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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터닝 포인트(열왕기상 18:44~19:5)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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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터닝 포인트

열왕기상 18:44~19:5

 

<서론>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라는 말이 있습니다. 청년교회 수련회 주제로 삼기도 했던 단어인데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을만한 사건, 충격으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계기를 터닝 포인트라 합니다. 무엇인가 바뀌는 시점, 갈림길, 혹은 전환점인 셈이지요!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 1기는 탈() 제주도입니다. 2기는 신춘문예 당선입니다. 3기는 늘빛교회 개척과 교사의벗 발행입니다. 4기는 화곡동에서 발산동 이곳으로 교회를 옮기고 난 이후 여러분과의 동역입니다. 때마다 내 의지와 실력으로 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셨고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세상 말로는 운()이 좋았던 것이지만 하나님 안에서 운()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축복이 있을 뿐입니다.

요즘 제 목회인생이 최고로 풍성하다고 자위(自慰)합니다. 목회가 다양화되고 여러 비전으로 날마다 기대가 됩니다. 여러분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내 신조는 이것입니다.

최고로 좋은 것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

기억에 남기위해 따라해 보시지요! 최고로 좋은 것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 믿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또 어떤 터닝 포인트, 전환점을 주실는지아무도 모릅니다. 내 인생을 나도 모릅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에 여러 차례 터닝 포인트를 주실 것입니다. 좋은 쪽으로의 전환점이 되기 바랍니다.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터닝 포인트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인생에서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변화무쌍한 터닝 포인트를 경험한 사람이 엘리야 선지자입니다. 엘리야는 그의 인생에서 세 번의 터닝 포인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유익한 것이었고 두 번째는 안 좋은 방향이었고 세 번째는 화려하게 인생을 마감하는 승천의 삶입니다.

 

1. 첫 번째 터닝 포인트-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다!

엘리야는 17:1길르앗에 우거하는 디셉 사람이라고 소개됩니다. 길르앗 디셉은 북이스라엘 요단 서쪽입니다. 거칠고 무법한 주민들이 사는 외로운 지역입니다.

엘리야가 살았던 북 이스라엘은 바알우상이 왕성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 부부가 있습니다. 특이 이세벨 왕비는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과 함께 밥을 먹을 만큼 바알숭배자였습니다. 이세벨은 여호와 선지자들의 씨를 말리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명(無名)인 엘리야를 일방적으로 부르셨습니다. 이세벨과 싸우는 데는 무데뽀인 엘리야가 적격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엘리야에게는 인생의 첫 터닝 포인트입니다.

엘리야는 바알신 선지자들에게 대결을 청하고 백성들에게는 선택을 강요합니다. 8501의 대결입니다. 하나님의 제단에 불이 내리고 바알선지자 450, 아세라 선지자 400명 도합 850명은 죽임을 당합니다. 이제는 3년 반이나 가물었던 땅에 비가 중요합니다.

엘리야는 갈멜산 꼭대기에서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합니다. 기도하면서 사환에게 묻습니다. 하늘이 어떠냐? 비가 올 것 같으냐? 아닙니다! 하늘이 멀쩡합니다. 일곱 번까지 기도하고 묻고 기도하고 묻고반복합니다. 일곱 번 기도가 끝날 무렵 사환이 말합니다. 44, 사람의 손만 한 작은 구름이 보입니다!

기도는 작은 손만 한 것을 희망으로 여기고 기도로 그 희망을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기도가 크면 희망도 커집니다. 기도가 크면 사람도 커집니다. 기도의 크기가 교회의 크기입니다!

지금 일본은 참혹한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지진도 힘든데 쓰나미까지원전 시설의 파괴로 방사능 위험까지거기에다 추위까지동시상영으로 일어나는 이런 사태는 일찍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엊그제 신문은 큰 제목으로 <일본에 실낱같은 희망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원자력 발전소로 들어가는 기술자들이 만들어 내는 애국심의 희망입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희망은 하나님이 주시는 희망이고, 기도가 만들어 내는 희망입니다. 엘리야는 기도를 통해 손바닥만한 비구름을 키워나갑니다. 계속 기도했을 때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며 하늘이 터진 것처럼 큰 비가 쏟아졌습니다.

그때 엘리야의 모습을 보십시오! 46절입니다.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왕의 마차(馬車)를 앞장서서 달립니다. ()보다 더 힘 있게 달리는 능력자가 됩니다.

길르앗의 디셉사람! 엘리야가 촌부(寸部)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을 때 하늘에서 불을 내리고 비를 내리는, 불물을 부리는 능력자, 빗속을 말보다 앞서 달리는 능력자가 됩니다. 그의 인생에 엄청난 능력의 터닝 포인트입니다.

무엇이 그의 인생에 터닝 포인트를 일으켰습니까? 하나님의 부르심과 기도입니다. 특히 무릎사이에 얼굴을 묻는 기도가 그의 인생에 능력 있는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인생의 어려움이 터닝 포인트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려움이 있습니까? 구름 같은 한 조각을 붙잡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쉬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사전에는 문제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기도제목이라는 단어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문제를 문제로 보지 말고 문제를 기도제목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손바닥만 작은 구름을 놓고 엄청난 폭우(暴雨)를 상상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거룩한 상상력이고 이기는 상상력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만 주시는 축복의 터닝 포인트가 될 줄 믿습니다!

 

존 맥스웰의 <꿈이 나에게 묻는 열 가지 질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2월의 어느 쌀쌀한 날 사과나무 위를 달팽이가 천천히 올라갑니다. 갈라진 나무껍질 틈새로 애벌레가 머리를 내밀며 이렇게 말합니다. 신앙생활에는 항상 맥 빠지게 하는 소리가 있는 법입니다.

괜한 일에 힘을 빼고 있구나! 나무 위에 사과가 하나도 안 열렸는데

달팽이는 그런 빈정거림에 올라가는 것을 멈추지 않고 천연스럽게 대꾸합니다.

맞아! 하지만 내가 나무 위에 다다를 때면 사과가 열려 있을 거야.”

아직 사과나무에 열매가 없지만 사과를 먹는다는 꿈을 갖고 느리지만 계속 올라가는 사람들만이 꿈을 이룬다는 교훈입니다.

기도는 그런 것입니다. 오늘 당장 사과를 따먹으려면 기도가 지칩니다. 오늘 당장 폭우를 기대하면 36개월 가물었던 대지를 적시는 비를 볼 수 없습니다. 사과나무에 오를 때쯤에는 파릇한 사과가 달릴 것이라는 기대로 느리게 올라가는 달팽이만이 상큼한 사과 맛을 볼 수 있습니다. 작은 손바닥만한 구름 속에 폭우가 들어있음을 기대하며 기도하는 사람들만 엄청난 비를 경험합니다. 기도를 통해 능력 있는 삶의 터닝 포인트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2. 두 번째 터닝 포인트-사람의 두려움으로 살다!

세익스피어는 말합니다. “나는 13~20세까지 사이에 내 시기가 없었으면 좋겠다. 아예 그 시기는 잠들어 버렸으면 좋겠다.” 여러분에게도 그런 시기가 있나요? 실패의 시기 말입니다. 무엇이 우리들에게 잠들어 버리고 싶었던 시절, 부끄러운 시절을 만들어 냅니까?

능력의 선지자 엘리아에게도 그런 시기가 왔습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리고 물을 내린 사람, 이건 모세도 못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잡힌 엘리야! 폭우가 쏟아지는 빗길을 마차보다 앞서 달립니다. 대단한 사람 아닙니까? 이랬던 사람이면 또 어떤 기적을 보일까요? 모세처럼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기적이 쏟아질까요? 기적의 책을 만들어도 되겠지요.

그런데 엘리야에게도 세익스피어처럼 부끄러운 시절, 아예 잠들어 버리고 싶었던 시절이 왔습니다. 자기가 총애하던 바알숭배자들이 죽임을 당하자 이세벨은 노발대발합니다. 이세벨은 시돈왕의 딸입니다. 시돈 왕은 제사장이자 왕입니다. 그 딸 이세벨은 이스라엘을 바알국가로 만들려고 정략적으로 결혼한 여인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기르는 450명 선지자들과 아세라 선지자 4백명이 떼죽음을 당하니 눈이 뒤집혀진 것입니다. 그래서 전갈을 보냅니다.

엘리야를 죽이지 못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지리라!”

엘리야는 사방으로 조여 오는 위험을 보았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3, “저가 그 형편을 보고누구를 보았습니까? 사람을 보았습니다. 작은 구름 속에서 비를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며 불을 내리고 불을 내리던 능력 충만의 그 엘리야가 이제는 사람을 봅니다. 여기에서 실패의 제2 터닝 포인트가 시작됩니다.

어떤 전환점을 이룹니까? 3자기의 생명을 위해어떻게 하고? 도망하여달아납니다. 1의 터닝 포인트는 하나님의 거룩의 영광을 위해 부르심에 임했고 목숨을 걸었는데, 두 번째의 터닝 포인트는 자기 목숨을 살리기 위해 도망을 갑니다. 그리고, 4절에서 무엇을 구합니까? 죽기를 구합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죽이던 엘리야가 스스로 죽기를 간구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돌변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 그래요! 자기 힘을 의지하면 그렇게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는 그는 무식한 사람입니다. 그래도 850명과의 대결에서 살아나왔습니다. 그는 소름 끼치는 우상선지자들을 자기 눈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숫자가 문제가 아닙니다. 010개도 0, 100개도 0, 850개도 0입니다. 10의 싸움은 언제나 1이 이깁니다.

이세벨의 권력! 살기가 돌고 대리석 같은 이세벨의 강인한 마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한줌의 검불입니다. 그래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1차 터닝 포인트입니다.

그러나 2차 터닝 포인트는 사람의 눈으로 850명의 후예들을 봅니다. 부모의 원수를 갚겠다는 자식들의 분노를 봅니다. 사람의 눈으로 이세벨의 권력을 봅니다. 무명의 선지자 하나 정도는 우습게 목을 베는 왕비의 권력을 봅니다. 내 눈으로 보니까 두려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냅다 도망가고 죽여 달라고 떼를 씁니다. 어쩌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나요?

누구의 관점으로, 어디를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게 합니다. 그럴 때 작은 구름에서 폭우의 빗소리를 듣습니다. 사과나무에서 상큼한 사과 맛을 느낍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사명이고 지난날의 신앙업적이고 상관없이 도망갑니다. 하나님에게 불평합니다. 누구의 관점으로 보느냐 그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 이세벨은 늙은 여우에 불과합니다. 자기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고 불을 내리고 물을 내린 능력의 사자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멈추고 사람의 생각으로 바라보니까 이세벨은 엄청난 권력이었습니다. 능력의 엘리야가 왜소한 디셉 사람으로 다시 돌아가는 실패의 터닝 포인트였습니다.

 

거북이 한 마리가 부산에서 서울로 가다보니 지렁이 한 마리가 기어가고 있었습니다.

어디 가니?” “서울 간다” “나도 서울 간다. 내 등에 타라.”

지렁이를 태우고 서울로 올라가는 데 굼벵이를 만났습니다.

어디 가니?” “서울 간다” “나도 서울 간다. 내 등에 타라.”

거북이 등에는 지렁이와 굼벵이가 같이 탔습니다. 지렁이가 굼벵이에게 말합니다.

꽉 잡아! 되게 빠르다. 번개 같아. 잘못 하면 떨어진다.”

굼벵이 눈에 거북이는 정말 빠릅니다. 토끼 눈으로 보면 거북이는 경쟁의 대상이 안 되는 느림보입니다. 우리 보기에 문제가 큰 것이지,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기도제목은 있어도 문제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사람의 마음으로 터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눈으로 보던 상황을 사람의 눈으로 보는 상황으로 터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귀로 듣던 설교를 사람의 귀로 듣는 설교로 터닝하지 마십시오! 옛날에는 좋았던 믿음생활을 체면이나 억지로 터닝하지 마십시오! 그동안의 헌신이 아깝습니다! 우리 인생은 짧습니다!

믿음생활에는 김심(金心)이 아니라 3()이 필요합니다. 초심(初心) 열심(熱心) 뒷심! 초심도 열심도 좋지만 뒷심이 받쳐야 합니다. 계속 성장하는 터닝 포인트를 만들기 바랍니다. 후퇴가 아니라 성장하고 날아오르는 독수리 신앙으로 터닝 포인트 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엘리야처럼 반짝 타오르고 사라져 버리는 불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3. 세 번째 터닝 포인트-사람을 세우고 화려하게 떠나다!

엘리야에게서 베드로를 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람을 낚는 영혼의 리더로 인생의 방향을 하던 터닝 포인트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1등 제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계집종의 말 한마디에 그동안의 모든 배움과 사랑을 배신하고 도망갑니다. 제사장 관정에서의 부인(否認)과 배신이 마지막이었다면 그의 인생은 구구절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갈릴리까지 찾아오셔서 또 한 번의 터닝 포인트를 허락하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그는 다른 사도들과 함께 위대한 리더로 일어섭니다. 그가 말씀을 전했을 때 수천 명의 회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도 하시지 못했던 역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는 나보다 더 큰 일을 하리라 하셨습니다!

앉은뱅이도 일으켰습니다. 심지어는 죽은 사람도 살렸습니다. 예수님께 하신 일을 그도 이루어 낸 것입니다. 실패 속에서 다시 승리의 터닝 포인트가 된 것입니다!

엘리야에게는 그런 사역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엘리사를 세우고 사라지게 했습니다. 조용하게 사라지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회오리바람을 타고 승천했습니다. 그는 끝까지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는 패배와 절망의 바닥을 차고 다시 터닝 포인트를 합니다. 삼손도 마지막에 더 큰 업적을 남기는 터닝 포인트를 했습니다. 모세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에게만! 숭배의 길을 거절하고 산으로 올라가 영면(永眠)하는 터닝 포인트를 합니다. 위대한 순간들입니다!

품절. 종교서적에

<결론>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1700년대의 윌리엄 윌버포스입니다. 영국에서 노예제도를 폐지시킨 사람입니다. 젊은 날 그는 부유한 특권층 가문에서 자랐습니다.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했지만 공부보다는 파티를 일삼고 말년에 후회할 일만 골라서 했습니다.

그러던 윌버포스의 인생에 터닝 포인트가 생깁니다. 21세에 하원의원에 당선되면서 성공가도를 달리던 야심가 윌버포스가 믿음을 갖게 됩니다. 자신의 표현대로 대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뭐냐? 노예제도 폐지에 헌신을 다짐한 것입니다. 윌버포스는 20년을 노예제도에 맞섭니다. 열한 번이나 법안을 제출하지만 모두 기각됩니다. 그러다가 26년 만에 노예금지법은 하원을 통과합니다. 3일 후, 윌버포스는 숨을 거둡니다. 위대한 터닝 포인트였습니다.

터닝 포인트! 엘리야, 베드로, 삼손, 모세성경의 위대한 인물은 모두 터닝 포인트를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차례입니다. 소박하면서도 멋진 터닝 포인트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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