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령(聖靈)이 임하시면
사도행전 1장 6~11절
<서론>
이번에 제주도선교 갈 때 전기면도기를 가져갈까, 하다가 동생 것을 빌려 쓰려고 그냥 갔습니다. 면도기를 찾았더니 동생이 작년 8월에, 형님이 쓰고 간 이후 그냥 두었는데 배터리가 괜찮을지 모르겠다며 건네줍니다. 약이 없겠다, 하면서 면도기를 켰더니, 우와~ 10개월이 지났는데 ‘썬파워’입니다. 면도기는 손바닥반(半)만한데 3일을 잘 썼습니다.
면도기를 사용하면서 생각했습니다. 나도 주님께서 쓰려할 때 항상 충만한 상태일 수는 없을까? 야곱은 7년을 수일같이 지냈고, 전기면도기는 8개월을 계속 충전상태였는데 우리는 수일을 7년처럼 지지고 볶고 하루에도 열두 번씩 변덕 부리면서 기분 내키는 대로 살고 있지는 않는가… 충전되어 있는 전기면도기는 내게 영적교훈을 주었습니다.
왜 우리는 항상 성령의 충만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할까요? 예배할 때 보면 모두 성령 충만한 것 같은데 예배가 끝나면 충만도 끝납니다. 예배가 생활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나아가서 믿음과 기도가 사역이 성령 충만으로 이어지고 성령 충만은 성품과 인격으로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성령의 열매가 없습니다. 설교하고 또 설교를 해도 자기 성품의 한계에서 꼼짝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에게서 성화의 과정들이 보여야 할 텐데 성화가 아니라 성격들만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생활은 어제나 그제나 10년 전이나 오늘이나 항상 도루묵입니다.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 왕이 피난 가다 '묵'이라는 생선을 먹었습니다. 왕은 너무 맛있어 “은어”라는 이름을 내려줍니다. 전쟁이 끝나고 왕은 그 때 먹었던 '묵'이 생각나서 '묵' 생선을 찾았습니다. ‘묵’ 생선이 올라왔는데. 맛이 없습니다. 선조가 "이 생선, 은어가 아니라 도로 ‘묵’이라고 해라!" 해서 도루묵이 되었습니다. 이게 우리 신앙생활이 아닐까요?
오늘 성령강림절입니다. 한국교회에서 삼위일체 하나님 중 가장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도 가장 왜곡된 대접을 받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한국교회가 도루묵의 신앙생활을 반복하는 것은 결국 성령님과의 관계가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다스림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부려먹는(?) 왜곡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1. 성령님은 사도행전적 권능과 요한복음적 권능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 열렬히 환영받는 성령님은 대체적으로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도행전의 성령은 폭발하는 성령입니다. 바위를 터트리고 부수는 다이너마이트 같은 폭발력입니다. 다이너마이트는 고성능 폭약으로 광산, 탄광, 토목공사… 등에 이용됩니다. 너무 강해서 탄광용에는 소금… 등을 섞어서 폭발 온도를 내린 것이 사용됩니다.
성령님께서 강림하실 때 그 힘이 얼마나 강한지 120명 공동체가 성령의 충만을 입었습니다. 완벽하리만큼 성령에게 사로잡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회개했고 방언했고 귀신을 쫓아내는 강력한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은 사람들은 담대했습니다.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불덩이가 되어 가는 곳마다 거룩한 불을 질렀습니다. 하루에도 5천 명씩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다이너마이트 같은 폭탄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불덩이가 되어 종횡무진 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불같은 설교로 5천명씩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베드로는 폭탄처럼 보였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성령 역사입니다.
한국교회가 이런 성령 충만을 가르쳤고 사모했습니다. 그러자 성령을 받고 뒤집어지고 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런 사도행전식 성령의 권능으로 거듭났고 예배당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성령 역사 전부가 아닙니다. 성령 역사에는 서서히 변화를 이루어가는 은밀한 역사가 있습니다. 다이내믹(dynamic)한 역사입니다. 다이내믹은 조용하게 일어나는 역동적인 변화입니다. 바위를 단번에 깨는 힘이 다이너마이트 사도행전의 성령이라면 바위 속에 소나무 씨앗 하나가 떨어져 수백 년을 지나면서 뿌리가 뻗고 … 바위가 금이 생기다 어느 날 엄청난 바위가 꽝~ 하고 깨져 내리는 것, 이것이 다이내믹한 성령의 역사입니다. 주로 요한복음에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장차의 성령역사가 다이내믹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의 역사가 은사를 중심으로 하는 능력의 역사, 사역의 역사, 일의 역사라면 요한복음은 인격을 변화시키며 성숙시키는 성결의 성령역사입니다. 요한복음 식의 성령역사가 밑바닥에, 인격 속에 녹아내려야 성령역사가 권능이 됩니다.
2. 한국교회는 요한복음의 성령역사를 외면했습니다.
사도들은 엄청난 권능을 발휘하면서 그게 단순히 사역이 아니라 믿음으로 인격으로 승화시켜 나갔습니다. 그래서 자기성질이 나타나던 제자들이 거룩한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의 성령으로 자신들을 다스렸고 성령의 충만을 인격화하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만약에 거룩하게 변화되는 성결의 영 성령님의 지배를 받지 않고 종교적인 열정과 권능에만 사로잡혔다면 신앙 따로 생활 따로, 권능 따로 인격 따로… 존경받는 사도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120년이 지나면서도 성숙하지 못한 것은 지나치게 사도행전식의 성령역사를 강조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방언하고 기도회 때에 열정적이고 귀신을 쫓아내고… 담대한 모습으로 전도하고… 대단합니다.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예수 믿으라! 소리칠 수 있는 것은 보통 담력이 아닙니다. 이것을 광신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성령충만한 상태에서 하는 신실한 분들도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성령으로 충만해서 이런 일을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분들이 점차 성숙해야합니다. 지하철에서 전도하고 복음을 외치는 분들이 주변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하거든요. 예수님을 닮아내는 인격이 더 성장하고 성숙해서… 말을 막~하던 사람이 말을 가리고 쉽게 거짓말하던 사람이 거짓말 말고… 부정적인 사람이 긍정적이고 되고… 내면의 변화가 조용히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성령역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6장에서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할 일을 방언이나 귀신을 내쫓은 역사나… 이런 등등의 역사를 말씀하시기 전에 성령이 오시면 세 가지를 하신다고 했습니다(8~13절). 죄(罪)에 대하여. 의(義)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알려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역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 성령이 임할 때 인격에서 일어나는 성품사역입니다.
바울도 성령사역의 중심을 성령의 열매라고 말했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 이게 다 성품이고 성품을 통해 성화가 됩니다. 성화는 성령의 사역입니다.
이 열매는 예수님과 연관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게 붙어 있어야 과실을 많이 맺는다고 했습니다. 과실은 바로 인격의 열매입니다. 인격 열매가 많이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요? 나에게 붙어 있어야! 예수님의 인격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이 공급담당이 성령님입니다. 그러기에 제대로 된 성령님의 다스림은 인격적인 변화가 나타나야 합니다.
왜냐? 성령님은 다이너마이트처럼 강력한 분이기도 하지만 성령님은 우리 속에서 점진적으로 인격을 변화시키고 성숙해 가시는 다이내믹한 성령님입니다. 우리는 성령님! 하면 성신(聖神)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그렇게 칭했어요. 성신이 오셨네~ 불렀어요. 성신의 개념은 신들린 개념입니다. 그래서 신이 들리면 뭐에 씌고 날뛰고 흥분하고 소리 지르고… 방언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뭔가 외부에서 강력한 힘들이 솟구치는 것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신이라고 하지 않고 성령님이라 합니다. 성령이 오셨네~ 성령님은 누가 보냈나요? 내 주의 보내신 성령이 오셨네… 하나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성령님의 출처가 하나님이라면 금방 성령님의 속성도 알게 됩니다. 성부 하나님을 알면 성령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썬파워입니다. 엄청난 창조력, 파괴력, 통치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성령의 폭탄 능력입니다. 사도행전의 사람은 이런 성령을 받고 팔팔 뛴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혀 파워있는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능력만이 하나님의 속성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면서 거룩하신 분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1:45)고 하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파송하신 성령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거룩하신 분이고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님입니다. 그래서 영어로는 “Holy Spirit” 거룩한 영이라고 합니다. 한문의 聖靈(성령)도 거룩 성(聖)을 사용합니다. 성령님은 거룩한 하나님의 영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면 점점 거룩해집니다. 성화(聖化)되어 갑니다. 성화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을 말합니다. 왜 성령을 받으면 예수님을 닮게 되는가? 성령님은 예수님의 요청에 의해 성부 하나님께서 파송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속사역을 하셨는데 이것이 믿어지고 받아들이도록 다이너마이트 사도행전적 성령의 역사를 나타내고 구원 받은 이후에 예수님을 닮아내는 성화의 삶을 위해 다이내믹한 요한복음적 성령의 역사가 임하니까 우리 일생이 예수님 중심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령 받아서 충만하다는데 알고 보면 자기중심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성령으로 외부로는 대단한 것 같은데 안을 들여다보면 인격의 성숙이 없습니다. 요한복음의 성령역사가 갖추어지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다며 날뛰고 전도하고 목회하고 직분자가 되고… 그러니 한국교계가 영계가 어지러워지는 것입니다.
김진홍 목사님께서 그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목사님이 청계천에서 빈민목회를 하며 데모하다가… 안양교도소인가에 수감되었습니다. 한얼산기도원 이천석 목사님께서 집회를 오셨는데 이분에게 성령의 역사가 굉장히 강하게 나타납니다. 제가 그 분의 간증집을 썼는데 대단한 역사가 일어났어요. 한얼산에 오면 개(犬)도 방언을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성령역사들을 많이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혈기가 다 죽지 않았어요. 이 분이 상이군인이거든요. 화가 나면 고무다리를 빼서 막 휘두릅니다. 이런 분이 교도소에 와서 감방용어를 사용하면서 설교하니까 4,300명 죄수들이 엄청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다들 예수 믿고 나 같이 목사가 되어 쓰임 받고 대접을 받아! 목사 될 사람 손들어! 하니까 700명이 손을 들었답니다.
700명이 무슨 은혜를 받았어요? 사도행전적 성령은혜를 받았어요! 마치 베드로가 설교하니까 5,000명이나 회개하고 일어났던 것처럼 교도소에 그런 일이 일어났어요.
그러나 목사는 어떤 과정인가요? 사도행전의 뜨거운 역사, 강렬한 역사를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면서 요한복음의 성결하게 되는 역사로 성품이 다듬어지고 인격이 성숙하고 목회자질이 있나, 검증하고 소명을 확신하고… 그래서 검증된 신학교에서 목사가 되는 힘든 과정이 아닙니까? 이것이 요한복음의 성결의 성령입니다. 이런 역사를 체험하고 목사가 되어야 하는데 느닷없이 감방 대선배의 설교를 듣고 700명이 손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이런 식으로 700명이 목사가 되어 한국교회에서 활동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분들을 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분들 중에서도 진짜 좋은 목사가 되어 활동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목사의 길이 이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고문경관 이모씨 같은 경우, 나이 70이 넘어놓고도 감옥에서 성경통신으로 대강 공부해서 목사라고 명함을 돌리고 다녀서 한국교회를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린 것이 아닙니까?
700명이 일어서는 것을 보고 김진홍 목사님, 그렇게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제발 저 사람들, 목사되지 않게 해주세요! 서리집사 이상은 넘지 않게 해주세요!”
옳은 기도입니다. 사도행전의 성령을 받는다고 전부가 아닙니다. 거룩하게 되는 성령, 열매를 맺어가는 인격의 성령, 예수님을 닮아내게 하는 성령님의 역사가 한국교회에 강력하게 강림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의 성령으로만 우리 민족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의 성령으로 거룩한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매일 임해야 합니다.
3. 성령충만의 공급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제 친구목사와 전화통화를 하다가 친구가 물어 와요. 성령충만이 실제적으로 무엇일까? 신학적으로야 왜 모르겠어요. 문제는 우리 교인들에게서 성령충만한 모습들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배할 때는 성령충만인 줄 알았더니 예배가 끝나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설교에서 전해주는 말씀에 한 시간도 제대로 가지 못합니다. 성령을 받았는데 어느 순간은 충만해졌는데… 어느 단계를 넘어서야 체질로 정착되는데 이걸 넘어서지 못해요. 그래서 도루묵이 되어버리고 갈수록 더 인간성격이 강한 사람들로 후퇴합니다.
그러면 설교자들은 혼란에 빠집니다. 설교는 무엇인가? 설교가 힘이 있고 변화시키는 능력이 나타나야 하는데 교인들은 자기성품의 성(城)에 갇혀 철옹성입니다. 기분 좋은 설교이면 은혜를 받았다고 하고 내 성향과 성품을 건드리면 대리석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내 친구는 신학적인 입장에서 성령충만을 물은 것이 아니라 성령충만한 교인들로 어떻게 공동체를 꾸려갈 것인가? 설교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그것을 고민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무엇일까요? 또 어떻게 성령충만을 받을까요? 어떻게 지속할까요?
㈀ 성령충만의 본질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충만은 성령에게 충만된 상태! 성령에게 사로잡혀 있는 상태입니다. 성령님의 통치 하에 내 주장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성령님의 지배를 강력하게 받는 삶이 성령충만입니다. 내 성격이 나타나지 않고 내 지식으로 판단하지 않고 항상 성령의 지배를 받습니다.
㈁ 내 성격을 알아야 합니다. 너무 강해도 성령충만이 힘들고, 너무 약해도 성령충만이 힘듭니다. 강한 사람은 유해지고 약한 사람은 강해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이 나를 다루기가 쉽습니다. 성령은 편한 사람을 사용합니다. 그걸 목사에게 맡겨놓았습니다. 목사가 다루기 쉬운 사람은 하나님도 다루기가 쉽습니다.
㈂ 성령충만은 차등(差等)이 있게 채워야 합니다. 중형자동차는 소형보다 더 많이 주유(注油)해야 합니다. 비행기는 날아야 합니다. 비행기가 바퀴로 구르고 있으면 꼴이 모양이 아닙니다. 나르는 비행기는 주유를 더 많이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오래 믿을수록, 교회의 직분이 중요할수록 더 자주 더 많이 성령충만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교회 중직은 교회 일을 하다보면 그만큼 성령이 새는 기회도 많습니다. 그래서 더 예배를 사모해야 하고 찬양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 건강한 교회생활을 할 때 성령충만은 지속됩니다. 건강한 신앙생활은 바른 교리와
교회생활(주일성수, 십일조, 사역), 바른 생활(인간관계, 도덕, 시민의 임무)을 할 때 성령은 계속 충만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바닥에 깔려있지 않으면 성령충만은 너무 쉽게 무너지고 육신의 지배를 받아 육신의 사람처럼 살게 만듭니다.
㈄ 성령충만은 겸손으로 사모해야 합니다. 자기를 남보다 덜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한 순간도 살 수 없음을 고백하면서 주님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나를 지배하시고 통치해 주시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자신을 믿지 말고 날마다 하나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무슨 일에나 간절히 사모하는 영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 성령충만은 계속 구해야 합니다. 성령충만의 단계를 같은 온도로 유지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까 바울은 계속해서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합니다. 계속은 반복해서… 그것은 우리 내면에 워낙 내 기질이 성격이 강력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성령충만을 받지 않으면 사도행전의 성령이든 요한복음의 성령이든 에너지가 떨어집니다. 그래서 비싼 전기면도기가 성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멈춰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300원짜리 1회용 면도기만도 못합니다.
정신분석학의 원조(元祖) 프로이드는 인간의 마음속에 세 가지 성향이 공존한다고 말합니다. 청교도적인 신앙을 가진 완고한 성직자 모습, 꾀가 많고 사특한 사기꾼의 모습, 야생동물처럼 제멋대로인 짐승의 모습이 같이 산다는 것입니다. 세 가지 다른 유형의 성향들은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싸우기 때문에 마음이 내 마음이 괴롭다는 것입니다. 이게 성령으로 충만했다가 성령이 빠졌다가… 반복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겠어요! 성령 충만하기로 자타(自他)가 인정하는 무디도, 자꾸 성령이 샌다고… 성령충만을 공급받는다고 했습니다. 남 탓하지 말고 성령이 새고 있나 보세요! 그래야 성령을 보충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충만을 공급받는 길이며 성령의 배터리를 충전하는 것입니다.
<결론>
“배는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다. 그러나 그게 배를 만든 이유가 아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냥 주신 것입니까? 사도행전의 성령을 통해 뜨겁게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성령을 통해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한 영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을 주신 이유입니다. 이것을 묻어두거나 충만하지 않는 것은 바로 죄입니다. 쓰임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 늘빛교회가 사도행전의 성령으로 더 뜨겁고 외부적으로 강력해지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늘빛교회가 요한복음의 성령으로 더 깊어지고 내부적으로 성결해지기를 기원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 늘빛교회는 성령이 주도하시고 성령님이 이끌어 가시는 성령의 교회가 될 줄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