. 그러나 이제 한국교회는 개혁을 말하기조차 부끄럽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개혁해야 하는데 세상이 우리에게 개혁을 요구하고, 언론이 한국교회를 개혁한다는 부끄러운 시대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종교개혁의 3대원리를 되새겨 보면서 남에게 개혁을 요구하기 전에 스스로에게 개혁을 주문하는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성경의 권위
종교개혁의 제1원리는 성경의 최고권위, 최종권위입니다. 성경은 권위 중의 권위요, 교리의 최고권위요 교회의 최종권위라는 것입니다. 로마가톨릭교회가 성경에 대해 어땠기에 루터는 이런 주장을 했을까요? 로마가톨릭은 성경의 권위보다 교회의 권위, 교황의 권위를 우위에 둡니다. 교황은 성경의 권수를 결정할 권한이 있고 성경해석의 결정권을 갖습니다. 어느 정도인가, 우리 개혁주의교회는 성경 66권이 정경입니다. 정경에서 한 권도 뺄 수도 집어넣을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22장 18, 19절에 기준합니다.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제하여 버리시리라”
그러나 로마가톨릭 성경의 운명은 교황에게 달렸습니다. 로마가톨릭 성경은 7권이 더 많은 73권정도입니다. 로마가톨릭의 주장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서적들을 찾다보니 그렇습니다.
우리는 교리를 정할 때 성경에 있는 것만 믿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가 칼빈은 성경이 가는 곳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 곳에서 멈춘다, 라고 성경해석의 기준을 정했습니다.
로마가톨릭은 교황이 교리를 해석하거나 정합니다. 마리아가 2천년 동안 무덤에서 잠을 자다가도 1950년 교황이 마리아의 부활과 승천을 선언하면 그게 성경 위에 있습니다. 로마가톨릭은 성경에도 없는 교황제도를 만들어 냈습니다. 베드로를 1대교황이라고 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대답했더니 예수님께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합니다.(마 16:18).
교황청은 이 반석을 베드로라고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1대교황이고 지금 교황은 265대로 이름은 베네딕토 16세입니다. 베네딕토 16세라고 하니까 어떤 사람이 그랬대요, 아니 교황이 16세 밖에 안 되었어요? 생각보다 어리네요^^
개혁주의는 예수님께서 세우신 반석을 베드로의 신앙고백으로 봅니다. 그게 맞아요. 교회라는 이름은 에클레시아, 부름을 받은 무리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이미 교회라는 의미가 신앙고백에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자신도 교황으로 자처한 적이 없고 12사도를 비롯해서 신약의 누구도 교황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결혼해서 아내도 있는데 교황청은 독신이라면서 독신제도를 만들어 냈습니다. 천국에서 가장 곤란한 분이 베드로가 아닌가 싶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 운동을 할 때 싸운 대상이 둘인데 이성주의와 신비주의입니다. 이성주의는 인간이 세운 공로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것인데 로마가톨릭교회가 바로 이 바탕 위에 서 있었습니다. 신비주의는 신비적 체험에 집착해서 주관적인 신앙을 강조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런 것들에서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그러니 사사로이 풀지 말라 합니다. ‘사사로이’는 함부로, 이익을 위해 악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로마가톨릭은 물론 이단들도 성경을 마음대로 해석하고 그 권위를 유린 합니다. 이단교주들이 자신을 메시아라고 하는 일이야 말로 베드로가 경고했던 내용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 이야기입니다. 성경의 권위를 최고 권위, 최종권위라는 종교개혁의 후손이라는 우리들이 정작 성경을 너무 안 읽습니다. 성경을 읽지 않으면 성경을 듣고 배우는 일에라도 열심해야 합니다. 예배시간에 들은 말씀이라도 그대로 지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우리들도 교리적으로는 성경을 최종권위라고 말하지만 생활은 따라주지 않습니다. 지식은 있는데 성경보다 감정이, 자아가 더 우위에 있습니다. 때로는 내 권위가 성경보다 위에 있습니다. 성경 그대로 살지 않는다면 성경의 최종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 권위, 남편의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은 알면서도, 입으로는 말하면서도 실행하지 않으면 사실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동일입니다.
성경의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성경을 더 많이 읽고 읽은 바대로 지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성경의 삶이 내 안에서 녹아져 내려야 합니다. 그래야 개혁주의의 후손입니다.
2. 이신득의
종교개혁의 제2원리는 이신득의입니다. 한문인데,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가장 중심적인 교리입니다. 초대교회에 세 가지 그릇된 가르침이 들어왔습니다. 유대인 개종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주의는 내 행위로 내가 의인이 되고 구원을 얻겠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행위는 좋은데 동기가 안 좋습니다. 구원을 내 손으로 쟁취하겠다는 행위구원을 주장한 것이지요.
다음에는 갈라디안주의입니다. 갈라디아교회에 들어온 변행된 율법주의라고 해서 갈라디안주의라고 합니다. 갈라디안주의는 은혜+율법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의 길은 이루어 놓았지만 구원성취는 우리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로마교황청은 갈라디안주의에 뿌리를 내립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인간의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면죄부라는 것이 나오고 십자군전쟁이 생깁니다. 성지(聖地) 예루살렘을 회복하기 위한 성전(聖戰)에 참여한 자는 모든 죄들을 사해준다는 것입니다. 결국 교황청이 사죄권을 갖게 된 것입니다.
1대교황이라는 베드로는 뭐라고 가르칩니까? 1:18, 헛된 행실에서… 19절, 그리스도의 피로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분명한 가르침에 왜 행실을 덧칠합니까? 사죄권을 독점해야 교황청이 세계 권력을 얻을 수 있고 헌신과 헌금을 거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가들은 이런 가르침에 대항해서 목숨을 걸고 싸운 것입니다.
그럼 우리 이야기를 합시다. 초대교회에 들어온 또 하나의 사상이 반(反)율법주입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행위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 것도 행위가 아니니 행위는 구원문제에도 별 문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반율법주의는 율법주의와는 반대로 동기는 좋은데 행동이 나쁜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냥 속죄함을 입었다고 합니다. 교리는 좋아요, 그 다음에 용서를 받은 사람의 행위가 없고 은혜를 누리는 사람의 다음 행동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결정적인 잘못입니다. 동기는 좋은데 행위가 안 좋습니다.
이런 주제를 다룬 영화가 <밀양>이고 이번에 나온 이정향 감독의 <오늘>입니다. 자신의 생일날 약혼자를 오토바이 뺑소니 사고로 잃은 다큐멘터리 PD 다혜는 용서하면 모두가 행복해질 거라는 믿음으로 가해자 소년을 용서하고 1년 후 용서라는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고 다양한 사건의 피해자들을 찾아다니며 촬영을 시작합니다. 촬영이 진행될수록 자신이 용서해준 17살 소년을 떠올리게 되는 다혜. ‘착하게 살고 있겠지’ 라는 생각으로 담담히 촬영을 진행하던 중 우연히 전해들은 그 소년의 비행에 커다란 충격에 빠집니다. 소년이 더 큰 범죄를 저지르며 피해자들이 생긴 것입니다. 용서해주지 않고 감옥에 보냈으면 무고한 희생자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용서의 경우 ‘용서도 때로는 죄가 된다’라는 또 하나의 딜레마가 나옵니다. 그래서 영화 속의 다혜는 “용서해준 것이 죽도록 후회됩니다.” 라고 자조 섞인 말을 합니다.
<오늘>에서 다혜를 연기했던 송혜교씨도 인터뷰에서 이렇게 털어놨습니다.
“용서는 잘해보자는 화해의 제스처이고, 항상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용서가 때에 따라서는 최악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걸 이번 영화를 통해 생각해 보게 됐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무조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었으면, 그래서 이신득의-의인의 신분을 얻었으면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답게 살아야 하잖아요? 은혜를 남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차라리 행위구원을 말하는 로마가톨릭 사람들이 오히려 더 신사적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들을 칭찬하고 진짜인 줄 아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에 대한 바른 가르침이 <로마서>이고 갈라디안주의에 대한 경고가 <갈라디아서>이고 반율법주의에 대한 가르침이 <야고보서>입니다. 우리 교개혁주의교회에 필요한 것이 야고보서입니다. 우리 믿음이 행위로 가야 합니다. 이행득의(以行得義)는 아닌 이행득성(以行得聖)-행위로 성화된다는 야고보의 말씀을 우리 것으로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교회가 삽니다.
3. 만인제사장
종교개혁의 제3원리는 만인제사장입니다. 만인제사장은 이제는 누구라도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직접 기도로 나갈 수 있고 세상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사역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화해사역이 기도이고 전도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가들은 왜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만인제사장을 주장했을까요? 교황청이 성도들에게 있는 제사장신분을 숨기고 다시 구약종교로 돌려버린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가르침이 변질된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보세요! 예수님만이 우리의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은 우리 대신에 하나님께 나아가서 죄사함과 기도를 해주는 신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죄의 휘장, 장벽이 제거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직접 기도하고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일대일의 직접 교제를 나눕니다. 예루살렘교회가 로마로 들어가면서 로마에 있던 기성의 바벨론종교와 혼합이 되면서 제사장 신분이 특별한 신분들에게 한정을 시켜버렸습니다. 사제들만이 제사장이고 사제나 성인들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중의 최고의 중보자는 마리아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이건 아니거든요. 1대교황이라는 베드로는 2장 9절, “…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우리가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3절, “너희도…거룩한 제사장이 되라.”고 합니다. 이보다 더한 성경적 기준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럼에도 로마교황청은 왜 이렇게 뻔한 것을 갖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할까요? 그래야 교황청은 만세반석이 됩니다. 고해성사는 무서운 것입니다. 죄를 고해놓으면 모든 신자들이 교회에 꽉 잡혀서 꼼짝 못합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종교적 천재집단입니다.
그러면 다시 우리 이야기입니다. 만인제사장을 믿는 우리는 기도합니까? 세상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합니까? 제사장은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옷으로 구별하고 신분으로 구별합니다. 그렇게 구별된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그래도 뭔가 다른 사람, 우리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그들보다 차별성이 있냐는 것입니다.
500여년 저쪽에 개혁을 한다고 나오기는 했지만 전통도 살리지 못하고 개혁도 못 되고 개악(改惡)의 프로테스탄트가 되어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교황청의 권위를 비판하면서 우리는 그보다 더 한 권위를 행사하려고 합니다. 뭐가 뭔지 모를 지경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 494주년을 맞는 우리는 감사함과 부끄러움이 있는 것입니다.
<결론>
미국의 월간잡지인 <라이프>지는 1000년~2000년 사이의 천년(밀레니엄)을 만들어 낸 1백대 사건과 1백인의 인물을 선정, 발표했습니다. 1백대 사건 중 1위는 1455년 독일 대장장이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로 성경을 인쇄한 일이고 콜럼버스의 신대륙발견(1492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1517년)이 뒤를 잇고 있습니다.
가장 위대한 인물로는 전기를 발명해 인류에게 빛을 준 에디슨, 미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 종교개혁의 마르틴 루터 순으로 선정했습니다. 세상도 종교개혁이 지난 천년 동안 인류역사에 미친 공헌을 굉장하게 다루는데 정작 우리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살리지 못합니다.
종교개혁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큰 선물입니다. 죄성을 지닌 인간은 갈수록 나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계속 개혁해야 합니다. 종교를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개혁해야 합니다. 옛말에도 수신제가치국평천하( 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하지 않습니까? 나를 개혁해 나가는 일이 교회개혁이요 우리 사회의 개혁입니다. 나 하나로 시작되는 개혁, 이것이 진정한 종교개혁의 의미입니다.
종교개혁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큰 선물입니다. 우리는 자랑스런 개혁주의 교인됨을 감사하면서 다시 시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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