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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이 주는 영적 교훈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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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중고서적에

품절. 중고서적에서

월드컵이 주는 영적 교훈

요한복음 4:13~16                             

 

<서론>

어느 성당에서 미국 파송의 신부 선교사님과 신도들이 함께 축구를 보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김동성 선수가 오노 선수에게 금메달을 빼앗겼다는 억울함에 아직도 미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미국전과의 응원은 어느 때보다 감정적이고 살벌했습니다.

성당의 신도가 옆에서 시청하고 있는 신부님에게 물었습니다.

신부님은 어느 팀을 응원하세요?”

주책 신도에게서 어느 편을 응원하냐? 는 질문을 받은 신부님은 참 난처했습니다. 신부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선교사니까 내 나라보다는 남의 나라를 응원해야지요!”

미국 출신의 선교사에게 남의 나라는? 한국이지요. 그래서 너무 반가워 , 한국팀을 응원하세요?” 했더니, “내가 지금 한국에서 살고 한국 땅 사람이 되었으니까 나에게는 미국이 남의 나라이지요!” 했다나요?

, 월드컵 축구가 장난이 아니에요! 월드컵 축구는 서로의 실력을 겨루고 우승컵을 다투는 스포츠가 아니라 국가 간의 총성 없는 경쟁과 전쟁이 되어버렸습니다.  

 

2002년 월드컵이 내일 요코하마에서의 결승을 앞두고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월드컵은 월드컵일 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을 바꾸거나 한국의 앞날을 하루아침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제 늘빛가족들은 월드컵을 통해서 승리의 기쁨도 원 없이 누려보았고 16강이 아니라 4강이라는 기적에 가까운 성적도 얻었습니다.

이제는 숨고르기에 나설 때입니다. 월드컵에서 얻어야 하는 교훈은 얻고 조용히 묵상의 숲으로 들어가 하나님과 친교를 맺는 시간들로 육신의 열광을 털어 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월드컵이 한국사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 지나치게 육신에, 스포츠에 열광하는 것은 영적인 삶에 너무 많은 희생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월드컵을 통해서, 여러 경기들을 관전하고 시청하면서 얻어야 하는 교훈들은 무엇일까요? 본문에 나오는 수가성 여인의 생애와 함께 조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수가성 여인은 오프사이드에 걸렸습니다.

이번 월드컵 개막식에서 독일의 노벨상 수상작가 귄터 그라스가 <오프사이드>라는 축시(祝詩)를 낭독했습니다.

            고독하게 시인은 골대 앞에 서 있었고

            심판은 호각을 불었다 / 오프사이드!

그래서 그런지 이번 월드컵 기간 중 유명해진 단어가 오프사이드입니다. 시골 할머니까지도 오프사이드를 외칩니다.

오프사이드-경기해서는 안 되는 위치, 즉 수비 없는 적진의 지점에 있을 때 오프사이드가 선언되었습니다. 오프사이드에서 넣은 골은 무효처리가 됩니다. 이번 경기에서 그런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골이 들어가는 팀들은 열광했고 상대팀은 아찔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오프사이드 호각소리가 나면서 입장은 정반대가 됩니다. 탄식과 환호!   

수가성 여인도 오프사이드 지점에 있습니다. 그녀는 윤리적으로 제 자리에 서 있지 못했습니다. 이전에 남편이 다섯이었고 지금의 남편도 법적으로 정당한 남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녀의 삶에는 오프사이드가 선언되었습니다.

아무리 그녀가 사랑을 하고 나름대로 애를 쓰면서 인생을 살았을 테지만 그녀는 오프사이드 지점에 있습니다. 아무도 그녀의 성공을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정오에 물을 길러 우물가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6). 정오라면 팔레스타인에서는 가장 뜨거운 시간으로 사람들의 바깥출입이 거의 없을 때입니다. 이렇게 뜨거운 시간에 우물로 물을 길러 나왔다는 것은 사람들의 눈길을 피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아무 많은 돈을 얻고 사랑의 쾌락을 누린다 해도 행복한 삶이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오프사이드 자리에서 얻은 명예와 돈은 자기 것이 아닙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고자 선악과를 따먹었던 행동-그것은 오프사이드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을 수 있다던 사단의 약속은 오프사이드에 결려 무효처리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사라의 말을 듣고 하갈을 취하고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역시 오프사이드에 해당되는 위치였습니다. 그 아들은 상속자가 되지 못하고 두고두고 아브라함의 신앙인격에 해가 되었고 그 자손들을 지금까지 괴롭히고 있습니다.

다윗-밧세바 사이에서 얻은 아들도 오프사이드였습니다. 그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죽었습니다. 다윗의 골이 무효 처리가 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골인이고 성공입니다. 그러나 심판이 오프사이드 호각을 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지 않는 위치에서의 골인은 오프사이드입니다.

조모씨라는 사람이 대기업체의 이사급 이상 임원 250여명의 명단을 입수하고 협박 편지를 보냈습니다.

당신의 불륜 근거를 확보하고 있으니 100만원을 준비해 이메일로 답장 보내라!”

그러자 22,  10%의 사람들이 답장을 보내왔다는 것입니다. “편지 잘 받았습니다. 장소를 정합시다는 소신파, “오해가 있습니다. 제발 답장을 주십시오라는 애걸파, “경찰이 개입되어 있느냐는 신중파 등 대답은 다양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성공도 오프사이드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자리는 지금 어떻습니까? 제 자리에 서 있습니까? 공격수의 자리에, 수비수의 자리에, 아니면 골을 놓으려는 욕심에 오프사이드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닙니까?

지금 월드컵을 마감하면서 우리 자리들을 돌아보아야 할 시간이 왔습니다. 그래서 빨리 오프사이드의 자리에서 나와야 승리의 골인을 터트릴 수 있습니다.      

 

2. 수가성 여인은 할리우드 액션을 보였습니다.

이번 월드컵에서 심판들이 엄격하게 본 규칙 중의 하나가 할리우드 액션입니다.

할리우드 액션은 심판을 속이는 과장된 몸짓과 행위입니다. 상대방과 관계없이 넘어졌음에도 남이 밀쳐서 넘어진 것처럼 눈속임을 하는 행동입니다.

브라질의 히바우드 선수가 얼굴에 공을 맞지 않았음에도 얼굴에 맞은 것처럼 얼굴을 감싸며 쓰러지는 할리우드 액션으로 퇴장 당하는 중징계를 맞았습니다.

어떤 선수들은 상대방의 골문 앞에서 할리우드 액션으로 심판의 눈을 속이고 페널티 킥을 얻어내고 골을 넣으려는 얄팍한 수작을 부리기도 했습니다. 남미와 유럽 축구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할리우드 액션은 스포츠 정신에 위배되는 일이어서 이번 월드컵에는 중징계를 내리도록 방침을 세웠다고 합니다. 속여서 승리를 하려는 마음, 그것은 스포츠를 철저히 상업화하는 것입니다.

 

수가성 여인도 예수님에게 할리우드 액션을 보이고 있습니다. 어떤 액션? 예수님은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했습니다. 물이라는 게 팔레스타인 땅에서 아무리 귀한 것이라 해도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물을 주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것입니까? 설령 불구대천의 원수를 만났다 해도 목마른 사람에게 물 한 모금을 주는 것이 당연한데 여인은 엉뚱하게 화풀이를 합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합니까?”(9)

여기서 수가성 여인의 할리우드 액션을 봅니다. 여인은 물 한 모금을 가지고 민족적 감정으로 비화시킵니다. 그리고 남녀와의 대립적 관계로까지 문제를 확대해 갑니다.  

그녀는 자신의 신세를 세상 남자들의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오늘 이렇게 되어버린 것은 유대인들의 천대 때문이고 남자들 다섯 명이나 전전하게 된 것은 순전히 자기의 탓이 아니라 남자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남자인 당신에게 물주는 것조차 싫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수가성 여인은 자신의 죄, 실수를 남에게 뒤엎고 자신은 빠져나오고 있습니다. 할리우드 액션입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할리우드 액션을 심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형식적, 외식적 종교로 사람들에게 눈가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주님께로부터 외식자라는 회칠한 무덤이라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외식이라는 것이 배우를 뜻합니다. 배우는 과장된 몸짓과 표현을 하는 사람들로 이중성이 특징입니다. 그것을 주님께서는 책망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할리우드 액션을 연출했습니다. 조그마한 일에도 원망의 몸짓이 너무 강했습니다. 애굽을 너무 극대화시켰습니다.

12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의 원주민들을 거인으로, 자신은 메뚜기로 비하시켰습니다. 그것도 일종의 지나친 과장이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퇴장 명령을 받아서 열 명의 선수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할리우드 액션을 연출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실함으로 식물을 삼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신실하게 걸어가야 합니다.

 

3. 수가성 여인은 영적 공황에 처해 있습니다.

이번 월드컵의 응원전이 얼마나 열광적인지 어느 학자는 군중의 신내림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어느 네티즌은 한국 대표팀이 우승할 경우 히딩크교가 생길 것이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16() 진출을 겨루는 포르트갈과의 경기를 앞두고 한 축구팬은 영혼이 되어 그라운드에서 12번째의 한국선수가 되겠다"며 분신자살을 기도했습니다.

그런 기세로 한국 선수들이 폴란드 등 5개국을 차례로 이기며 여기까지 달려왔습니다. 거리마다 지방마다 열광했습니다. 교회 안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해 놓고 붉은 악마들이 응원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제 경기는 끝났습니다. 월드컵의 선수들은 뿔뿔이 흩어집니다. 더 이상 히딩크 사단의 태극전사들이 싸우는 모습은 볼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남겨진 것이 무엇입니까? 벌써 사람들은 걱정합니다.

무슨 재미로 살까?”

88올림픽이 끝났을 때 한 남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축구 때문에 일찍 집에 들어오던 가장들은 마음의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또 다른 것들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나 공황상태를 메울 수 있는 것은 당분간은 없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물이 주는 목마름입니다.     

 

수가성 여인도 정신적 공황상태를 맞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녀는 다섯 명의 남자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채울 것 같았지만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13,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다시 목 마른다! 이것이 스포츠 신도들의 한계입니다.

23세 난 여자가 쇼핑 중독을 나무라는 어머니를 살해했습니다. 23세의 소녀는 쇼핑중독에 빠져 5천만 원의 빚을 졌고 결국에는 청부로 어머니를 살해했습니다. 이 여인에게 쇼핑은 다시 목마를 수밖에 없는 정신적 공황이었습니다.

월드컵이 끝나고 밀려드는 정신적 공황을 메우기 위해 공휴일로 정하고 다시 전국민 축제로 마음을 기쁘게 하지만 오래 갈 수는 없습니다. 스포츠 열기로 가득 채워졌던 마음, 그 마음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대한민국의 남성들은 또 어떤 화끈한 것들을 찾아 나설까요? 소위 월드컵 세대가 되어버린 W세대들은 또 어떤 일에 대중적인 힘들을 발산하려 할까요?

그런 면에서 기독교인들은 훨씬 더 유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제 위치로 모시는 일입니다. 주님을 위해 더 열광하고 인생을 걸어 그분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다시 한번 만나는 것입니다.

 

<결론>

미국 하바드대학의 나단 푸시 교수는 사람이 세상을 정복하려면 세 가지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흔드는 깃발이 있어야 한다.

미칠 수 있는 깃발이 있어야 한다.

영원히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어야 한다.

붉은 악마의 응원깃발은 태극기와 함께 대형의 도깨비얼굴입니다. 이것은 동양의 아득한 신화 속의 군신입니다. 신화 속의 군신은 더 이상 우리들을 미치게 흔들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가 영원히 흔들어야 하는 깃발입니다. 예수 십자가의 보혈만이 우리가 영원히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되어야 합니다.

수가성 여인은 예수를 만나고 사람들에게 달려나가며 와 보라” “그리스도다!”고 외쳤습니다. 박지성이가 축구 아버지 히딩크에게 달려가던 바로 그 모습입니다. 안정환이 반지 세레모니를 보이며 환호하던 바로 그 모습입니다.

수가성 여인은 그보다 더 환호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구원과 평안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생애가 어떻게 끝났는지 알 길은 없지만 예수께서 쥐어주신 깃발을 미친 듯이 흔들며 평생을 골인하며 살아갔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외침이 있을 때 진정으로 승리하는 골인 생애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월드컵을 마무리짓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월드컵의 결론은, 축구가 아니라 예수입니다. 결론은 히딩크가 아니라 오직 예수, 바로 그 분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예수에게 외칩니다.

당신의 능력을 다시 보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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