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 사람, 므비보셋
사무엘하 9:5~8
<서론>
세상은 아름다움을 추구합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대부분 외적인 것입니다. 한국은 성형공화국이 되었습니다. 너도 나도 외모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해서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외모가 아름다운 사람들이 절대 유리한 외모지상주의가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성경에서 아름다운 사람은 압살롬입니다. 압살롬. 아름다움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삼하14:25). 그러나 뒤틀린 영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본문의 므비보셋. 겉으로는 볼품 없지만 버림받은 자신의 운명을 극복하고 한(恨)을 삭힌 아름다운 내면의 사람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진정 아름다운 사람은 므비보셋을 이토록 아름다운 사람으로 만들어 낸 다윗입니다. 다윗이라는 사람이 없었다면 므비보셋은 일그러진 영성을 가진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1. 므비보셋은 사랑의 대상 밖에 있는 신분이었습니다.
므비보셋은 사울의 손자이자 요나단의 아들입니다. 세상이 요동치지만 않았어도 왕이 될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가만 두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 사울 왕, 아버지 요나단이 전쟁터에 나갔다가 한 날 동시에 전사했습니다. 무자비하기로 유명했던 블레셋의 약탈과 살인, 그리고 광야에는 다윗의 군대가 있었습니다.
므비보셋에게 최악의 상태가 온 것입니다. 왕궁을 버리고 모두 도망치고 므비보셋을 안고 달아나던 유모가 그만 발을 헛디디고 말았습니다. 그 사고로 양발목이 부러집니다(삼하 4:4). 당시 다섯 살. 므비보셋은 로드발이라는 작은 마을에 숨어서 절름발이로 자라났습니다.
굳이 심리학자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사정이 이 정도 되면 므비보셋이 온전한 성격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그에게는 뒤틀릴 수밖에 없는 유전적인 기질이 있습니다. 조부 사울이 보여준 편집증적인 의심, 광적인 질투심, 구 정권의 왕손이 알려지면 체포되고 처형될 것이기에 신분과 이름을 숨기고 살았습니다. 자연히 피해의식 속에서 자라게 됩니다. 마음 속에는 다윗 왕에 대한 원망과 증오로 불타올랐을 것입니다. 특히 그를 안고 도망 왔던 유모에게서 교육받은 적대감과 원한은 어린 그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그는 절름발이로 살았습니다. 그의 신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를 놀렸을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그는 자신을 가리켜 8절 “죽은 개 같은 나를”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의 자존감은 바닥이었습니다. 이런 등등은 그의 성격 형성에 좋지 못한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마음 속에 무엇이 남을까요? 증오, 미움, 보복, 원수, 혁명-이런 것들입니다. 사랑, 은혜, 용서-이런 것들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을 향해 칼을 휘두를 사람입니다.
대구지하철 참사로 2백 명 이상이 숨졌습니다. 원인제공은 58세 장애인입니다. 멀쩡했던 사람이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장애인이 되자 사회에 대해 앙심을 품게 된 것입니다. 너도 죽고 나도 죽자는 마음으로 불을 질렀고 애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므비보셋도 그런 화병으로 세상에 불지르고 파괴하고 보복하고 그렇게 죽기를 원했을 일그러진 영성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11절, 왕자 중의 하나로 신분이 회복되었고 13절, 왕의 상에서 음식을 같이 먹는 너무 존귀한 존재, 왕의 사랑을 받고 새 정부에서 대접을 받는 다윗 정치에 상생(相生)하는 인물로 역사의 무대에 오르게 됩니다.
유년시절의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그 증오와 원한과 파괴심에서 벗어나 이제는 사랑 받는 자리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로드발이라는 작은 마을에 숨어살던 므비보셋에게 왕의 신하가 찾아왔습니다. 당시에도 정보력이 대단했던 것 같아요. 신분도, 이름도 숨기며 살아왔던 그를 어떻게 찾아냈을까요?
다윗 왕 앞에 서게 된 므비보셋-죽게 될 일만 남았습니다. 그는 최악밖에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그러기에 다윗 왕 앞에서 떨었습니다. 사울에게 다윗이 얼마나 박해를 받았어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을 므비보셋에게 이제 남아있는 것은 보복이요 죽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게 웬일? 다윗 앞에 나서게 되었을 때 6절, 왕은 그의 이름을 부른 것입니다.
“므비보셋이여!” 므비보셋! 그것은 치욕과 수치의 이름, 위험스러운 입니다. 그런데 지금 왕의 입에서 므비보셋이여! 그것도 사랑스럽게! 정답게 미소를 띠고!
그는 이제 더 이상 이름 없는 숨은 자가 아닙니다. 더 이상 피해의식 속에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므비보셋이라는 이름이 있고 왕이 그것을 인정하고 알아줍니다. 그동안 므비보셋이 호칭이라기보다는 욕설에 가까운 이름이었다면 다윗의 입에서 그 이름이 불려질 때 그것은 더 이상 반역의 이름, 처형의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랑 받기 위해서 불려지는 이름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이야기에서 므비보셋이라는 이름은 일곱 번 나옵니다. 그는 더 이상 숨겨진 이름도 아니고 숨고 살아야 할 신분도 아니고 당당히 왕의 식탁에서 같이 먹고 왕자의 대접을 받으며 사랑스런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한번도 대 놓고 사랑 받지 못한 사람, 어려서부터 사랑을 받은 적이 없고 피해의식 속에서 살았던 사람, 이제 그 아이가 자라서 왕실에서 사랑 받고 우대 받는 존귀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기로 작정한 한 사람에 의해 존귀한 존재로,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거듭 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심판 당하고 처형당하기 위해서 왕궁에 온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사랑 받기 위해서 왕궁에 오게된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물가선교회라는 선교단체가 있습니다. 사랑의 교회가 강남의 유흥업소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만들었는데 지금은 그보다 훨씬 다양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목마르거든>이라는 작은 월간지가 나오는데 이런 내용들이 종종 나옵니다.
유흥업소에서 술을 파는 여성들-그들은 자기 이름이 아닙니다. 그 이름은 수치스러운 이름이고 경멸스러운 이름입니다. 본명은 숨기고 살아갑니다.
그녀들이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오랫만에 교회에 들어가서 회개하며 실컷 웁니다. 자기의 이름을 불러가며 웁니다. 유년 시절 예배당에 다녔을 때의 그 꿈 많던 소녀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아뢰며 웁니다. 그 눈물은 하나님의 사랑이 되어 그들의 상처를 치료합니다.
이제 더 이상 그녀들의 이름은 수치스러운 이름입니다. 사랑의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 불러주시는 존귀한 이름입니다. 그녀들의 자존감이 새로워지고 아름다운 자화상을 갖게됩니다. 그녀들은 심령이 아름다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므비보셋이 긴장과 두려움을 풀게 된 것은 이름을 불러주는 다윗의 그 자비함과 함께 다윗이 전해 준 이야기였습니다.
7절, “무서워 말라!“ 즉, “겁낼 것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을 안심시키며 한 말에서 우리는 사랑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삶에는 두려운 것이 많습니다. 우리는 힘을 가진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힘과 권력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우리를 깔아뭉개고 학대하고 이용하고 해치우는데 사용하지는 않을까? 우리는 조심하고 방어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러니 두렵고 증오가 생깁니다.
므비보셋에게 다윗은 겁나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숨어살고 있지 않은가? 겁내지 말라는 사랑의 그 단어 앞에 므비보셋은 증오와 원한이라는 무기를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이 무엇입니까? 상대방으로 하여금 두렵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게 하고 나 때문에 마음 상하지 않게 해주도록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겨질 때 사랑입니다. 다윗이 조부의 소유지를 넘겨주었을 때 사랑이라는 말에 내용이 채워졌습니다. 아울러 식탁에서 먹자고 했을 때 므비보셋을 한 가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사랑은 마음 속으로 수용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3. 언약에 근거한 사랑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다윗 왕-그가 왕이 되고 국가가 블레셋의 손에서 안전하게 되었을 때 맨 처음 한 일은 사랑이었습니다. 다윗에게는 모든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힘을 끌고 가는 수단으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힘인가? 사랑인가? 통제권을 쥐기 위해 엄격하게 권력을 조종하고 대적들을 보복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관대하고 마음을 여는 사랑의 사람이 될 것인가? 다윗은 사랑 쪽을 선택했습니다.
다윗이 요나단과의 사랑의 맹세를 추억하면서 사울의 가족 중에 남아있는 자가 있느냐고 물었을 때 사실상 다윗은 이렇게 물은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려 하는데 원수의 진영에 남아있는 사람이 없는가?”
그는 요나단을 대신할 사랑의 대상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할 원수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참모와 공신 속에서 사랑의 대상을 찾은 것이 아니라 그의 경쟁자 중에서 사랑할 사람을 찾은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의 단어 “헤세드”는 때때로 “하나님의 사랑”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됩니다. 환경, 호르몬, 감정 상태, 개인적 편익 등의 변화에 구애받지 않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바로 그 사랑입니다. 다윗은 바로 이런 종류의 사랑으로 므비보셋을 찾아 나섰고 사랑했습니다. 므비보셋은 오랜 세월 동안 이런 종류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므비보셋의 마음을 열게 했고, 국민들의 마음을 얻고 열두 지파를 통합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리더십이 된 것입니다.
다윗의 사랑은 언약에 근거한 것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서로의 사랑처럼 자손들에게도 이어지게 하자고 맹세했습니다(삼상 20:42).
다윗 앞에 그 자손이 온 것입니다. 비록 므비보셋은 알지 못했지만 그는 다윗이 요나단과 약속하고 언약했던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요나단에게서 그토록 아름답고 굳건한 사랑을 받았던 다윗은 이제 그 사랑을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베푼 것입니다.
결국 므비보셋이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언약 때문이었습니다. 므비보셋은 외모나 혈통이나 행동이 아니라 부모들 간에 맺어진 언약에 의해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훗날 압살롬의 반역을 일으켰을 때, 므비보셋의 배신을 고발한 시바의 이야기에서도 다윗이 므비보셋을 믿어준 것은 바로 그의 행위가 아니라 언약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날 우리의 이름은 수치의 이름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우리는 그 분의 사랑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가족 속에 우리를 입적시켜 주시고 날마다 주님의 식탁에서 함께 먹도록 해주십니다. 언약에 근거해서 그렇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헤세드의 사랑입니다.
우리에게는 다윗과 같은 아름다운 사람이 필요합니다. 나를 이름으로 알아주는 사람, 기꺼이 사랑을 베풀기로 결정하고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사랑을 한결같이 지켜나가는 사람들 말입니다.
배신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게조차도 상처받을 위험을 무릅쓰고 사랑을 베푸는 사람들, 누군가 용기를 내어 그런 사랑을 시도할 때마다 복음은 한 번 더 선포되는 것이며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전보다 더 잘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
훗날, 압살롬의 반역에서 므비보셋은 반역의 대열에 끼지 않았습니다. 왕이 돌아올 때까지 수염도 깍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윗이 어려움을 당한 기회를 틈타서 할아버지의 나라를 찾겠다고 구(舊) 정권의 신하들을 모으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이 사실일진대, 그는 사랑을 받은 자답게 처신했습니다. 그의 이런 사랑은 조건 없는 헤세드의 사랑-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므비보셋의 원래의 이름은 “므립바알”-“바알로 만족하는 자”(대상 8:34, 9:40). 그러나 바알은 그를 만족시켜 주지 못했습니다. 그는 수치를 없애려고 이름을 개명했습니다.
므비보셋-그 이름의 뜻은 “부끄러움을 없애 버린 자”입니다. 그의 부끄러움은 원수를 갚았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받을 때, 조건 없는 사랑을 받을 때 가능했습니다. 이런 사랑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갑니다. 이런 사랑만이 사람들을 내 편으로 사랑의 편으로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새로운 자존감으로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