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남자
여호수아 1장 1~4절
<서론>
지난주간부터 MBC에서 월화 드라마 <위기의 남자>가 방영되고 있습니다. <태조 왕건>에서 궁예 역을 맡았던 김영철과 황신혜가 주연으로 나오는 드라마입니다.
<위기의 남자>는 오늘날 한국 중년 남성이 겪는 고독과 좌절, 마누라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부속물로 알고 무관심하다 위기에 빠진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입니다.
잭 볼스윅은 <기로에 선 남성>이란 책을 썼습니다. 전통적인 남성상과 현대적인 남성상 사이에서 갈등하는 중년 남성들의 고민을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고든 맥도날드는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가?> 라는 책을 썼습니다. 잘 나가던 남자들이 어느 날 문득 창가에 서서 담배를 물고 상념에 빠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남자의 외로움, ‘남자의 위기’가 시작된다는 내용입니다.
본문에도 ‘위기의 남자’가 나옵니다. 여호수아? 아닙니다! 여호수아는 새로운 기회에 들떠 있습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모든 사람들 앞에 지도자로 우뚝 서 있는 여호수아! 그는 ‘위기의 남자’가 아니라 소위 “뜨는” 남자, 이제 “잘 나가기 시작하는” 성공한 남자입니다.
위기의 남자는 갈렙입니다. 사실, 여호수아의 자리에는 갈렙이 서 있을 수도 있는 자리입니다. 오늘 성경은 여호수아서(書)가 아니라 갈렙서(書)로 기록될 수도 있었습니다.
모세가 죽은 후 백성들의 관심과 기대는 온통 여호수아 밖에 없습니다. 모두들 여호수아를 향하여 박수치고 환호성 지르고 있을 때 뒤에서 박수치며 서 있는 갈렙! 사실, 여호수아의 자리에는 갈렙이 서 있을 수도 있는 자리입니다. 오늘 성경은 여호수아서(書)가 아니라 갈렙서(書)로 기록될 수도 있습니다. 1절은 이렇게 기록될 수도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여분네의 아들 갈렙에게 일러 가라사대”
그러나 그 자리에 여호수아가 서 있습니다. 갈렙은 여호수아 뒤 2인자라는 이름으로 남겨지고 있습니다. 갈렙의 위기요 남성의 위기입니다. 갈렙은 위기의 남자가 된 것입니다.
1. 갈렙은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모세는 40년 지도자 생활을 마감하며 그 자리를 여호수아에게 넘겨줍니다. 모세의 지도권 이양이 여호수아에게 기회였다면 중년 남성 갈렙에게는 위기였습니다.
백성 가운데 대중적 지도자는 갈렙입니다. 여호수아는 믿음도 좋고 지도력도 있었지만 모세의 시종입니다. 그러다 보니 대중들과 접해볼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가 회막을 지키며 하나님과 교제할 때 갈렙은 백성들과 함께 하며 백성들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여호수아보다 갈렙이 훨씬 더 대중성이 있었습니다.
12명의 정탐꾼들이 가나안을 돌아보고 보고대회를 열 때, 열 정탐꾼들이 비관적인 보고를 할 때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하나님 중심의 보고로 백성들의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 잡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백성들에게로 뛰어들어 안돈시킨 것은 갈렙입니다. 더군다나 갈렙은 유다 지파입니다. 유대 지파는 야곱에 의해 왕족으로 예언된 귀족 가문입니다.
이제 누가 모세의 후계자가 될 것이며 가나안의 지도자가 될 것입니까? 여호수아? 갈렙? 많은 사람들이 갈렙을 따랐고 갈렙이 가나안의 지도자, 모세의 후계자가 되리라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계자의 자리는 여호수아입니다.
아니 이럴 수가? 대통령은 이인제씨를 밀어주는 줄 알았는데 노무현씨가? 이인제씨는 위기의 남자입니다. 갈렙은 위기에 처해있을 수도 있습니다. 모세도, 하나님도, 여호수아에 대해서도 원망스럽습니다.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도 있는 위기상황이 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위기가 있습니다.
그것이 연령적인 위기일 수도 있습니다. 청소년 시기에 위기를 맞으면 탈선하기도 하고 학업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중년의 위기를 맞으면 명퇴, 우울증, 탈선. 노년의 위기를 맞습니다. 레이건은 치매로 강한 대통령의 이미지를 구기고 있습니다.
믿음의 위기, 경제적인 위기, 건강의 위기, 그에 못지 않은 위기가 자리의 위기입니다. 내가 승진해야 할 자리에 다른 사람들이 들어옵니다.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는 데 주역이었던 40대 중반 50대의 남성들이 영어도 못하고 컴퓨터도 능숙하게 다루지 못하면서 밀리고 있습니다. 위기에 서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서의 나의 위치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할 때가 되면 그것도 위기입니다. 남자는 돈을 버는 데만 급급했지 가정에서 애정을 표현 할 줄 모릅니다. 그러는 새 여성들은 취미생활을 즐기고 아이들은 아버지에게서 한 물 간 구세대의 전형을 봅니다. 그러다 보니 남성은 직장에서 퇴직 당하고 집에서는 무용지물이 됩니다. 여기에 40대 50대 남성의 위기가 있습니다.
여성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남편 뒷바라지 아이들 뒷바라지를 하다보니 어느 새 여자 나이 50세, 폐경이 되고 갱년기가 되면서 여자들은 우울증에 걸리게 되고 위기를 맞게됩니다. 한 남자의 위기만 아니라 시몬 보봐르가 말했던 <위기의 여자>가 되는 것입니다.
2. 갈렙은 조연 역할을 잘 감당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해서 위기 없이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곳곳마다 위기가 도사리고 있고 위기에 정면으로 노출되기도 합니다.
이런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이것이 삶의 지혜, 신앙의 지혜입니다.
탈무드에 이런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신은 우리 인생에서 종종 벽돌을 던진다. 이 벽돌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벽돌을 잘 피해서 벽돌로 집을 짓는 사람이 있다”
이 말은 결국 인생의 위기가 닥쳐왔을 때 그 위기로 망가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위기를 기회로 삼아서 재 도약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파도라도 파도에 휩쓸려 익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파도가 높을수록 더 스릴 있고 환상적인 파도타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갈렙은 어떻게 이 높은 파고(波高)를 헤쳐나갔을까요? 갈렙은 모세에게 대적했거나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포기하거나 사사건건 여호수아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연(主演)이 아니라 조연(助演)으로 만족했습니다. 만족할 정도가 아니라 주연만큼이나 열심히 해서 빛을 냈습니다.
축구에서 골을 터트리는 선수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시스트 해 주는 사람이 더 훌륭합니다. 그 사람들이 많아야 그 팀은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독들은 어시스트해 주는 선수들을 눈여겨보며 충분한 보상을 해주는 데 신경을 씁니다.
<태조 왕건>의 성공은 조연배우들이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궁예의 김영철, 견훤역의 서인석, 모두 1류 배우입니다. 최수종은 한참 후배입니다. 그 드라마에서 주연은 왕건 최수종이지만 궁예 김영철과 견훤 서인석이 열심히 했기에 주연은 빛났고 드라마 자체가 살았고 김영철과 서인석은 2001년 최고의 스타가 되었습니다. 오히려 시청자들은 왕건 최수종의 연기보다는 궁예역의 김영철을, 견훤역의 서인석을 더 명배우 명 연기자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주연이라고 누구나 성공하는 것이 아니고 조연이라고 누구나 실패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연 역을 맡아도 실패할 수 있고 조연 역을 맡아도 뜰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언제나 주인공 역이 주어져야만 일하는 사람들, 장(長) 자리를 맡겨주어야만 열심 내는 사람들만 있다면 교회는 위기를 맞습니다. 앞에만 서려는 똑똑한 사람들이 너무 많으면 교회는 의견 조율로 좋은 시간 다 보내버리고 아무 일도 못합니다. 그러나 앞에서든 뒤에서든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들, 명예에 연연하지 않는 안드레와 같은 사람들이 많으면 늘빛교회는 물론 개인도 위기를 넘길 수 있습니다.
PD가 평한 개그맨 서경석의 장점은 “그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프로그램 자체를 돋보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내 이름보다 교회 자체를 돋보이는 사람들이 많아야 합니다.
세례요한이 명예의 위기를 넘긴 것도 바로 갈렙에게서 배운 지혜로운 처신 때문입니다. 그가 등장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광했습니다. 그러나 이어 예수가 등장하면서 요한은 그 자리를 넘겨주고 자신은 비켜섰습니다. 그가 비켜서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였다면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2인자의 자세로, 조연(助演)의 자세로 낮아졌기에 예수가 극찬하신 것처럼,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최고의 인물이 된 것입니다.
요한의 위기는 그에게 지난 2천년동안 기억되는 2인자로서의 성공을 가져왔습니다. 갈렙은 위기의 파도타기를 잘 타고 넘어간 것입니다.
3. 갈렙은 온전한 삶을 살았습니다.
갈렙도 위기에서 이탈하지 않았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민수기 14:24은, 온전히 여호와만을 쫓아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그의 목표는 단지 모세의 후계자가 아닙니다. 가나안에서 지도자가 목표의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삶의 목표는 언제나 하나님 그 분이었습니다. 인생의 시련이 오고 기대가 무너졌을 때도 항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온전히 좇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일이라면 외로워도 그 길을 갔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는 일이라면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기쁨도 얻고 슬픔도 견디려 했던 “주바라기” “하나님 바라기”였습니다.
다윗에게도 위기는 많았습니다. 그 많은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은 온전히 하나님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울을 보지 않았습니다. 사울만 보았다면 원수로 보였을 것이고 다윗도 인간적인 방법들을 동원했을 것입니다. 그는 사울에게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름부음을 받은 왕의 모습만을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왕을 직접 해치는 위기에서 자신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갈렙은 멀리 내다봄으로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장치 이스라엘의 왕은 에브라임 지파인 여호수아 집안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유다의 집안인 갈렙의 가문에서 나왔습니다. 그가 얻은 헤브론은 다윗 왕이 7년을 왕으로 지냈던 곳입니다. 만약에 헤브론이라는 산지(山地)가 없었다면 다윗은 지지기반이 없어 더 많은 시련을 겪었을 것입니다.
<결론>
1942년 11월 8일, 미국 역사상 최고의 대화재가 보스턴에서 발생했습니다. 한 나이트 클럽에서 불이 나 493명이 타 죽고 2백여 명이 불 속에서 구사 일생으로 구출되었습니다. 당시 메사추세츠 병원에서 근무하던 런드만 박사는 그 중 1백여 명을 인터뷰했습니다. 놀랍게도 대 위기를 통과한 사람의 85%가 오히려 그 일로 새 출발하거나 종교로 돌아오거나 부부관계가 좋아지거나 나쁜 습관을 고치는 등의 좋은 열매를 거두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린드먼 박사가 이 연구 논문에서 사용한 ‘위기 개입’이란 말이 심리학에서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위기는 발전을 위한 절호의 기회이므로 누군가 개입해 주면 큰 성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위기는 있습니다. 인생의 위기는 바로 하나님께서 개입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 위기에 하나님께 자신을 맡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만약 인생의 위기에서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극복해 낸다면 더 큰 위업을 이룰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위기를 잘 살려서 기회를 만들어 가시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