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감사함의 기적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7. 27.
반응형
참고 도서

감사함의 기적

요한복음 6:8~14

 
<서론>

작년도(08) 한국인의 고소고발은 70만 건입니다. 일본은 22천 건으로, 무려 일본의 44배입니다. 인구비율로 보면 120배입니다. 그야말로 고소공화국, 불평공화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의 자살 사건을 놓고 서로 공격하며 고발하며 비난합니다. 한 쪽은 정권이 죽였다, 검찰이 죽였다, 언론이 죽였다 하고 다른 쪽에서는 왜 정권이 죽였냐, 돈을 준 측근들이 죽였고 돈을 받은 가족들이 죽인 것이다 라고 맞받아칩니다

국민소득 2만 불 시대이다, 세계경제국 몇 위()라 해도 국민수준이 아직 멀었습니다. 허구한 날 남을 헐뜯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고소하고 고발하는 민족이 어떻게 선진국이 될 수 있습니까? 그중에서도 3분의 1은 무고(無告)로 끝난다니, 얼마나 우리 민족이 잘못된 잘못된 민족성으로 나가고 있습니까? 국민 정신개혁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 일을 누가 감당해야 합니까? 기독교?

 

종교는 그 시대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한국교회는 교단마다 교회마다 세상법정에 고소고발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감리교는 총회 감독자리를 놓고 서로를 법정에 고발해 놓은 상태이며 우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교단만 해도 세상 법정에, 교단 재판국에 올라가 있는 고소고발건들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습니다. 교회가 이러니 세상을 위해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위해 뭐라고 하면 너나 잘 하세요!”라는 반응이 돌아오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런 시대에 맥추감사절을 맞습니다. 맥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봄 농사를 거두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절입니다. 맥추절은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23:16)는 말씀에서 유래합니다. 밀과 보리를 거두어들인 후 지키는 맥추절은 유월절 후 일곱 주간(49)이 지나 지킨다고 해서 칠칠절”( 34:22), 49일이 지나 50일째 지킨다고 해서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여기에 덧붙여 모세가 율법을 받은 날이라고 하여 겸겸 감사의 절기를 지냈습니다.

 

추수감사절과 마찬가지로 맥추절도 그 중심은 감사입니다. 감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혈관을 돌고 있는 피와 같습니다. 피가 잘 돌면 건강한 사람이고 피가 제대로 돌지 않으면 사지(四肢)가 마비되고 피가 굳어지면 죽은 사람이 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감사가 없으면 행복한 믿음이 아닙니다. 종은 소리가 좋아야. 장작불은 불이 활활 타올라야과일은 당도(糖度)가 좋아야 소리가 고와야 합니다. 크다고 새로 나왔다고 좋은 제품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감사지수-그것이 우리 믿음을 잴 수 있는 바로 미터입니다.

오늘은 2009년도 전반기를 결산하고 후반기를 맞는 첫 주일입니다. 내가 명품(名品) 크리스천이 될 수 있을까? 불량품 크리스천으로 살아갈 것인가? 자신을 점검해 보는 카센터 정비 날입니다. 오늘은 감사의 달인이신 예수님의 감사를 보며 한 수 배우도록 합시다.

 

1. 예수님의 감사는 빈들의 감사입니다.

본문은 벳새다들에서 일어났던 이적입니다. 벳새다는 갈릴리 호수로 흘러드는 요단강의 북동쪽에 있었던 큰 어촌(漁村)으로 베드로와 안드레, 빌립의 고향입니다.

감사는 어떤 환경에서 하는가? 번영하고 건강하고 좋은 대학에 입학하고 취직, 결혼하고 금년 6개월 동안에도 감사할 내용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감사는 50점짜리 감사입니다. 이런 조건부 감사가 많다고 감사의 달인이다,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감사 중심이라면 감사할 수 없는 여러 조건들이 생겨납니다. 그때 우리는 감사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성경적 감사는 아무 것도 감사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 하는 감사입니다. 마가복음 6:35에는 빈들이라고 말합니다. 빈들은 아무 것도 없는 곳입니다. 소출도 없고 감사할 것이 별로 없는 곳입니다. 감사의 조건은 찾아볼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이 빈들에서 축사”(11)하셨습니다. 축사는 감사입니다. 여기에 몰려든 사람들은 불평으로 가득 찬 사람들입니다. 왜냐? 먹고 살만한 사람들은 없습니다. 먹고살만한 사람들이라면 뭐가 아쉽다고 이곳에 와 있겠습니까? 가난하고 원통하고 소외당하고 그래서 100% 불평하고 공격하고 원망할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암하레츠-빈민계층의 사람들입니다. 요즘 우리말로 말하면 노조를 만들어 정부를 공격하고 대항할 빈민계층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인생살이 자체가 아무 것도 없는 빈들과 같은 형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적을 먼저 보인 것이 아닙니다.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그냥 먹이는 이적을 보인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은 그 작은 것을 들고 먼저 감사의 기도를 합니다.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빈들이라는 상황 때문에 기도할 수 없는 사람들, 감사할 수 없는 사람들-세상을 향해 불평하고 원망하고 고소 고발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빈들에서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는 것, 이웃들에게 감사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이적이자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감사의 기적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고전적인 감사는 없는 데서의 감사입니다. “빈들에서의 감사입니다. 하박국은 빈들과 같은 상황에서 마음을 추스르며 이렇게 외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3:17~18)

여기에는 못하며” “없으며가 반복해서 6회가 나옵니다. 없다는 것은 빈들입니다. 우리는 풍성한 포도원을 위해서는 노래할 수 있습니다. 엄청난 수확을 갖다 주는 과수원으로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못하다, 없다 쉽게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진정한 감사는 빈들과 같은 환경에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윗은 구원의 즐거움”( 51:12)이라고 합니다. 구원의 즐거움이 있으면 빈들에서도 감사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즐거움을 감사의 최고조건으로 삼지 않고 채워진 환경으로만 감사할 조건을 찾는다면 늘 부족하고 불평하는 생활이 될 수 없습니다. 같은 환경이라도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 감사도 되고 불평도 됩니다.

 

어제 친구목사 집안의 결혼예식이 있어 분당 할렐루야교회에 갔었습니다. 지난번 이 집사님 따님 결혼식 갈 때는 차가 꽉 막혀 버스전용차선으로 가는데 신났습니다. 할렐루야! 감사했는데 어제는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옆의 차선도 뻥! 뚫렸기 때문입니다. 이거 될 일입니까? 남들이 뻥! 뚫려도 감사해야 되는데 감사가 없으니 이게 조건부 감사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풍성한 환경 가운데서는 감사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것도 없는 빈들에서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감사의 달인입니다. 감사절의 진정한 의미는 여기에 있습니다.

 

2. 예수님의 감사는 작은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다보니 저녁이 되었습니다.  2만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을 먹여야 하는데 소년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전부입니다. 너무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보리떡 다섯 개를 들고 축사-감사하셨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남자들만 오천 명을 먹고도 12광주리로 남는 축복을 가져왔습니다. 작은 것에 대한 감사는 뻥튀기 축복을 가져왔습니다.

 

예수님과 당시 사람들은 감사가 달랐습니다. 그들도 감사의 사람입니다. 유월절에 해방의 기쁨을 인해 감사했습니다. 초실절-첫 열매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일 년의 수확을 마무리하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유대인으로 출생한 것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종교적인 것, 큰 것에 대해서는 감사를 잘했습니다. 그러나 작은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감사 조건이 아닙니다. 감사하기에는 너무 작고 보잘것없습니다. 질적으로 감사할 내용이 아닙니다. 마른 보리떡은 별로 먹고 싶은 음식이 아닙니다. 할 수 없이 먹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보리떡이 있다고 감사하고 먹을 음식은 아닙니다.

숫자적인 면에서도 감사할 내용은 아닙니다. 2만 명이 넘는 군중들이 모여 있는데 다섯 개와 2마리로 무엇을 하겠어요? 그래서 아무도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시큰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작은 것, 보잘것없는 것을 들고 축사-감사기도 하셨습니다. 그럴 때에 떼어줘도, 떼어줘도 계속 불어나며 2만 명을 먹이는 엄청난 분량으로 늘어났습니다.

그 보리떡과 마른 고기가 단순히 딱딱하고 맛대가리가 없는 떡과 마른고기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제껏 먹어보지 못한 가장 맛있고 신기한 맛을 내는 독특한 떡과 고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일생에 평생 잊지 못할 떡이었을 것입니다. 질과 수효에서 엄청난 역사를 일으킨 것입니다. 그들은 떡을 먹으며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결국 작은 것, 보잘것없는 것을 두고서도 감사하는 예수님의 감사는 광야에서 40년을 먹였던 하나님의 축복을 다시 가져왔으며 그들의 마음속에 풍성히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기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누가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까? 작은 것에 대해 감사하며 보잘것없는 것에 대해서도 감사를 하는 사람들이 감사를 통해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너무 큰 것으로만 감사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보리떡과 같은 작은 것들이 우리 주변에 있을 것입니다. 그것 같고 감사하십시오! 남들 보기에는 형편없는 것, 그것 놓고 감사를 하면 그것이 우리를 살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며 보여줄 수 있는 큰 능력으로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미국 자동차 재벌 헨리 포드에게 조지아 주()의 마르다 베리라는 초등학교 여선생의 편지 한 통이 배달되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피아노 한 대를 놓고 싶은데 1천 달러를 기증해 줄 수 없겠냐는 것입니다. 포드는 일상적인 일이므로 10센트(130원꼴)를 보냈습니다. 얼마나 실망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나 마르다 베리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10센트로 땅콩 종자를 구입했습니다. 아이들과 땅콩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가을이 왔을 때 잘 익은 땅콩을 수확해서 감사의 편지와 함께 포드에게 보냈습니다. 포드가 여기에 감동을 받아 1천 달러가 아니라 1만 달러를 보냈습니다. 1천 달러의 만 불의 1 10센트를 받고도 감사했을 때 10센트의 10만 배를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감사의 기적입니다

 

작은 것에 대한 감사-그것은 큰 축복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씨앗이 됩니다. 그래서 스펄젼목사는 촛불을 놓고 감사하면 전깃불을 주시고 전깃불에 감사하면 달빛을 주시고 달빛에 감사하면 햇빛을 주시고 햇빛에 감사하면 천국의 영원한 빛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작은 것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보리떡 다섯 개-작은 것입니다. 다윗의 손에 들려있는 물맷돌-작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작은 것입니다. 그 작은 것들이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작은 것에 대해 감사하면 하나님께서는 큰 것에 대해 감사할 내용을 주시고 작은 것을 감사하지 못하면 큰 것에 대한 감사도 없음을 본문은 보여줍니다.

요즘 자살자들이 속출합니다. 우리 강서구에서만 해도 쉬쉬하면서 제가 들은 자살자들만 여러 명입니다. 자살자들은 대부분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왜 우울증에 걸립니까? 먹고 사는 것이 힘들면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감사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감사가 없는 사람들은 쓸데없는 비교의식을 합니다. 자기가 받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받지 못한 것만 생각합니다. 작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 우울증이 생길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남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자신과 자신을 비교하십시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비교하십시오! 얼마나 많이 발전했습니까? 과거보다 오늘의 내가 못하다면 오늘의 나와 미래의 나를 비교하십시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작은 내가 주님에게 쓰임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유월절은 큰 감사의 절기입니다. 수장절 역시 큰 감사절입니다. 맥추절은 아무래도 감사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수확이 작다고 해서 감사가 적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초실절은 수장절을 전제로 감사합니다. 그래서 작은 것에 대해 크게 감사하는 것, 이것이 바로 맥추절이 주는 교훈이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감사의 교훈인 것입니다.

 

3. 예수님의 감사는 사람에 대한 감사입니다.

여기 2만 명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계산적인 사람들입니다. 빌립은 당장 주판알을 튕겼습니다. 7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2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겠습니다.” 2백 명 인부의 돈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묻는, 일을 시키는 주님의 의도를, 마음을 몰라주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남을 배려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 많은 사람 중에 소년만이 보리떡과 물고기 를 갖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자신의 것을 내놓지 않으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루 종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주옥같은 말씀을 들었지만 설교는 들었지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의 은혜는 받았지만 자기의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내놓을 생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용해서 왕을 세우고 뭔가를 얻으려는 이기적인 사람들입니다(15). 결국 예수님과 말씀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예수님을 낙심시키며 힘들게 하는 다수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보고 이적을 보이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 가운데 예수님께서 주목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드레 같은 사람, 어린 소년 같은 사람-그들은 비판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대안을 찾아 애쓰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것을 아끼지 않고 내놓으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소수였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보며 감사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감사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 됩니다. 나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가 잘 되기를 바라고 내 주변에서 아론과 훌처럼 나를 위해 중보사역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음에 대해 감사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감사를 통해 이적이 일어납니다. 공급의 축복, 배불리게 하는 축복, 12광주리로 남는 넉넉한 기적을 볼 수 있습니다. 감사를 통한 기적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론>

저는 지난 몇 년 동안 하루 열 가지 씩 감사를 해왔습니다. 감사를 하면 기쁨이 생기고 행복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어느 날부터 10개의 감사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유가 뭘까? 감사를 하면서 불평도 함께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제가 하는 불평이라야 얼마나 불평하겠습니까? 세상 돌아가는 모습에서,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일이 잘 안 되었을 때 때로는 교회에서 인간관계로 

그래서 불평을 끊지 않으면 감사를 하루에 1백번 외쳐대어도 공허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은 감사는 계속하되 불평 제로의 삶을 만들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9월에 있을 불평 없는 세상 만들기 프로그램입니다

탈무드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행복론>의 저자 칼 힐티(“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의 저자) “감사하라 그러면 젊어진다. 감사하라 그러면 발전이 있다 감사하라 그러면 기쁨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감사함으로 더 크게 이적을 체험할 수 있는 교우 여러분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에 1등을 하는 성도님 여러분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 경기는 누구나 1등을 할 수 있는 경기입니다. 모두들 금메달을 따시고 더욱 행복한 삶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