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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신하의 믿음 (요한복음 4:46~54)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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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신하의 믿음

요한복음 4장 46~54절



<서론>

산부인과 분만실 앞에서 세 남자가 아내의 분만을 초조한 심정으로 기다립니다. 간호사가 나와 첫 번째 남자에게 말합니다. 축하합니다. 귀여운 쌍둥이 아빠가 되셨어요. 정말 우연의 일치군, 나는 쌍둥이빌딩(원본은 LG 트윈스팀)에서 일하는데… 잠시 후 간호사가 두  번째 남자에게 말합니다. 세 쌍둥이 아빠가 되셨어요. 이럴 수가! 나는 삼성에서 일하는데…

이 말을 듣던 세 번째 남자가 허연 얼굴로 주저앉았습니다. 아니? 왜 그러세요? 어디 불편하세요? 나는 칠성사이다에서 일해요. 그럼 우리 아기는 일곱 쌍둥이란 말인가요?(홈피)

웃으세요! 한국인은 하루에 대략 열 번 웃는데요, 시간은 90초! 웃음은 불평을 지우는 지우개, 웃음은 불만을 소화시키는 소화제, 웃음은 젊음의 회춘제입니다. 웃을 때 오장육부가 움직여 혈액이 잘 돌고 자연산건강, 자연산미인이 됩니다. 웃을 때 마음 문이 열립니다. 그것은 밥상 앞에서 밥맛을 돋우는 침과 같아요! 웃을 때 오늘 설교가 은혜 될 줄 믿습니다!

 

오늘 제목은 “왕의 신하의 믿음”입니다. 46절, "왕의 신하"는 헤롯 안디바의 신하입니다. 가버나움은, 수리아에서 애굽으로 지나는 도시로 왕의 신하는 관리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예수님과 헤롯의 관계는 좋지 않았습니다. 안디바가 이복동생 빌립의 아내-제수와 결혼한 것을 세례요한이 공격했고 헤로디아는 딸 살로메를 이용해서, 요한의 목을 벱니다. 예수님은 헤롯을 여우라고 했습니다(눅 13:32). 그 말을 헤롯이 들었겠고 좋은 관계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 전날에 심문(審問)을 받았던 왕도 바로 헤롯 안디바입니다(눅 23:7).

본문은 그 헤롯 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만나 믿음의 곁가지에서 점점 본질로 접근하면서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왕의 신하의 믿음은 어떻게 발전했을까요?

 

1. 왕의 신하의 1단계 믿음-예수님은 능력자다!(47절). 

왕의 신하는 대낮에 예수님에게 나왔습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산헤드린 공회의원, 로마식이라면 원로원 의원입니다. 의원이 70명 정도니, 대단한 신분입니다. 니고데모 의원이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밝은 대낮을 놔두고 왜 밤중에 찾아왔을까요? 낮에는 스케줄이 바빠서 밤에 왔을까요? 서늘한 밤에 토론하기를 좋아하는 유대인의 관습을 좇아 밤에 왔을까요? 뭔가 주변 눈치를 살피는 느낌을 줍니다.

당시 예수님은 요주의(要注意) 대상입니다. 공회도 주목하는 인물을 공개적으로 만나면 구설수에 오릅니다. 요즘 고위공직자들이 누구랑 밥을 먹었느니, 골프를 쳤느니, 하는 구설수로 사퇴하는 일이 있습니다. 니고데모도 그런 시선이 두려워 밤에 찾아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왕의 신하는 대낮에 찾아왔습니다. 가버나움은 별로 큰 동네는 아닙니다. 고대도시가 다 그렇잖아요? 무슨 일이 일어나면 한 시간 안에 소문이 쫘악~ 퍼집니다. 예수님을 대낮에 찾았다는 것은 자기 지위에 연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리 절박했을까요?

니고데모는, 예수가 유대를 로마에서 해방시킬 수 있을까, 백성이 봉기할 때 중심에 설 마음이 있을까? 영적문제를 해결할 구세주인가? 여러 의중(意中)으로 밤중에 찾아왔습니다. 


왕의 신하가 왕의 노여움을 각오하면서 대낮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아들문제 때문입니다. 46절, "그의 아들"은 원어에는 관사(冠詞)가 있어 “그 아들”-"외아들"입니다. 그 외아들이 병에 걸려 생명이 위태롭습니다. 47절. “내 아들이 거의 죽게되었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여기까지 왔겠어요? 중병(重病)입니다. 의원이 고칠 병이라면 공직자 신분에 나왔겠어요? 자식이 죽게되니 신분불구하고 나온 것입니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 없고 자식을 위해 희생하지 않는 부모가 없습니다. 왕의 신하는 확신을 갖고 왔어요! 가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들었다는 소식을 갖 들은 것입니다. 그런 능력이 있다면 아들 병을 고쳐줄 수 있습니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나요? 이적으로 병을 고치는 능력자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부탁합니다. 47절, 우리 집에 오셔서 아들을 고쳐주세요! 호칭이 그냥 선생님 정도에요. 예수씨, 예수선생, 물을 포도주로 만들던 그 능력으로 아들 병을 고쳐주십시오!

왕의 신하는 예수님과 어떤 인격적 관계도 원치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살 생각도 없고 믿고 따라다닐 마음은 더욱 없습니다. 아들의 병을 고쳐주기만 하면 됩니다.


믿음의 종류 중에 이적 신앙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격이나 구속사역에는 관심이 없고 그냥 병을 고침 받고 축복 받으면 된다는 종교적 믿음입니다. 왕의 신하가 그런 믿음입니다.

왕의 신하가 여기서 끝났다면, 종교 교인은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말을 빌린다면,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얼마든지 좋은 생각은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용서, 섬김…을 말하고 존경합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과 아무런 인격관계를 갖지 않습니다. 종교가(宗敎家) 정도로, 4대 성현의 한 분 정도로 압니다. 왕의 신하가 그런 단계입니다.

여러분 중에 초보단계의 분들은 없습니까? 예수님을 종교가 중의 한 분으로, 병을 고치고 축복이나 주는 대상으로 관계를 갖고 있다면 거듭난 교인이 아니라, 종교 교인입니다.

 

2. 왕의 신하의 2단계 믿음-예수님은 선지자다!(49절)

헤롯 안디바 신하의 요청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48절, “꼭 내 손으로 행하는 이적을 보아야만 나를 믿겠느냐?”

당돌한 반응입니다. 왜 나를 믿지 못하느냐, 왜 능력을 시험하느냐? 그런 뜻이잖아요? 왕의 신하가 네 이놈! 화를 낼 것 같은데 오히려 예수님의 권위 앞에 겸손하게 대응합니다. 모든 게 해피앤딩으로 끝나려니 왕의 신하가 제대로 처신을 한 것입니다.

49절,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님에 대한 호칭이 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호칭도 없이 명령조의 부탁을 하더니 지금은 주여! 라고 합니다. 주여! 는 선생님, 나의 주인,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라는 뜻입니다. 상당히 믿음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능력에서 예수님의 인격으로 이동합니다. 아들과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아들과 자신과 예수님과의 삼각관계로 확장됩니다. 예수님께서 아들을 보아주기를 부탁했는데 지금은 나를 보아주기를 기대합니다. 1단계에서는 아들의 병만 고쳐주면 거래는 끝납니다. 나중에 왕이 알고 공직자의 체면에 어떻게 예수에게 나가서 부탁할 수 있더냐, 는 책망에 아들 병 때문에 그랬다, 그것뿐이다, 예수님에 대해 믿음을 고백한 적도 서약한 적도 없다, 고침 받고 돌아왔다, 아니면 고쳐주지 않아서 그냥 왔다. 아들의 목숨 때문에 그랬다, 이후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렇게 변명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을 멀리서 바라보던 자리에서 가까이 바짝 따라붙었습니다. 예수님을 주여! 선지자라고 합니다. 충격입니다. 헤롯 왕의 귀에 들어갈 것이고 파면 당할 수도 있습니다. 결과를 알면서도 주여! 합니다. 일반적으로 선생님, 하는 말과 다릅니다.

 

왕의 신하의 믿음이 능력과 축복을 구하는 단계에서 명예와 지위와 목숨을 거는 단계입니다.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고 어떤 행동을 하고 있고 주여! 라는 호칭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압니다. 그럼에도 담대히 주여! 한발 더 나간 대접을 합니다. 성령이 역사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신하를 귀하게 여겨 그의 믿음을 한 단계 올리시는 것입니다. 그의 인생에 예수님께서 관심을 갖게 되는 순간입니다.  


여기에서 끝났다면, 종교적인 그리스도인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역사적 믿음, 혹은 지식적 믿음이라고 합니다. 알건 다 압니다. 부지런히 성경을 배우고 지식적으로 접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통치를 받지 않습니다. 머리로는 받는데 생활에서는 자주 인정하지 않습니다. 설교나 성경공부를 지적인 만족으로 생각합니다. 머리만 채워주면 아 은혜를 받았다 말합니다. 아는 것이 신앙이라고 판단합니다. 위험한 지성주의 믿음입니다.

바울의 말을 빌린다면,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아직도 육신에 끌려 다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육신은 본성 본능 자아 고집, 인본주의…입니다. 무늬만 그리스도인입니다. 항상 내가 결정권을 갖습니다. 아직도 믿음의 중심에 내가 있습니다. 그래서 더 나가지를 못합니다. 나를 내려놓고 나를 포기하고 나를 주님께서 쓸 수 있도록 양도하지 못합니다. 나의 강함 때문에 주님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처럼 그냥 동행자에 불과합니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폴 투루니에는 행복하지 않는 결혼의 3단계 주기를 말합니다.

*밀월 단계-일심동체 단계로 그야말로 알콩달콩 깨가 쏟아집니다.

*현실 직면 단계-사랑은 이미 식어 버려 정서적 이혼상태입니다. 한 지붕 두 가족입니다.

*체념 단계-"다른 도리가 없지 않은가?"(체념형) "남이 부끄러워서라도 살아야지" (체면형) "자식을 위해 십자가를 져야지" (책임형), 대부분 그렇게 살지만 아쉬운 인생살이입니다.

주님과의 관계, 교회와의 관계가 1단계 2단계라면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예수님과의 두 번째 단계는 믿기는 믿되 재미가 없습니다. 그냥 사는 것이고 그냥 교회 다니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두 번째 단계에서 더 나가지 못하는 경우는 없습니까? 예수님과 다시 밀월단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을 느낍니다. 그러려면 3단계 믿음으로 올라서야 합니다.

 


3. 왕의 신하의 3단계 믿음-예수님은 구원자다!(53절)

왕의 신하는 체면을 무릅쓰고 나왔고 공개적으로 주여!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만한 대접을 하십니다, 50절, “당신의 믿음으로 당신의 아들이 깨끗해졌소!” 큰 선물입니다.

그랬더니 왕의 신하는 그냥 믿습니다. 50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말씀을 믿은 것입니다. 말씀을 믿은 것은 말씀하신 분의 인격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53절, “자기와 온 집안이 다 예수를 믿으니라” 구원자로 믿은 것입니다. 처음에는 병을 고치는 능력자로 알았습니다. 여차하면 발뺌 하고 아무런 관계없이 살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믿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걸어간 것입니다. 아들의 병을 고쳐주면 함께 가고 고쳐주지 않으면 떠날 것입니다. 일시적인 동행, 임시적인 믿음입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었습니다. 나를 구원해 주시는 분, 구원자로 믿었습니다. 어떤 손해나 박해를 받아도 내 속에 예수님을 모시고 함께 하려는 헌신된 믿음입니다.

1단계는 예수님과 아들의 문제입니다. 2단계는 아들과 나와 예수님과의 삼자문제입니다. 3단계는 아들은 빠집니다. 53절, 이제는 병이 아니라 구원문제로 나와 예수님과의 일대일 문제입니다. 구원문제는 항상 개인적입니다. 일대일의 내밀한 고백관계로 하나가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 한 아버지가 귀신에 걸린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에게 나와 고쳐달라고 애걸합니다.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아버지는 현재의 상황을 아들과 예수님의 문제로 봅니다. 예수님께서 “그게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예수님은 이 상황은 너와 나의 문제라고 관계를 분명히 합니다. 아버지는 예수님의 의도를 알았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22~24절)

아버지는 다급한 상황에서 아들을 뺍니다. 아들과 예수님의 문제에서 나와 예수님 문제로 구도를 변경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나와 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남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게 아니라 나와 예수님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대해 이리저리 말합디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내 생각이 중요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단순히 능력자로 알고 있느냐, 선지자, 성현(聖賢) 정도로 알고 있느냐? 나의 하나님 나의 구세주로 안다면 믿음의 정상지점에 선 것입니다.

 

이 단계를 바울의 말을 빌린다면,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자기주장이 사라지고 성령의 통치가운데로 들어갑니다. 머리로 배운 성경지식을 마음으로 받아들여 생활신앙으로 나갑니다. 무늬만 아니라 피도 뼈도 살도 사상도 온통 그리스도인입니다. 주님에게 결정권을 드린 거듭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믿음을 구원받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런 믿음을 갖고 살면 내가 주님의 생애가 됩니다. 주님의 능력이 내 능력이 됩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도달해야 할 믿음의 고지(高地)입니다. 이 고지(高地)에 오른 사람들만이 깊은 바다에서 헤엄을 치는 예수 맛을 알게 됩니다. 왕의 믿음이 여기까지 전진한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살기를 기원합니다!

 


<결론>

요한복음 5장에는 상류층 인생과 하류층 인생이 동시에 등장합니다. 하류인생은 앞부분에 있는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입니다. 남편이 다섯이 있던 여인, 지금 여섯 번째 남자와 살지만 언제 헤어질지 모릅니다. 남자중독증에 걸린 이 여인은 하류인생입니다.

이랬던 여인이 예수님과 대면하며 서서히 변화를 보입니다. 처음에는 유대인 남자로 봅니다. 불편한, 용서하십시오, 남자새끼들로 봅니다. 9절, 당신은 유대남자로서 어찌 개 취급을 하는 사마리아 이네 몸에게 물을 달라하십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누군 줄 알면 오히려 생수를 달라고 내게 요청했을거다! 그 말씀에 여인의 두 번째 호칭이 달라집니다. 11절, 15절, 주여! 물을 길을 그릇도 없고 우물도 이렇게 갚은데 어디에서 내게 생수를 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을 잇습니다. 내가 주는 물이 생수다! 남편을 불러오라! 지금 사는 남편도 진정한 남편이 못된다. 네 남자 중독을 치료해라! 그래야 목마르지 않는다. 여자는 눈이 커지며 외칩니다. 당신은 선지자입니다!(19절).

 

여인은 계속 성장합니다. 끝내 마을로 달려가면서 외칩니다. 29절,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리스도는 메시아입니다. 결론은 무엇입니까? 39절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은지라” 왕의 신하처럼 “그녀와 그 집안이 다 예수님을 믿으니라!”를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왕의 신하의 믿음과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의 믿음이 같이 갑니다. 예수님을 알아가는 데는 남여 성별의 차이가 없습니다. 빈부가 차이, 귀천의 차이, 나이 차이도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처음에는 이적 신앙으로 출발합니다. 거기에서 종교적 믿음으로, 말씀에 은혜를 받는 단계로 넘어갑니다. 결국은 구원의 주님으로 영접하게 됩니다. 이것이 살리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이 베드로처럼 “영생의 말씀이 여기에 있으매 우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라고 고백하며 헌신하며 행복해 하는 밀월의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지금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더 나은 영적 믿음의 단계로 성장하고 성숙해 가는 믿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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