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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설교도 맛있다] (주일-금요기도회) 식어진 가슴에 불을 붙이려면?(마가복음 9:2~8)

by 강정훈말씀닷컴 2025.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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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금요기도회 겸용 설교]

식어진 가슴에 불을 붙이려면?

마가복음 9장 2~8절

 

오래 전에 <식어진 가슴에 불을 붙여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가슴이 식어져 있다는 것이겠지요. 가슴이 뜨거워 있으면 그런 책들을 사볼 필요가 없습니다. 행복하지 못한 시대일수록 `행복해지는 비결'이라는 책이 많이 팔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코로나 펜더믹 이전에 식여졌던 가슴이라면 펜더믹 이후에야 얼마나 더 식어져 있겠습니까. 신앙생활에 싸늘한 가슴은, 식은 가슴은 장애가 됩니다. 교회 안에서 식은 가슴으로 바라보면 냉소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목사의 설교가 가당찮고 장로들이 행세하는 것도 꼴불견이고 집사들이 활동하는 것도 보기 싫습니다. 냉소적인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도 역시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극복해야할 진정한 과제는 단순히 경제상황이 아닙니다. 서로를 대하는 국민들의 냉소 어린 시선, 싸늘하게 식어져 버린 가슴입니다. 지도자들은 식은 가슴에 불을 붙여주어야 하는 데 그 일들을 못하고 과거로만 우리를 눈돌리게 합니다. 그래서 서로 싸우고 비난하게 만듭니다. 요즘 한국 상황을 보면 한마디로 망조가 보이는듯한 심정입니다. 

 

이런 상황이 예수님 제자들 사이에서도 있을뻔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한 고백으로 칭찬을 받았지만 잘못된 언행으로 "사탄아~"라는 끔찍한 말을 들었을 때 후배들 앞에서의 수치심과 예수님에 대한 섭섭함, 분노로 인해 식어진 가슴이 되어 버렸다면 초대교회는 어찌되었을까요? 상상만 해도 아찔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 특히 베드로는 가슴이 식어져 버릴 이런 상황을 잘 마무리하고 다시 가슴에 불을 붙임으로 2천년 교회는 계속 불을 붙이는 역사를 감당해 왔고 오늘의 열정적인 사역자들, 목회자들, 선교사, 성도들을 배출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이런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본문을 봅시다.

 

베드로, 6일 전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베드로는 바른 고백으로 100점짜리 칭찬을 들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16:16-19).

 

17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절,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5)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6)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절,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런 칭찬은 누구도 들을 수 없는 귀한 칭찬입니다. 여기에서 겸손하게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러나 나서기 좋아하는 베드로는 주님께서 십자가행을 말씀하실 때 강력하게 항의하고 반대합니다.

 

22절, "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제자들을 대표해서 내가 말리지 않으면 누가 말리리요~ 하는 사명감으로, 내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사명이 있는 것처럼 강압적으로 붙잡고 항의하는 모습입니다.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마가복음 8:32의 수리아 시내 사본에는 본 장면을  '그가 마치 예수를 불쌍히 여기기나 하듯이'라고 표현하여 베드로의 인간적이며 정적인 측면을 강조합니다. 한마디로 인간적인 시각에서 예수님을 말리면서 야단치듯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고, 베드로는 어쩌다 이런 망발을 하고 말았을까요?

그래서 대단하게 칭찬을 들은 것만큼이나 호되게 책망도 듣습니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돌이키셨다는 것은, '이 딴 소리를 하는 제자가 누구인가' 어이가 없어서 돌아보았던지, 아니면 쓸데없는 말을 하는 베드로를 째려보았다/ 그렇게 상상해도 좋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를 힐책하십니다. 힐책은 책망보다 센 꾸짖음입니다.    

 

23절,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예수님께서 상당히 세게 나오십니다. 베드로를 향해 사탄이라고 한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를 사탄으로 본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의 항변이 사탄이나 할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베드로의 충동적인 언변과 행동은 구속사의 역사를 흔들어 버리려고 하는 사탄의 능간을 비춰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속히 그 그림자를 물리치시려 야단치신 것입니다.  

 

베드로, 모양새가 우습게 되었습니다. 제자들 앞에서 우쭐 했었는데 스승에게서 호된 야단을 맞고  후배제자들 앞에서 완전히 죽을 쑨 것입니다. 완전히 죽을 맛입니다. 죽을 맛은 창피함으로 얼굴을 들 수가 없게된 상황입니다. 얼굴은 수치심으로 발갛게 달아올랐고 가슴은 싸늘해버렸습니다. 베드로에게 수치심과 뉘우침으로 열기가 식어졌는데 무슨 힘으로 헌신하겠습니까?

 

우리도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결정과 선택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습니다. 역시 아무개 집사님이야 최고야! 여러 성도님들 앞에서, 특히 예배시간에 설교나 광고시간에라도 그런 말을 들으면 우쭐합니다. 자신이 자랑스럽지요. 그러나 일을 하다보면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나의 우쭐함이 내 눈을 멀게 해버리고 공연한 일을 벌립니다. 그래서 목사님에게 책망을 받고나 성도님들에게 비난을 받습니다. 그럴 때 속담처럼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을 심정"이 됩니다. 이런 심정에 대부분 영적인 침체로 빠지게 됩니다. '내가 다시는 교회 일을 하나 어디 두고보시우~' 뭐 이런 심정입니다.     

 

그런데 오늘 일어난 일 이후에 오히려 베드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고 평생 헌신합니다베드로의 평생 헌신은 내 열심, 내 담력으로 ‘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불을 받았습니다. 만약 인간의 힘으로 사도 사역을 했다면 세 번 부인했던 사람이 열번도 부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변화산상의 체험이 있었기에 어떤 어려움에도 단단한 반석이 되어 최대교회의 중심 리더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훗날 베드로는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힘으로 봉사하라고 합니다. 이때 단단히 혼이 나고 또 언행에 조심을 하겠다는 결심도 굳게 했던 것 같습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속에 헌신할 수 있는 에너지가 모아지려면 헌신의 불을 받을 자리로 가야 합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까요? 한국교회는 코로나 펜더믹으로 열기를 빼앗겨 버리고 식어져 버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광화문에서 시청 앞에서 역 앞에서 데모하고 열정적으로 모이고 외쳐대고 정권을 무너지게 하려고 정권을 지켜내려고 저렇게 뜨겁게 집회를 갖고 소리를 지르는데 지금 한국교회는 싸늘하게 식어져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이제 어디로 가서 식어진 열정에 불을 붙이고 그 열정으로 다시 일어서고 또 달려갈까요?

베드로를 통해 살펴봅니다.

 

베드로는 이날 실수를 많이 했습니다.

-말의 실수를 했습니다. 그는 항의하듯 따지듯이 예수님에게 나아갔습니다. 예수님에게 칭찬을 받자 뭐라도 된 것처럼 우쭐해졌습니다. 자신이 했던 고백으로 교회가 세워진다고 하니 우쭐할만도 하지요. 그래서 생각도 없이 예수님께서 십자가 행을 알리실 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22절) 하고 건방진 말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행동의 실수를 했습니다. 22절에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다고 나옵니다. 붙들고 하는 항변은 예수님을 벽쪽으로 몰아넣으면서 협박하듯이 몰아붙인 것입니다.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그러면 다 떠납니다. 이제 다 된 밥에 왜 재를 뿌리려 하십니까?" 

 

-판단의 실수를 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베드로는 이렇게 열정적으로 예수님을 두둔하고 앞으로 가려는 죽음의 길을 막는 것이 맏형 제자로서의 책임과 소임인 줄 알았습니다.

'내가 이럴 때 나서지 않으면 누가 나서겠나?'

 

-속죄사역을 가로막는 실수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속적인 권력과 영광을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 세상을 위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대속하기 위해서 오신 구세주였고 속죄물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거기까지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제자로서으는 스승의 죽음을 말리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스승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죽는다고 했을 때 "예! 그래야지요" 이렇게 거드는 제자는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도 그 정도에서 말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신의 소욕이지 성령의 소욕은 아닙니다.

   

베드로의 실수들은 충동적이었지만 그렇다고 가벼운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길을 하마트면 막어버릴뻔 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베드로의 행동이 얼마나 무모했던지 악담에 가까운 책망을 하십니다.

 

23절,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보통 사람들도 이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쁘거나 속상해 합니다. 사탄이라니요? 베드로 심정이 어찌했겠습니까? 스승님의 한 말씀에  웃고 울었는데... 조금의 칭찬에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는데 이젠 세상을 모두 잃어버린 심정이고 낙담 천만입니다   

앞으로도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끝까지 갈 것입니다. 하지만 예전 같은 즐거움과 열정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기억이 두고두고 그를 괴롭힐 것이며 쉽게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가슴이 무너져 버리고 식어져 버렸는데 무슨 힘으로 예수님 사후에 제자그룹을 끌고 갈 것이며 교회를 세울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심정을 다 아셨습니다.

지금의 상태로 놓아두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넘어가면 베드로에게는 종종 수치스러운 흔적으로 남게되고 일종의 외상적 장애 스트레스, 트라우마로 남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 앞에서 권위가 세워지지 않고 말빨이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곧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제자들과 헤어지기 직전인데 빨리 베드로의 식은 가슴에 불을 붙여 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세 제자들을 데리고 높은산 변화산으로 올라갑니다.  

 

높은산. 교회의 전통에 의하면 '다볼산'이라고 하며 가버나움과 지리적으로 근거리라는 점에서 '예벨에르묵'이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최근에 와서는 가이사랴 빌립보와의 근접성을(16:13) 들어 일반적으로 '헬몬산'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산은 갈릴리 호수 북방 안티레바논 산맥에 위치하며 스닐(3:8;대상 5:23), 시료(3:9)등으로도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헬몬산은 해발 약 2,850m로 그 산 봉우리에는 항상 눈이 덮여있습니다. 이 산은 요단강을 통하여 이스라엘 지역에 물을 공급해 주는 산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참조, 133:3). 이 산은 구약에서는 '시온산'(4:48)으로, 베드로는 훗날 '거룩한 산'(벧후 1:18)으로 불렀습니다.

 

높은 산에서 베드로는 다시 열기를 공급받습니다. 어떻게요?

-산을 오르는 동안 얼마나 자책하며 회개했겠습니까? 자기의 잘못과 실수를 인정하면서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하고 회개 기도의 걸음으로 묵묵히 주님을 따라가면서 하는 회개가 묵은 수치감들을 하나씩 떨구어냈습니다.  

 

-예수님의 깊은 배려에 굳어졌던 마음이 녹아내렸습니다. 지금 산행은 자신을 위해 것이라고 베드로는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야 어떻든, 베드로 생각에는 야고보와 요한은 그냥 불러주시고 사실은 자신에게 아직도 너에 대한 신회를 잃지 않았다는 뜻을 보여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승님의 따뜻한 마음을 읽었을 때 그의 상처는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변형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황홀했던지 그 변형된 예수님의 하나님의 모습을 보는 순간은 나와 세상은 간곳이 없고  6일 전에 있던 모든 일들은 깨끗하게 지워지면서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 황홀한 예수님의 모습 앞에서는 자신의 공로는 물론 실수조차도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높은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목격했습니다. 두 사람은 누구보다도 가슴이 뛰고 열정적으로 달려간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로 하여금 그들을 만나볼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이끌어 오셨을까요?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하나님의 파송을 받아 예수님을 만나려고, 예수님의 구속사역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고 여기까지 나타난 두 인물들을 대할 때 베드로의 가슴에 그들의 열기가 전이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식은 가슴에 다시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 베드로는 높은 산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17:5)  

 

베드로는 이 감격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훗날 베드로후서 1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6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7절,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절,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베드로는 높은 산에서 들었던 하나님의 음성과 예수님의 모습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그의 치부였던 닭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그 소리를 누르게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아무 것도 모르고 덤벼들었던 자신의 실수와 허물을 감싸주는 힘이 되었습니다.

 

그 힘으로 베드로는 다시 열정을 회복합니다. 단순한 카운셀링을 받아서 일어났다면 그 상처 속으로 다시 들어갔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과 예수님의 변형된 모습이 날마다 힘이었고 생기와 열기를 몸 안으로 빨아들이면서 그는 지치지 않는 사역자가 된 것입니다. 그의 기도는 날마다 강해졌고 그의 말씀은 날이 갈 수록 깊어졌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베드로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결론

이제 교회가 거룩한 일에 일어나야 합니다. 식은 가슴에 불을 붙이는 일을 해야 합니다. 증오하는 가슴에 사랑의 불들을 집어넣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먼저 불이 붙어야 합니다. 호렙산의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듯이, 그 불이 모세의 가슴에 붙었듯이 오늘 우리도 높은 산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을 다시 체험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와야 합니다.

 

부활 이후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 고백합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24:32)

 

그 고백이 이제 우리에게 와야 합니다.

그 뜨거움이 이제 우리에게 와야 합니다.

그럴 때 내가 살고 우리교회가 살고 교회가 살면 한국교회가 살고 한국교회가 살면 대한민국이 살아나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가 그 일을 위해 오늘 기도하러 나온 것입니다. 기도 많이 하시고 응답도 많이 받으십시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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