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넘어서라!
고린도전서 15장 10절
<서론>
삼풍백화점 참사사건을 기억하시지요? 1995년 6월 29일 오후 지상 5층, 지하 4층의 삼풍백화점 건물이 붕괴된 사고로 501명이 사망하고 937명이 다쳤으며 6명이 실종됐습니다. 백화점 이한상 사장(당시 52세)은 7년형을 선고받아 복역생활을 했습니다.
16년이 지난 지금, 그는 몽골 선교사로 새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고 직후에는 엄청난 충격으로 폐인이 됩니다. 어느 날 요한복음 21장 15절 말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에 걸친 예수님의 물음은 그의 심장을 때렸답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던 모든 게 없어진 뒤 하나님은 제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네’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한 말은 “왜 나를 죽이지 않으셨습니까.”
신앙심으로 평정을 회복하고 출소한 뒤 아는 선교사를 만나러 몽골에 갔다가 선교사의 비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는 인터뷰 내내 웃음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사고로 상처받은 분들을 생각하면 웃을 수 없고, 얼굴을 찡그리고 있자니 하나님 앞에 바른 자세도 아니기에 무표정이 된 사람, 하지만 믿음으로 비극적 생애를 넘어선 사람이 됩니다.
이한상씨의 인터뷰를 읽으면서 기독교는 대단한 종교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 정도였다면 술에 찌들었거나 마약으로 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엄청난 쇼크를 견디지 못해 자살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대인기피증이나 죄책감으로 견딜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한상 사장은 믿음으로 자기의 운명을 넘었고 죄책감을 극복했습니다. 고인(故人)들과 유족들에 대한 미안함이 있지만 그는 이제 자기의 갈 길을 알게 된 것입니다. 죽지 않고 살아있어야 할 더 큰 의미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고인들과 유족들에 대한 미안함과 죄스러움, 자신이 당한 상처와 함께 그는 주어진 삶을 살기위해 일어선 것입니다. 그는 이제 자기를 넘어서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우리에게 자신을 뛰어넘음으로 성공적인 삶을 가르쳐 준 사람을 소개합니다. 바울입니다.
1. “내”게서 “나”에게로 이동합시다.
바울은 10절에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1인칭이 둘이 나옵니다. “내”가 “나”된 것은…. 앞의 “내”는 누구이고 뒤의 “되어진” “나”는 누구입니까? 같은 바울이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두 유형의 바울입니다.
“내가 나 된 것”-앞에 “내”는 예수 믿기 전 “나” 바울, 바리새인 “나” 바울, 교만한 “나” 바울입니다. 옛사람-자연인입니다.
그랬던 내가 “나 된 것은”-제대로 된 나입니다. 예수님을 알게 된 나입니다. 겸손한 나, 순종하는 나, 능력을 받고 성령 충만한 나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내”를 뛰어넘어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거듭 난 “나” 바울이 된 것입니다.
부활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던 “내”가 이제는 그 부활믿음으로 사는 부활전도사 “나”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바울은 절대로 자기를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바울은 자기를 뛰어넘고 세기적인 인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도 두 영역에서 살아갑니다. 아무리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산다하지만 아직도 “내”의 영역에서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내가 나를 주장합니다. 내가 결정하고 내 생각대로 고집대로 계산대로 살아갑니다. 이것은 육(肉)입니다. 육(肉)에서 난 것은 아무리 오래 믿어도 육(肉)입니다. 육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육신인 “내”게 믿음의 뿌리를 고정시킵니다. 육신이 나를 주장하며 통치합니다. 이런 육신의 믿음생활은 아무리 오래 교회생활을 해도 그것은 “내”일 뿐입니다. “내”에게 뿌리를 내린 신앙생활을 정리해야 합니다.
육의 마음으로 하는 신앙생활, 교회생활은 무익합니다. 이런 교회생활이 교회공동체를 힘들게 하고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이랬던 바울이 “내”에게서 “나"로 이동합니다. 육신적인 나를 뛰어넘은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는 ”된“ ”나“가 됩니다. ”된“이라는 말속에는 완성된 폼을 말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그는 만들어진 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닮아낼 수 있는 ”나“가 된 것입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나, 부활을 믿고 부활을 전도하는 새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뛰어넘었습니다. 자신의 천연적인 성분을 뛰어넘은 것입니다.
우리들도 뛰어넘어야 합니다! 장애물도 뛰어넘고 신분도 뛰어넘고 신분의 벽도 뛰어넘어야 합니다. 자신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자기에게 박혀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언제나 나에게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육신인 “내”를 넘어서야 합니다. 그래야 영으로서의 “나”가 나옵니다. 이것이 진짜 믿음생활입니다. “내”가 “나”가 되어야 믿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아직도 “내” 영역의 믿음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억지입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너무 힘들어요! 믿음을 “나”로 이동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폼”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된 믿음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2. 바울은 무엇을 뛰어넘습니까?
㈀ 바울은 자력(自力) 구원관을 뛰어넘습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의 바울은 율법을 통한 구원관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행위를 통한 구원관, 열심히 노력하며 수고하면 그 행위가 조건이 되어 구원을 얻는다는 구원관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종교적인 사업에 몰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인간의 죄를 알았습니다. 전적으로 부패하고 선(善)이 거하지 않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알았습니다. 선하게 살려는 한쪽에서는 악하게 살고자 하는 본성도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고 부르짖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의로움의 문제를 전적으로 위탁해 버렸습니다. 더 이상 의로움을 자기행위에 두지 않았습니다. 자기행위로 구원 받고 의로움을 얻으려고 했던 “내”에서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의탁하는 새로운 피조물의 “나”로 변화됩니다.
그러자 바울은 오직 예수님만을 주목합니다. 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전부입니다.
“나는 십자가와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전하지 않겠다!” “나는 십자가와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자랑하지 않겠다!”
그는 예수에게 박힌 사람이 됩니다. “내”게서 빠져나와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됩니다. 그때부터 그에게서는 예수님이 흘러나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그가 평생 붙잡았던 구원의 교리입니다. 바울은 자기를 뛰어넘은 자가 된 것입니다.
㈁ 바울은 신분을 뛰어넘습니다. 과거의 “나” 바울은 정통파 유대인입니다. 이방인들을 개처럼 취급했습니다. 이방인은 유대인들이 살아갈 천국의 아랫목을 데워줄 땔감으로 창조했다고 여길 정도로 선민의식이 강했던 사람입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의 특징은 “자기 의(義)”입니다. 자기를 기준으로 삼아서 모든 사람을 비판하고 무시했습니다.
바울은 가말리엘의 문하생입니다. 최고의 엘리트입니다. 율법이 없는 사람들을 무식한 자로 치부해 버렸습니다. 그들을 구원을 이룰 수 없는 야만인으로 취급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시민권을 가졌습니다. 로마시민권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성공 보증수표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예수 믿기 전의 “나”입니다. 대단한 사람으로 자처했지만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의“나 된” 바울은 뭐라고 고백합니까? 이 모든 특권을 배설물로 여깁니다. “똥”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는 이처럼 예수님 안에서 나-자기의 특권 신분을 뛰어넘었습니다.
“내”게서 “나”에게로 이동한 바울, 자신을 소개할 때 기쁘게 애용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는 서신 서두에서 자기를 항상 이렇게 소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나 바울은” 그것은 얼마나 멋진 삶입니까? 얼마나 멋진 신분입니까?
어린 아이들은 작은 풍선에 생명을 겁니다. 그 풍성을 차지하기 위해 혈투를 벌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죽을 것처럼 풍선을 아끼고 지키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더 멋진 장난감이 나오면 미련 없이 던져버립니다.
바울이 그런 삶을 산 것입니다.“내”의 영역에 속했던 자연인 바울은 자기의 신분을 자랑했습니다. 대제사장의 추천서를 받은 임명장으로, 자기 경력으로 맹렬한 활약을 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는 “내”게서 “나”로 이동합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알고 나니 자기의 자랑은“똥”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미련없이 버리고 예수님의 종으로 자처한 것입니다.
바울은 때로는 일꾼으로 자기를 소개합니다. 예수님 안에서의 새로운 일은 조롱과 박해를 당하고 시련과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그는 행복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버리겠다는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는 “내”가 “나”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일꾼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도들처럼 예수님을 위해 능욕을 당하는 것을 자랑으로 알고 있습니다. “내”가 “나”된 사람의 고귀한 특징입니다.
㈂ 바울은 자기성품을 뛰어넘습니다. 바울은 엄격하고 철두철미한 완벽주의자입니다. 이런 원칙론 때문에 마가의 일로 바나바와 다툼이 벌어집니다. 마가가 1차 전도여행에서 포기하고 2차에 따라나서려니까 반대한 것입니다. 바나바는 성품이 온화하고 마가는 생질입니다.
이 일로 두 사람은 “서로 심히 크게” 다투었다고 합니다(행 15:39). 얼마나 다투었으면 갈라설 정도입니까? 나중에 바울이 이 일을 후회합니다. 그래서 순교를 목전에 두고 디모데에게 “마가를 데려오라 저가 나의 일에 크게 유익하니라”(딤후 3:11)고 합니다.
바울은 원칙론에서… 엄격주의에서… 온화하고 용서하고 도량이 넓은 사람으로 변합니다.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는 것은 그가 편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바울은 이 모두를 종합해서 “내가 나 된 것은”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행위의 구원관을 뛰어넘었다! 신분의 벽을 뛰어넘었다! 성품의 장애물을 뛰어넘었다! 그래서 “내”가 오늘의 “나”가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고백입니다!
믿음은 나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도 오랫동안 “나”에게 고정된 뭔가가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그 고정된 나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교회공동체는 왜 필요합니까?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서 나를 뛰어넘으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뛰어넘을 대상을 밖에서 찾습니다. 이것이 경쟁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승자는 자기의 가장 큰 적이 자기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최고의 상대는 “내”입니다. “내”를 뛰어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제대로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3. 어떻게 나를 넘을 수 있을까요?
아마존 강(江)에 사는 피라니아 물고기는 이빨이 얼마나 강하고 날카로운지, 사람이나 동물을 뼈째 잡아먹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누군가 피라니아를 잡아 수조에 넣고 가운데 유리판을 세우는 실험을 했습니다. 피라니아는 수족 속을 헤엄치다 유리판에 박치기를 합니다. 수십 수백 번 반복하면, 나중에는 유리판이 없어져도 피라니아가 그 쪽으로 가지 않습니다.
여기서 유리판이 상징하는 것은 바로, 한계입니다. 우리는 몇 번 시도하다가 안 되면 "안 된다!" 믿어버립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더 이상 시도하지 않습니다. 나는 나 이상을 넘을 수 없어… 그렇게 낙심하고 맙니다. “나”라는 한계를 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은 “내”의 영역에서 오랫동안 머물게 되고 신앙생활은 억지와 갈등과 잘못된 경쟁으로 치닫게 됩니다.
우리가 육신의 삶, 육신의 생각, 육신의 고집인 “내”게서 십자가에 달린 “나”로 옮겨가는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단 하나입니다.
바울은 비결을 뭐라고 합니까?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0절에서는 은혜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이는 사도행전 1:8의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이라는 의미와 같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예루살렘~땅끝까지 증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비결, 그 대안은 “오직” 성령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나”되는 비결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랑을 말하고 선물을 말하고 거절할 수 없이 주어지는 특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니까 “내”가 “나”가 되고 육신의 “내”가 영의 “나”가 되고 예수 밖의 “내”가 예수 안의 “나”가 되고 교만한 “내”가 겸손한 “나”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그래서 바울은 가는 곳마다 은혜를 강조합니다. 은혜 안에 붙어있으라고 합니다. 은혜 안에 붙어있으면 “내”가 “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그렇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저는 신학대학에 들어가면서도 목회자가 될 생각은 없었습니다. 내게 목회자의 자질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내성적이고 남들 앞에 나서지를 못합니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야행성 저녁형 스타일입니다. 새벽기도회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저는 대인공포증이 있는 사람입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우리반 대표로 독창대회에 나갔습니다. 전교생이 모인 자리에서 노래를 하다가 틀려서 중단되었습니다. 다시 끝까지 불렀지만 꼴찌를 했습니다. 그게 내 인생에 대인공포증을 불러왔습니다. 사람들 앞에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경험과 소극적인 기질은 대중들 앞에서 설교를 하기가 너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로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던 “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좋은 것들을 주셨습니다. 총신대학교, 최고의 교단, 27세 신대원 1학년 때 신춘문예를 당선시켜 주셔서 자신감도 얻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개척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아무도 없는 쌩 개척입니다.
하지만 개척을 해보니 원래의 “내”를 통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 가지를 정했습니다. 독서를 통한 실력을 쌓자, 정성을 다하는 성실한 목회를 하자, 좋은 인간관계를 갖자⋯ 세 가지를 지침으로 삼아 날마다 훈련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가정에 질고의 풍랑이 일었습니다. 풍랑은 유능한 선원을 만드는 것처럼 기도를 통한 성령충만은 내 성격을 완전히 개조시켰습니다. 그야말로 목회적인 거듭남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목회가 재미있고 쉽고 행복합니다. 그리고 바울처럼 이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여러분들도 이런 고백을 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물결에 흠뻑 적셔서 “내”게서 “나”로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큰 사명을 감당하고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론>
세상에서 가장 감동적인 성공스토리는 어떤 내용입니까? 자신을 넘어선 이야기입니다. 장애를 넘어선 이야기, 신분을 넘어선 이야기, 학벌을 넘어선 이야기… 이런 이야기들은 그 어떤 스토리보다 감동적입니다.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기를 넘어선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으로 살다갔습니다. 만삭되지 못해서 난 것처럼 사도들 중에서 꼴찌로 자처하는 사람, 부활신앙을 전하는 사도의 반열에 설 수 있는 오늘의 내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말합니다. 자기를 넘어선 사람의 고백입니다.
이런 고백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자신을 뛰어넘을 수 있는 신앙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말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년 초의 나와 연말의 나를 비교해보고 “나의 난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