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맛보자!
시편 34편 8절
<서론>
추석 전에 데이비드 그레고리가 쓴 <라스트 크리스천>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의 배경은 2080년대, 앞으로 70년 후 미국에 크리스천이 있을까, 하는 미래예측 스릴러입니다. 결론은 3천 년대(代)가 되면 청교도들의 국가 미국에는 크리스천이 거의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뇌(腦), ‘brain’을 실리콘 형태로 다운로드하는 두뇌 이식수술이 완성되면서 죽음을 없앨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됩니다.
실리콘두뇌는 하나님을 인식은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도 압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신화일 뿐, 믿지를 못합니다. 신앙인들도 뇌를 이식해 버렸기에 믿음도 함께 사라집니다. 뇌를 이식하지 않는 소수의 크리스천들도 견디기 힘들어 집니다. 남들은 뇌를 이식해서 500년 천년… 수명이 연장되는데 혼자만 100년 정도 살고 죽는다… 겁도 나고 천국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니 뇌이식 수술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라스트 크리스천’입니다.
소름이 쫙! 끼쳤습니다. 불신세대가 온다는 것은 받아들이지만 인간이 뇌를 이식하는 수준까지 가고 구원 받을 영혼이 없어지기에 믿음자체가 사라지게 되고 하나님 신앙도 지구에서 말살 된다… 앞으로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예측에서 소름이 끼친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뇌(腦)를 이식하고 하나님을 예배할 영혼이 과학자들의 손으로 없어지는 세대가 오기 전에 빨리 천국으로 가야합니다. 그래야 영혼이 육체가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을 맛보자, 라는 제목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1. 하나님을 맛보되 경험해야 합니다.
모든 사물에는 맛이 있습니다. 생선들이 맛이 있고 과일은 제각각 맛이 다릅니다. 사람들도 맛이 있습니다. 언어의 맛, 인격의 맛, 지성의 맛, 개성의 맛… 그 사람만이 지니는 독특한 맛이 있습니다. 멋이라고도 해야지요. 여러분의 맛은 무엇일까요?
누구를 존경함은 누군가의 인격이나 인간성을 맛 본 것입니다, 누구를 사랑함은 누군가의 사랑을 맛본 것입니다. 그 사람을 맛보았기에 자꾸 생각나고 그립고 또 만나고 싶습니다.
평생 수천만 원을 주면서 좋지도 않는 술을 왜 마실까요? 술맛을 아니까 그래요, 몸에 좋지도 않는 담배 값으로 평생 수천만 원을 왜 허비할까요? 담배 맛을 아니까 그래요. 밤새도록 뭐가 재미있다고 낚싯대를 붙잡고 있을까요? 낚시의 즐거움을 맛보니까 그래요!
하나님도 그래요. 같은 설교를 들으면서… 각각 다릅니다. 왜 이렇게 시간이 지루하냐… 왜 이렇게 짧으냐… 하나님을 맛본 사람과 하나님을 맛보지 못한 사람의 차이입니다.
부부간에도 맛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가 나쁘다고만 할 수 없어요. 맛이 없는데요, 맛을 내주지 못하는 데요… 맛은 나오는데 쓴맛이 나옵니다. 그래서 맛이 없으니 살기는 하는데 사랑하지 못하고 좋아하지 못합니다. 부부라고 사랑해야 한다, 말은 맞는데 안 되는 걸 어떻게 해요? 서로가 잘 해야 해요. 맛을 보여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일편단심 하나님만을 사랑했습니다. 상(賞)을 받을 때도 좋아했고 벌을 받을 때도 하나님께 나갔습니다. 우리는 무서우면 도망가잖습니까? 다윗은 ‘하바라기’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말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라”
어떤 하나님을 맛보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선하심에는 항상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 우리의 죄까지도 품으시려는 어머니의 마음,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 이런 좋은 것들을 맛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맛보는 정도가 아닙니다. 맛보아 알라! ‘안다’는 것은 체험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단어 ‘야다’는 하나가 됨을 말합니다. 아담이 하와를 알았다, 라는 말은 아담이 하와의 맛을 보았다는 이야기고 육체적인 결합을 통해 가인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경험입니다, 하나님을 맛보면서 하나님의 깊은 세계-사랑과 긍휼과 자비를 경험했기에 갈수록 더 열정적이 되고 더 헌신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냥꾼의 총에 죽어가던 새끼 호랑이를 동자승이 데려다 키웠습니다. 정성을 다하였더니 새끼호랑이가 살아났고 길이 들여져 초식(草食)동물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동자승이 실수해서 손가락에서 피가 났습니다. 피가 아까우니까 호랑이에게 물렸습니다. 호랑이가 빨아먹는데 피 맛이 기가 막힙니다. 육식(肉食) 본능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손가락을 뜯어먹고 동자승을 잡아먹고 절간 스님을 모두 잡아먹습니다. 호랑이는 피 맛을 알고 고기 맛을 안 것입니다. 피 맛을 아니까 은혜를 알면서도 잡아먹은 것입니다. 맛을 안다는 것은 이렇게 강렬합니다. 논리와 본능, 지성을 넘는 엄청난 에너지가 발생하게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맛보는 선에서 만족 말고 알라! 경험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면 엄청난 힘을 공급받고 선하심을 알고 행복과 즐거움의 에너지를 공급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하나님을 떠납니까? 하나님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맛을 모릅니다. 제자들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축복을 경험했지만 모두 주님을 떠났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나를 떠나려느냐?” 말씀하셨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예수님 말씀의 맛을 안 것입니다. 그 맛을 알았기에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왕 예수님을 믿을 것 맛도 보지 못하고 건성으로 힘들게 믿지 말고… 늘상 의심하면서 믿지 말고 맛을 알되 진하게 경험하면서 믿는 믿음생활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2. 하나님을 어떻게 맛볼까요?
신랑신부가 결혼하면 그날부터 행복을 기대합니다. 부부가 되었으니 얼마나 행복할까요? 그러나 행복을 원한다면 차라리 평생 연애하면서 사는 게 좋아요. 결혼은 두 시내가 합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물살이 세요, 평생의 부부싸움을 결혼 5년차에 절반 이상 하게 됩니다.
싸우면 헤어지잖아요? 안 헤어집니다. 서로의 맛을 보게 됩니다. 연애할 때는 맛보지 못했던 다정함과 따뜻한 마음을 맛봅니다. 그러면서 알아갑니다.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어려움도 서로 간에 힘이 되고 극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맛보는 방법도 그래요.
㈀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가면서 하나님을 맛보고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제가 스릴러를 그리 좋아하지만 두 번 읽는 책은 없어요. 영화는 두 번을 보아도 책은 한 번이면 끝납니다. 삼국지도 수호지도 그래요, 성경은 67독을 했습니다. 설교재료를 찾으려고 읽는다면 그렇게 못 읽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의 다른 맛들을 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주권과 인애를 맛보게 됩니다. 성경은 정보가 아니라 뉴스에요. 그래서 다윗은 말씀이 꿀송이보다 더 달다고 고백합니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정말 그렇다는 것입니다.
㈁ 기도. 다윗은 위기상황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맛봅니다.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4절). 평안할 때는 맛보지 못하고 경험할 수 없었는데 고통 가운데 하나님을 맛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론적 신앙이 아니라 체험적 신앙-무릎신앙으로 하나님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곤고함에서 하나님을 맛보아야 합니다, 6절의 ‘곤고한 때’는 어느 곳 하나 기댈 곳 없을 때를 의미합니다. 인간의 맛을 볼 수 없을 때 바로 하나님을 맛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맛난 나물만 좋은 것이 아닙니다. 쓴 나물도 몸에 좋아요. 쓴나물이 식욕을 일으킵니다. 쓴 약이 몸에 좋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고통에서 맛보는 하나님이 진짜입니다.
㈂ 지속적인 교제. 맛을 알려면 음미해야 합니다. 저는 사탕을 넣자마자 우두둑 씹습니다. 사탕은 빨아먹는 거예요. 한꺼번에 꿀꺽 삼키면 제대로 맛을 모릅니다. 누군가를 맛보려면 충분히 시간을 두고 음미해야 합니다, 음식을 음미하듯, 시를 음미하듯이, 음악을 음미하듯이 사랑하는 사람을 음미하듯이 하나님을 음미하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동적(動的)입니다. 하나님조차 리모콘신앙으로 접근합니다. 핸드폰이 있어서 신앙이 너무 얄팍해졌습니다. 예배드리다가도 핸드폰만 오면 먼저 챙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맛보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깊이 사귀어야 합니다. 깊은 사귐이 하나님의 맛을 더욱 맛보게 합니다. 사람도 깊이 사귀어야 합니다. 장맛처럼 깊은 맛을 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위(胃)가 네 개라는 소처럼 씹고 떠 씹으면서 묵상의 신앙이 하나님을 깊이 맛보게 됩니다.
3. 하나님을 맛본 자의 삶은 어떠해야 할까요?
랍비 네 명이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여 주소서!” 기도했습니다. 랍비들은 동시에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벤 아자만 랍비는 하나님을 만나자 말자 죽었습니다. 죄가 있었을까요? 벤 소마 랍비는 하나님을 만나자 말자 미쳐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담을 용량이 모자랐을까요? 랍비 아헬은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고 교만해져서 이단이 되었습니다. 아캄 하만 랍비는 하나님을 경험한 후 더 열심히 기도하고 헌신합니다.
하나님을 맛보아 안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교만해지고 이단으로 빠지고… 맛보았다 자랑만 하고 하나님을 맛본 사람의 생활을 보여주지 못하면 스스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 찬양. 하나님을 맛보아 알게 된 다윗은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1절에서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찬양은 하나님을 높이는 일이며 하나님으로 기뻐하는 일이며 2절,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자랑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맛보니까 하나님을 경험하니까 너무 좋으니까 찬양으로 홍보하고 ‘PR’하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 볼 때…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 기쁨. 찬양은 기쁨입니다. 여호와를 맛보아 알게 된 사람은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얼굴에 즐거움이 잘잘 넘칩니다. 천사의 얼굴은 기쁨 자체입니다. 천사도 영이고 하나님도 영이기에 육체인 우리보다 훨씬 더 깊이 압니다. 그러니 찬양하는 천사들은 밝은 얼굴입니다.
하나님을 맛보았나요? 증거를 내놓으세요! 얼굴에서 즐거움이 잘잘 흘러나와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40일 대면하고 얼굴 거죽에서 빛이 흘러나오는데 백성들이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많이 맛보고 알았으면 맨 얼굴에서 빛이 나오고 눈이 부셨겠어요? 스데반은 그랬습니다!
㈂ 거룩.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면 점점 거룩해 집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찾아오실 때 신을 벗으라고 합니다. 신발은 죄를 상징합니다. 이 말은 거룩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날 수록 점점 더 거룩해집니다. 우리가 거룩해지지 못하는 것은 맛만 알지 강력한 거룩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전파. 8절에서 다윗은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고 했습니다. “맛보아 알라”. 두 개의 동사는 2인칭 복수형이자 명령형입니다. 다윗이 말하기를, 내가 경험한 하나님을 너희도 경험해 보라는 뜻입니다. 혼자만 독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에게 전파합니다.
㈄ 평생 경외. 하나님 맛을 본 사람은 평생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살게 됩니다. 선하심을 맛봤기 때문입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6) 다윗은 평생 하나님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 사랑이 너무 좋고 그 사랑이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결론>
송년 파티에서 좋아하는 성구를 낭송하기로 했습니다. 유명한 배우가 웅변술과 연극적인 기교로 시편 23편을 낭송하자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뒤를 한 노인이 같은 내용을 낭송했습니다. 낭랑하고 멋있지는 않았지만 깊은 체험에서 우러나는 그 시편은 감동적인 고요함으로 방안에 충만했습니다. 낭송이 끝나자 시편을 낭송한 배우가 일어나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시편 23편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 목자를 알고 계시는 군요.”
그래요, 노인은 오랜 세월 기쁨도 슬픔, 즐거움과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가면서 하나님을 맛보고 얼마나 선하신 분인지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을 깊이 알았습니다. 그 경험이 모두에게 울림이 된 것입니다.
앞으로 하나님을 맛볼 수 없는 세대, 하나님을 알기는 하는데 그림의 떡처럼 감동이 없는 세대, 감격할 수 없는 시대가 옵니다. 하나님을 제외시킨 채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이 가능해지는 미래가 온다면, 우리는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게 될까요? 그것은 단순히 기독교의 소멸보다 더 커다란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나 인애를 모르고 산다는 것, 끔찍합니다.
그런 세상이 오기 전에 충분히 하나님을 맛보고 경험하고 자녀들에게 일편단심의 믿음을 전승하고 가야합니다. 그래야 과학적 유혹이 왔을 때에 나는 뇌이식수술은 하지 않겠소, 나와 우리 집은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겠소… 라는 신앙세대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맛보세요! 하나님을 더 많이 경험하세요!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은 중독이 없습니다. 그러니 탈이 나지 않아요! 하나님의 사랑과 인애가 우리를 항상 감동시킬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도 너무 좋아서 너희들도 하나님을 맛보아 알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맛보는 자 하나님을 더 많이 경험하게 되고 내게는 맛있는 인생, 남에게는 멋있는 인생으로 살게 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