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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한 의(義)(로마서 3:19~22)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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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중고서적에서
품절. 중고서적에서

하나님의 한 의(義

로마서 3장 19~22절

 

 

서론

제가 세례문답을 할 때 묻는 질문이 있어요. "오늘밤 당신이 죽게될 때 어떻게 되겠는가? 천국에 갈 것인가 지옥에 갈 것인가?" 물으면 "천국에는 가고 싶은데 죄가 많아서…" 라고 미안한 미소를 지어요.

저는 이제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오늘밤 당신이 세상을 떠난다면 당신은 어디에 가 있을 것입니까? 천국입니까 지옥입니까?"

 

1. 율법의 행위로 의로움을 얻지 못합니다.

구원의 교리를 깨닫지 못하는 분들, 양심적인 사람들이라면 아무래도 지옥을 말할 것입니다.      

왜 지옥입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구원받고 인정받을 만한 일을 한 게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평생 구원의 확신이 없이 신앙생활을 합니다. 어떤 때는 구원을 받은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당장 지옥에 갈 것 같기도 하고 시계추처럼 구원이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합니다. 왔다 갔다 하는 그 기준은 내 행위입니다.

 

또 하나의 오해는, "오늘밤 죽으면 저는 분명히 천국에 갑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요?" "저는 과히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교회도 나오고 있습니다. 천국에는 착한 사람 가는 것으로 알고있는 데 저는 지옥에 갈 정도의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라고 대답하는 사람입니다.

 

이 대답 속에는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행위로 결판 된다는 권선징악의 요소가 강하게 배어있습니다.

권선징악-선인에게는 상급이 있고 악인에게는 징벌이 있다는 인간 세상의 원칙. 이런 원칙이 신앙인들에게 까지 스며있어요. 사람이 교회에 열심히 잘 다니고 선을 행하면 보상과 구원이 있고 교회에 다니면서도 시원치 않으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생각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있습니다.

이런 원칙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행사할 수가 없어요. 구원받고 못 받고는 나에게 달려있지 하나님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행위 여하를 좇아서 천국에 데려 갈 수도 있고 지옥으로 보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교리를 상당히 오해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좋은 사람들 중에 감격이 없는 사람들이 있어요. 왜? 구원은 내 행위 여하에 따른 것이고 오늘 나의 마음에 구원의 확신이 있는 것은 내 선행 때문이니 하나님께 감사할 것도 없고 그러니 감격도 없는 것입니다. 자기 의와 행위를 자랑하고 교만한 바리새적인 교인이 되기 쉽습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의 무지와 오해를 20절에서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율법의 행위-즉 인간의 선행과 양심적인 생활과 종교심, 심지어는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고 헌금한 것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얻지 못하고 천국에 갈 자격을 얻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의로움은 사람의 의와 하나님의 의로 나타납니다. 사람의 의는 정직, 진실, 자선 등입니다. 그래서 주운 물건을 돌려주거나 자선을 행하면 좋은 사람으로 칭찬 듣습니다. 택시운전사들이 승객이 놓고 내린 물건을 찾아 돌려주면 대단한 선행으로 추켜세웁니다.

아들 며느리가 중풍에 걸려 병석에 누운 노모를 극진히 보살펴 드리면 효자, 효부상을 내립니다.

남의 물건을 강탈하는 사람도 많은 세상인데 주운 물건을 주인 찾아주고 부모를 살해하고 버리는 세상에 수십 년 병 수발했다는 것은 큰 효성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낮은 수준의 의로움입니다. 조금 높은 성현들에게만 가도 그 의로움이 아무 것도 아닙니다. 1억을 주워서 돌려준 사람들에게 1백만 원 주워서 돌려준 것은 선행도 아닙니다. 30년을 병시중 한 사람에게 4, 5년 병시중 한 것은 효성도 아닙니다. 그 효행을 공자 앞에 내놓았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것은 상 받을 일이 아니라 당연한 것입니다. 인간의 선행이란 게 사람의 수준에 맞추다보니 당연한 것이 자랑거리가 됩니다.

 

믿음의 의도 그렇습니다. 선을 행하고 교회생활 잘하고 헌금하고 술 담배끊고... 그래서 의인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것을 의지하여 천국에 간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들보다 못한 사람들에게나 의의 행위이고 선행입니다.

매일 하나님께 한 시간씩 기도합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눈에는 대단하게 보이나 하루 10시간씩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기도도 아닙니다.

헌금을 천만원한 게 의로운 행위처럼 보이나 10억 원을 헌금한 사람에게는 그것은 헌금도 아닙니다. 그 정도는 당연한 것.

사람들 입장에서는 믿음이 조금 좋고 믿음으로 착하게 사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의(義)가 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문제에서 실수했기에 즐거운 신앙생활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2. 의는 하나님께로부터 입혀져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이 의로워지는 것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사람이 죄가 없어야 하고 의인이 되어야 천국에 간다는 데 이런 저런 종교 행위조차 구원의 요소가 되지 못한다면 누가 의인이 되며 누가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까?

인간이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는 것은 사람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고행하고 수도하여 남들보다 높은 의의 수준을 이룰 수는 있습니다. 그 의는 사람들 앞에서는 의가 될는지 모르지만, 그래서 믿음이 좋다, 성자다, 라는 칭호를 듣고 높임을 받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당연한 것입니다.

인간 세상의 의(義), 자기에게서 나온 의는 지상 생활하는데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고 칭찬들을 만한 일이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내놓을만한 게 못됩니다. 하나님의 의는 너무 높고 하나님의 의의 수준은 너무 고차원이기 때문입니다. 오죽했으면 죄가 들어오기 전, 에덴동산에서 살았단 아담과 하와의 의로움도 하나님의 수준에 미치지 못했을까요?

 

천국에 들어가는 의로움은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 의는 하나님께로부터 와야 하고 하나님의 선포에 의해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의롭게 하는 방법을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의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 앞에 서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자신 속에는 의의 요소가 없음을 자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내 속에는 의로움이 없습니다. 나는 조상 대대로 죄의 자녀요 죄의 씨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나를 옷 입힐 수 있습니다!"라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설 때에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죄인의 옷을 벗기시고 의인의 옷을 입히시며 의인의 신분이 되었음을 선포해 줍니다.

 

왕이 감옥을 시찰. 모두들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 우겼습니다. 한 사람만 고개를 푹 숙이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너는 왜 말이 없는가?"

"죄인인 주제에 무슨 말을 있겠습니까?"

"여기는 모두 의인이라 하고 너는 죄인이라 하니 네가 죄인인 주제에 어떻게 아무 죄도 없다는 이들 속에 있겠느냐? 죄인들이 우글거리는 세상으로 가라!"

왕은 죄수의 옷을 벗기고 새 옷을 입혀서 세상으로 내보냈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사람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늘 이와 같은 죄인의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예수 믿기 전에도 죄인이었고 예수 믿은 후에도 죄인입니다. 목사가 되기 전에도 죄인이었고 목사가 된 이후에도 죄인입니다. 그전에나 지금에나 우리의 죄 성은 그냥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죄를 사하시려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절실히 간구하며 매달립니다. 그분 앞에서만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이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히시며 의인이라 선포하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희생과 공로로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의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입혀주시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의 의는 나에게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의의 옷은 내가 그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나를 선택하시고 나에게 옷 입혀주신 것입니다.

 

리나 스노우든이라는 사람은 전시 중에 실제로 있었던 일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전쟁에 참가했던 불란서 병사가 죽자 하사관이 그의 시신을 교회의 묘지로 운구(運柩)했습니다. 사제가 나와서 죽은 병사가 세례 받은 신자인가를 물었습니다.

"그건 모르겠다"

"미안하지만 병사의 시신을 묻을 수 없다. 교인들만 묻어야 하는 게 교회의 법이다"

병사들은 슬픔에 쌓인 채 전우의 시신을 이끌고 나가 교회 묘지 울타리밖에 묻었습니다.  

다음 날 병사들은 전우의 무덤이 별일 없는가 하여 다시 와 보았습니다. 그런데 울타리밖에 묘지가 없었습니다. 흙을 새로 팠던 흔적도 없었습니다. `이상하다…' 당황하여 그냥 돌아가려고 하는 데 사제가 찾아왔습니다.

"당신들의 요청을 들어주지 못해서 마음이 매우 아팠다. 그래서 울타리를 옮겨서 당신의 전우가 묘지 안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사제는 교회의 법도 지키면서 사랑의 법도 실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천국으로 들어가도록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손수 제정하시고 선포하신 법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미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이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는 법입니다.    

 

3. 이제는 의인이 되었음을 행동으로 증거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된 것입니다. 의인이 되었다는 것은 내 행실이 거룩히 산다는 게 아니라 나의 신분이 의인이 된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나는 죄인입니다. 그전처럼 죄를 짓습니다. 거짓말을 합니다. 나의 신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피 뿌림을 당한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대접을 받게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것만을 보십니다. 나의 행실은 이차적입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복을 받고 못 받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못 받고에 관한 것이지 구원의 문제와는 별개입니다.

 

우리의 신분은 하나님의 신분이고 거룩한 신분입니다. 우리 자신이 그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선처로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서로의 신분을 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서로의 행실은 자꾸 눈을 감아야 합니다. 그리고 거룩의 신분이 된 서로의 신분에 경의를 표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저는 아무리 마음속으로 미워했다가도 뉘우치고 교회생활 잘 해보려는 것 보면 금방 용서하고 다 잊어버려요.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한번 마음에 미움을 품으면 끝까지 미워하고 그 사람의 신분 자체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아요. 무서운 일입니다. 기독교 교리는 알고 있는지, 하나님 앞에는 어떻게 설지 무서운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인 노릇해서 의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의인의 신분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인이 되고 구원의 확신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행실은 무엇인가?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혜로만 구원을 받고 의인의 신분이 되었다고 하면 우리는 선을 행하고 좋은 일을 하지 않아도 구원과는 관계없다는 것입니까? 그런 질문은 질문 자체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인의 신분을 얻고 그런 사실을 강하게 의식하는 사람이 어떻게 선과 착한 행실과 깨끗한 양심에 관심이 없겠습니까? 그렇게 살려는 노력을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의인의 신분을 얻었으면 사람들 앞에서 그 의를 인정받으려는 노력을 평생 계속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보다도 선한 삶을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왕의 특사로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는 법적으로는 완전한 의인입니다. 누구도 그에게 죄인이라 제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양심으로는, 도덕적으로는 아직도 죄인입니다. 왕의 특사와 상관없이 사람들은 그를 죄인이라 여깁니다. 그 사람이 할 일은 선한 양심과 착한 행실로 자기가 의인이 되었음을 증명해 보이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선행은 바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고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의 의가 세상 사람들보다 못하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며 우리에게 의인의 신분이 되신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일입니다.

 

결론

모두들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성자(聖者)라고 일컬음을 받았던 사람을 세워놓고 칭찬하십니다.  

"너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구나"

"너는 넘어진 사람들을 일으켜 세웠구나"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성자가 눈물어린 눈으로 말했습니다.

"왕이여, 저는 선한 일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다 왔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누구보다도 선한 일을 했습니다. 그러고서도 내색하거나 자신을 내세우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내세웁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삶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오늘 죽으면 여러분들은 어디에 있을 것입니까? 천국입니까, 지옥입니까"

이런 질문에 대한 바른 대답을 위해서 늘빛교회는 여러분 곁에 있습니다.

 

니체는 제자가 계속 제자로만 남는다면 스승에 대한 고약한 보답이다.”라고 말합니다. 배운 것만큼 실천하고 실행해서 좋은 사람들,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입니다. 그러려면 교육의 소중함을 알아 많이 배우고 많이 가르치고 실행해야 합니다. 교육주일을 맞아 하나님의 은총이 교사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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