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도의 삶
데살로니가전서 3:9~11
<서론>
목회자의 사역은 설교만 아니라 교우들을 위한 기도의 사역도 중요합니다. 목사는 연초에 기도제목을 받고 1년 동안 기도해 왔습니다.
무엇을 기도해 왔을까요? 대부분 삶에 필요한 것들을 위해서 기도해 왔습니다.
만약 바울이 늘빛교회의 목사로 1년을 지냈다면 무엇을 기도했을까요?
오늘 우리는 바울을 강사로 여기에 세워봅시다. 그리고 바울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원하시는지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교우들의 얼굴을 보기를 원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10절 “주야로 친히 간구함을 너희 얼굴을 보고”. 얼굴을 보기 싶을 만큼 그들은 바울이 목회 하던 목회지의 성도들이었습니다.
바울은 큰 교회를 원했던 사람도 아니고 사례비 때문에 목회를 했던 목회자도 아닙니다. 그는 오직 복음 전도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었고 사람 하나 하나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거듭나고 성장하고 신앙인격에 열매를 맺어가는가? 그것이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들을 만나보고 싶어합니다.
그러면서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교회의 믿음이 그전보다 좀 못하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이 3주간 정도 체재했던 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1:3)를 보였던 교회입니다. 그러나 그들 교회에는 나름대로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재림에 대한 혼돈, 무질서, 교회 안의 분쟁 등입니다. 이런 것이 그들 믿음의 부족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의 부족함의 온전함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합니다.
‘부족’하다는 것은 ‘뒤에 온다’ ‘뒤에 쳐진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머물렀던 교회가 쳐지기에 온전하게 되기를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부모는 자식들을 꼭 같이 사랑하는 데 쳐지는 아이가 있습니다. 교사가 학생들을 꼭 같이 가르쳤는데 쳐지는 학생이 있습니다. 목사가 꼭 같이 먹이고 같은 설교와 가르침을 받지만 어떤 이들은 신앙의 진보와 기쁨으로 충만하지만 쳐지는 교우들도 있습니다. 믿음은 있어도 항상 믿음이 처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도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대상이 있고 내용이 있습니다.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하신 모든 일-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수용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크게 믿으면 큰 믿음이고 작게 믿으면 작은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좋은 사람은 칭찬했고 믿음이 작은 사람은 책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방 땅인 두로아 시돈에 들어서셨다가 가나안 여인을 만났습니다. 여인은 귀신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하소연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옳소이다!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고 응답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물이 귀했고 식사를 할 때는 꼭 손을 닦아야 했습니다. 때로는 빵으로 손을 닦았습니다. 그것을 던지면 상 아래에 앉았던 개들이 먹습니다. 여자는 그런 관습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어찌 주인과 같은 테이블에 앉겠나, 개들에게 주는 부스러기 능력만 있어도 딸은 고침 받을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고 하셨습니다. 헬라어 본문에는 “너로 인하여 내가 켜졌다!”라는 뜻으로 나옵니다.
왜 주님께서 커졌나요?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전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예수님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합니다. 다윗의 자손은 유대인들에게는 구세주를 뜻합니다. 구세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예수님을 높여드렸습니까? 사람들의 눈에 목수의 아들로 보이고 있는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라니, 구세주라니, 얼마나 여인의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커졌습니까?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해 주지 않는데 여인은 귀신 들린 딸을 고치는 데에는 예수님의 부스러기 능력으로도 충분하다는, 예수님의 능력을 엄청 높게 평가하는 믿음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부스러기로도 귀신을 쫓아낸다? 얼마나 예수님께서 커졌습니까? 여인의 믿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크게 보이게 되었다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비록 이방인이지만 큰 믿음으로 크게 칭찬을 들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아름다울 때 주님께서 커집니다. 예수쟁이가 왜 저래? 하는 말을 들으면 예수님은 함께 낮아지고 작아집니다. 역시 예수쟁이들은 뭐가 달라! 할 때, 우리가 믿음의 아름다움을 보일 때 주님이 커집니다.
바울은 믿음이 온전함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온전’이라는 것은 ‘짜 맞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리가 바스러졌는데 의사가 하나씩 짜 맞추어서 원상태로 회복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온전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에 머물면서 바른 믿음을 전해주고 왔습니다. 그러나 그가 떠나고 난 다음에 이 교회에 뭔가 잘못된 가르침들이 들어왔습니다. 재림에 대해 잘못된 가르침이 있었고 더러는 무질서하고 더러는 마음이 약하고 더러는 믿음이 연약해 지고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부족한 것들을 채워놓아야 그들의 믿음은 원상태로 짜 맞추어지고 온전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이 점점 자라 동일한 열심을 내고 온전해 지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믿음을 키워나가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은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고 했습니다(4:16).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완벽한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점점 자라나는 믿음입니다.
㉠ 아브라함은 믿음이 자라나기 위해서 떠났습니다. 고향 친척 아비집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하란에서 데라가 정착을 했습니다. 아브라함도 정착했습니다. 그곳에 있는 동안은 계시도 축복도 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진보되고 성장하려면 떠나야 합니다. 우리의 본성에서 떠나야 합니다.
저는 술을 좋아하셨던 아버지에게서 떠났습니다. 평생을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살았습니다. 조상 제사에서도 떠났습니다.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친구들은 떠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내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떠나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내야 합니다. 정리해야 합니다. 그런 것들에게 탈출해야 합니다.
㉡ 아브라함은 믿음이 완전해 지기 위해서 이스마엘을 쫓아냈습니다. 아내가 쫓아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도 쫓아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심히 근심했습니다. 죄는 들어올 때는 즐거움을 주지만 함께 있는 동안에 근심을 줍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추방할 때에 그의 믿음은 완전함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취미생활, 문화생활은 좋지만 그것이 교회 섬김에 방해가 된다면 내버려야 합니다. 아니면 그것 때문에 주님을 내버리게 됩니다.
목회하면서도 낚시를 지나치게 즐기거나 꽃 재배에 심취하거나 바둑이나 골프를 좋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 버려야 합니다. 그게 발목에 잡히면 믿음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 아브라함은 바침을 통해서 믿음이 완전해졌습니다. 아들 이삭을 바쳤습니다. 그것은 부활신앙이 없다면 불가능합니다. 부활신앙이 있는 자들이야말로 완전한 믿음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하나님의 벗이 되었습니다.
믿음은 그 어떤 것보다도 노력이 있어야 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은 자라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저는 늘빛교회 20년을 목회하면서 실력도 자랐지만 믿음이 많아 자랐습니다. 저는 보조교육전도사로 시작했습니다. 새벽기도생활도 제대로 못했고 박수치는 것조차 쑥스러워 했습니다. 개척을 하면서 믿음이 자랐습니다. 아무도 없이 개척을 시작했는데 그게 오히려 저에게 믿음을 키워주는 힘이 되었습니다. 누구의 도움도 바랄 수 없었기에 하나님만을 의지했고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제 서야 비로소 목회적인 거듭남을 체험했습니다.
예배당을 이전하면서, 또 한번 믿음이 자라났습니다. 이전한다고 약속은 했는데 겁이 났습니다. 헌금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고 목회를 했기에 당시 7억이라는 돈을 만들어야 하는데 까마득했습니다.
친구 목사들은 그런 경우에 부흥사들을 불러놓고 헌금을 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저는 거부했습니다. 나에게 주신 양들인데 내 말이 먹히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말이 먹힌다면 그것은 내 목장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순수하게 헌금을 작정했습니다. 놀랍게도 최선을 다해서 헌금을 했습니다. 그 때 내 믿음이 자랐습니다.
이번에 또 한번 내 믿음이 자랐습니다. 갑자기 되어지는 작정 전도헌금,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헌금이 모아진 것을 보고 놀라웠습니다. 이어지는 전도센터-전혀 예산도 없이 진행되는 본당 리모델링을 보면서 내 믿음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도하심과 계획하심 앞에서 또 한번 믿음이 업그레이드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가다보면 제 믿음은 점점 완전해질 것입니다. 제 믿음이 완전해지는 것처럼 여러분들의 믿음도 완전해 질 것입니다.
금년도 믿음의 부족분을 채워가면서 점점 새로운 믿음의 세계로 나가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