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부인의 삶
마태복음 16장 21~25절
<서론>
유소년부 유창근 전도사님이 목하 다이어트 중입니다. 살이 아주 많이 빠졌어요! 사실 우리교회에서 다이어트 1순위는 나와 김목사님입니다. 우리는 “다이어트”가 아니라 “살과의 전쟁” “다이악트”를 해야 하는데, “늘빛교회 모든 살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나는 살찌고 너희들은 날씬하게 하리라”, 는 심정으로 그냥 먹는 대로 먹고 찌는 대로 찝니다.
‘다이어트’는 일종의 ‘덜 먹기’입니다. 다이어트 하는 분들을 보면 참 대단해요! 먹고 싶은 것 절제하고 굶는 것, 음식물 없이 맨 침만 넘기고 꼴깍 삼킨다는 것! 대단한 자제력입니다.
사실은 믿음생활에도 때로 다이어트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순절이 되면 많은 제안들이 나옵니다. 사순절 동안에는 텔레비전을 굶자! 인터넷을 굶자! 술을 끊지 못하는 분들은 사순절만큼은 술을 멀리하자… 영적 다이어트입니다. 결국 사순절은 영적 다이어트 주간입니다.
금년도 부활절은 4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부활주일은 대부분 4월 첫 주일인데 금년에는 4월 끝자락에 있습니다. 부활절을 앞두고… 주일을 빼고 40일을 사순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금년에는 3월 9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오래전부터 사순절에는 금식과 묵상을 하면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님께서 피 값으로 세우신 교회를 거룩하게, 우리 신앙이 종교적 형식으로 빠지지 않도록 영적으로 다이어트를 하는 주간입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전의 상황입니다. 신학자 벵겔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1년 6개월 전쯤으로 보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보다 훨씬 뒤, 그러니까 십자가를 지기 몇 달 전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 24절,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의 자세! 이것이 사순절의 의미이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부인! 부인(否認)은 “아니 부”(否)에 “알 인”(認)입니다. 인(認)은 인정입니다. 그러니까 부인은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부인은 자기안티이고 자기해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는, 이기적 욕망과 생각과 주장, 부패한 옛 자아, 옛사람입니다. 이런 것들을 철두철미 굴복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부인은 자기를 죽이는 거룩한 자살행위(?)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부인해야 합니까? 우리 자신의 무엇을 해체해야 주님을 제대로 따를 수 있습니까?
1. 믿음에 관한 자기 생각을 해체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16절에서 예수님에 대해 정확하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누구냐?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21절, 고난과 부활을 알려주셨습니다. 지금까지는 함께 기숙했지만 믿음이 아직은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수용 못하기에 이적이나 보이고 교훈을 전했습니다. 그러다가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이만하면 되었다! 생각하시고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하심의 비밀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조금 전의 대박을 친 것을 계기로 22절, 항변합니다. “붙들고”+항변(抗卞)은 구석에 몰아붙이며 당신, 쓸데없는 이야기를 할 것이오? 그런 이야기를 하면 우리는 모두 당신을 떠날 것이오! 라고 협박한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23절,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한다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야단치십니다!
무엇을 야단치셨어요? 사람의 생각을 야단치셨어요! 베드로에게 들어왔던 사람의 생각은 바로 사단의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면 좋은 것들을 얻는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한 자리를 한다… 인간적인 생각과 욕망… 이런 것들이 결국은 사람의 생각이요 사단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24절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 주문하십니다.
무엇을 부인해야 한다고요? 예수님에 대한 자기 생각을 부인해야 합니다. 교회에 다니면 무엇을 얻을까? 무엇을 덧붙일까? 그런 생각을 부인-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면서 이것도 얻고 저것도 얻고…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종교생활입니다.
우리는 종교생활을 하면 안 됩니다. 종교는 기복을 전제로 합니다. 무엇을 얻어내려는 것! 초월자에게서 무언가 받으려는 것! 여기에는 윤리가 없습니다. 소원성취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자기를 비우는 것입니다. 영적 다이어트를 하는 것입니다! 생각의 다이어트를 하는 것입니다. 결국 구원에 관한 성경의 생각, 하나님의 생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자기의 지성(知性)을 해체해야 합니다.
파스칼은 신앙이 무엇이냐? 이성(理性)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신앙이다! 라고 말합니다. 내 생각, 내 지식, 내 상식을 십자가에 못 받고 성경의 생각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대표적 지성인 이어령 교수는 기독교에 귀의하면서 창세기 1장 1절,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 말씀이 믿어지거든 성경을 이렇게 의심하고 저렇게 의심하지 말고 통째로 먹어버리라, 믿어버리라고 권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생각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사순절에 자기생각을 부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너무 자기생각을 절대화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고정관념입니다. 고정관념은 고장난 일관성입니다. 고정관점 위에 세우는 믿음은 종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으로는 제대로 자라날 수 없습니다. 내 생각을 키우지 말고 하나님의 생각을 키워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생각으로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나를 살리는 생각이요, 사단의 생각은 사각(死角),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날마다 내 생각을 다이어트하세요! 내 생각을 굶기세요! 하나님의 생각을 더 크게 키우세요! 그럴 때 제대로 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2. 옛사람의 자기 성품을 해체해야 합니다.
어느 교인 때문에 힘들어했던 목사님이 참다못해서 하나님에게 하소연했습니다.
“하나님… 그 집사 때문에 목회가 안 됩니다. 천방지축이고 사사건건 반대만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랍니다.
“그 집사는 나도 힘들어… 그러니 니가 참아야지 어떻게 하겠냐?”
그래요! 예수님을 믿어도 성품은 변하지 않는다! 는 말이 있습니다. 성품(性品)은 마음의 얼굴입니다. 사람의 얼굴이 각자 다르듯이 사람의 성품-성질도 다릅니다. 고운 성품이 있는가하면 거친 성품이 있습니다. 배려하는 성품이 있으면 자기밖에 모르는 성품도 있습니다.
제대로 사람 노릇을 하려면 성품이 좋아야 합니다. 요즘 학교에서는 인성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성교육은 교회에서 해야 합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성품학교라는 것이 상당히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성품만큼은 교회의 브랜드가 되어야 합니다.
성품은 평생 자기가 갖고 가야 합니다. 성품이 날개가 되어 그 사람을 성공시키는 경우는 부모님에게 크게 감사해야 합니다. 바울의 동역자 바나바 같은 사람은 주변에 적(敵)이 없었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은 권위자입니다. 위로자라는 것입니다. 남에게 디딤돌이었지요!
그러나 야곱 같은 사람은 남을 넘어뜨리는 사람입니다. 그는 평생 남을 힘들게 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을 너무 힘들게 했습니다. 그는 걸림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불같은 성격이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디딤돌이 될 것입니까, 걸림돌이 될 것입니까?
베드로는 조금 전만 해도 위대한 신앙고백으로 칭찬 들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듣고 나서는 불같은 성격이 터져 나옵니다. 심사숙고 할 수도 있는데… 조용히 예수님을 찾아 자기 생각을 말씀드릴 수도 있는데… 그 자리에서 윽박지릅니다. 당신은 하나님이다! 하던 사람이 한 시간도 안 되어 그 입으로 입 닥치세요! 윽박지를 수 있을까요?
그런 베드로를 향해 주님께서는 자기부인을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어떤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입니까? 자기 성품입니다. 불같은 성품입니다. 한군데만 고정시킨 고정관점입니다. 내 생각이 아닌 것은 무엇이나 나쁘고 틀렸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버럭 화를 내고 성질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런 성품을 향해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니 성질 죽여라! 네 성질을 부인하지 않으면 나를 따르는 삶이 아니다! 그건 종교다!”
지난 주간에 노회 시찰회가 있었습니다. 금년 은퇴하는 목사님이 그래요! 내 목회는 실패다! 누가 내 목회를 실패하게 만들었나? 내가 주범이다! 불같은 성격 때문에 교인들을 쫓아냈다! 다시 목회를 할 수 있다면… 이번에는 정말 인자한 목회, 좋은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행복한 목회를 하고 싶다… 며 후회의 빛을 보였습니다.
그래요!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게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만나보기! 그런 프로그램으로 한 장소에 들어갔더니 아무도 없고 거울 하나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이 나옵니다. 누구입니까? 나! 입니다! 어떤 나입니까? 내 성질을 이겨내지 못하는 요 나!(요나) 입니다. 내 성질대로 살아가는 요(놈의) 나! 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믿기 전의 성질이 있습니다. 부모들에게서 유전 받은 성질입니다. 이 성질에는 죄가 묻었습니다. 이게 예수님을 믿어도 죽을 때까지 나를 따라다닙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거듭납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예수님 생명이 내게 이식(移植)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식(移植)된 생명에는 또 성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성질입니다.
두 성질이 평생을 싸웁니다. 옛 성질은 부인해야 합니다. 부인은 부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행동이 나올 때 그것을 누르는 것입니다. 굶기는 것입니다. 사순절에는 더욱 그런 성질을 굶겨야 합니다. 몸매만 아니라 내 성품의 다이어트를 해주어야 합니다.
거듭 난 이후의 성품은 자꾸 후원하고 먹여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의 아홉 가지 성품의 열매가 나옵니다. 나를 부인하는 사람에게만 열리는 열매입니다. 결국 구원은 순식간에 이루어지지만 우리가 평생을 믿음생활, 교회에 다니는 것은 구원을 받기위해서가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으로서의 아름다운 성품을 통해 세상에 덕(德)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불같은 자기 성품을 부인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날마다 거룩한 깨어짐입니다. 이런 깨어짐이 결국 야곱을 최고의 성화자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성화는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화는 성품에서서 나옵니다. 저 사람 성화 되었어… 할 때의 성화는 성품을 말합니다. 저 사람 성자야, 할 때 그 성자는 성품을 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성품이 인격입니다.
세계 복싱 챔피언인 홍수환씨가 인터뷰를 했습니다. 술 때문에 시합에서 일을 낼 뻔한 일이 종종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술을 버렸다고 합니다. 지금은 동생 홍수철(가수)이 목사로 있는 교회를 열심히 다닙니다. 그가 사인을 해줄 때 "참피온 홍수환"이라고 씁니다. 기자가 왜 참피온이냐, 챔피언이지… 물으니까 “참피온” 그게 자기의 좌우명이라고 합니다.
참-참으라
피-피하라
온-온순하라
제대로 변한 것입니다.
그래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성품에 목숨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품의 성소를 만들어 내기위해 대장간의 쇠처럼 두드리고 녹이고 다시 두드리고 녹여야 합니다. 그래야 대장장이가 사용하는 멋진 도구가 됩니다. 이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자세입니다.
3. 자기중심의 자기 행동을 해체해야 합니다.
베드로의 돌변적인 행동으로 제자그룹의 권위에 손상되었습니다. 제자가 스승에게 대적하는 하극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조직에서 가장 나쁜 것이 하극상입니다. 하극상이 있으면 권위가 깨어집니다. 권위가 제대로 세워지지 않는 조직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의 돌출행동은 엄숙하고도 진지한 자리를 엉망으로 만들어 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고난과 부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협박처럼 스승에게 경고한 것입니다. 썰렁한 분위기가 되어버렸습니다. 마치 시어머니 장례식을 하는데 갑자기 핸드폰 벨소리가 울립니다. 그것도 이런 민요의 벨소리입니다.
“와 이리 좋노~ 와 이리 좋노~ 와 이리 좋노~”
시어머니 장례식을 하는데 와 이리 좋노~ 얼마나 썰렁합니까? 아무리 마음속으로는 그렇다 해도 장례식장에서는 그런 벨소리가 나오면 안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그런 것입니다. 베드로의 행동은 거룩한 순간을 엉망으로 만들어 냈습니다. 베드로는 순간적으로 사단이 되어버렸습니다. 그의 행동은 사단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하고 싶어도! 나에게 이익이 되어도! 참는 것입니다.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양보를 하고 자기희생을 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속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건물 주차장에 차를 넣었는데 수리를 한다고 3시간을 차가 나오지 못합니다. 약속시간이 있었는데… 얼마나 속상한지… 수위는 내가 목사인 것을 압니다. 그래서 참습니다. 내가 참는 것이 아니라 목사가 참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어요.
‘아, 좋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어야 좋다고 하는구나. 자기들이 잘못을 해도 목사니까 참아주니까 좋다고 하는구나…’
예수님을 따라가는 십자가의 길은 내가 손해를 보려고 작정한 것입니다. 손해를 보려고 작정하지 않으니까 지금 맛을 잃은 소금들로 교회당 안이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 생각 가지고는 안 되기에 자기 생각을 부인하라고 합니다. 내 성질 가지고는 안 되기에 자기 성품을 부인하라고 합니다. 내 행동 가지고는 안 되기에 내 행동을 부인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쉽게 예수님을 믿으려면 너무 쉬운 것이지만 제대로 믿으려면 참 어려운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탈무드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유대인이 되는 것은 쉽다! 유대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어렵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쉬운 믿음의 길이지만 자기를 부인하며 따라가려면 고난의 십자가가입니다. 그런 길을 가야만 영광이 있고 상급이 있고 성화가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는 의미 중의 하나입니다.
<결론>
사순절은 자기를 부인(否認)하는 묵상의 기간이자 그렇게 살아보려는 고난의 주간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를 해체시키는 엄청난 자기아픔입니다. 거룩한 깨어짐입니다. 거기에서 우리 믿음은 시작됩니다!
영적인 다이어트! 그래서 우리 믿음이 사순절을 통해 더 건강해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