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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설교도 맛있다] 형편을 보고 형편대로 움직이다(열왕기상 19:1~8)

by 강정훈말씀닷컴 2025.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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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훈 목사 신간 <모세도 그랬어> 한달만에 3쇄 돌입!!!

"모세'는' 아니고, 모세'도'라니, 토씨 하나를 바꾸어 우리를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인도한다"

(김영진 성서원회장   기독교신문 2025. 9.28 서평)

[끔찍했던 코로나시절에 했던 설교입니다.]

형편을 보고 형편대로 움직이다

열왕기상 19:1~8

 

서론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한국에서는 진정세를 보이고 있다하지만 세계는 아직도 코로나19 불안감으로 떨고 있습니다.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피해가 많은 이탈리아는 어제까지 18,000명 확진자에 사망자가 1,266명을 넘어섰습니다. 유럽이 코로나 바이러스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독일 인구의 60~70%까지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 최악은 오지도 않았다”라고 경고했습니다. 이어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의 연대와 상식(이성), 서로에 대한 마음이 시험대에 올랐다”고 했습니다.

 

정확한 지적입니다. 지금은 눈앞에 보이는 ‘위기감 증폭’이 전부처럼 보이지만 사실 서로에 대한 연대, 경계심들이 더 무섭습니다. 기침만 해도 노려보고, 아는 목사님은 버스에서 기침을 했는데 모두 주시하는데 견딜 수가 없어 도중에 하차해서 다른 버스로 갈아탔다고 합니다. 확진자의 동선에 따라 가게 문을 닫고 확진자가 되면 ‘공공의 적’이 되고 있습니다. 확진자가 나온 교회들은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우리의 이성이 패닉상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서로 간에 마음의 연대가 이루어지고 과학과 이성이 작동되어야 하는데 너무 전염성이 강하다보니 대한민국 역시 연대감이나 이성이 마비상태입니다.

 

엘리야는 모세 다음으로 굉장한 이적을 보였던 사람입니다. ‘기적전문선지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능력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눈앞에 닥친 형편, 상황을 보고 의기소침에 빠지는 너무도 뜻밖의 모습을 보입니다. 하늘에서 물과 비를 내도록 기도의 능력을 보인 사람!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상대할 만큼 배짱이 있는 선지자가 이외의 행동을 보입니다.

 

3절, 그가 이 형편을 보고…

 

‘형편’은 일이 되어 가는 상태나 경로 또는 결과를 말합니다. 형편을 잘 감당하는 사람을 형편이 좋은 사람이라고 하고 형편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을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는 앞장 18장에서만 해도 대단한 사람입니다. 나중에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해서 더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19장에서만큼은 형편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의 형편 앞에서 도망질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셰익스피어의 말을 빌린다면 19장은 엘리야에게는 지워버리고 싶은 장면일 것입니다. 형편없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왜 형편없는 모습을 보였나요?

1. 사람의 형편만 보았지 하나님의 형편을 보지 못했습니다.

사람의 형편은 2절, 내일 이 맘 때 이세벨이 죽인다는 형편입니다. 최고의 통수권자 이세벨은 얼마든지 군대를 동원하고 경찰을 부릴 수 있습니다. 그런 권력자가 24시간이라는, 시한을 정해놓고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갈멜산에서의 대결이 끝나면 아합과 이세벨의 정권은 망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우상선지자 450명을 죽였으니 이젠 경건한 자들이 일어나 정부를 접수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니 기대했던 형편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세벨이 독기를 품고 온갖 행정력을 동원하여 엘리야를 체포하고 죽이려 합니다. 선지자는 그 형편에 도망을 칩니다.

 

갈멜산의 엘리야는 눈도 귀도, 심장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850명도 하찮은 조무래기에 불과했고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형편이 아니라 이세벨의 형편만을 봅니다. 그래서 도망합니다. 도망은 일시적인 방편입니다. 그가 이 형편만을 보지 않고 저 형편, 즉 갈멜산에서의 형편을 보았다면 이리도 쉽게 포기하고 도망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문을 닫은 교회들도 자신들의 형편에 기가 막힙니다. 두 주간만 예배를 중단하면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얼른 문을 닫았는데 지금도 같은 형편이기에 예배를 재개할 명분이 없습니다. 그러니 벌써 영적인 피폐함에 죽을 노릇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교회도 정부와 사회적 압박에, 우리 교회에 확진자가 생기면 어쩌나… 이런 저런 형편…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위기 앞에서 불안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간에도 구청에서 예배를 드리나, 연락이 옵니다. 지금이 사방으로 우겨쌓임을 받는 그런 형편입니다.

 

이럴 때 이 형편을 보지 말고 저쪽의 형편, 하나님의 형편을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엘리야에의 앞날에 멋진 계획을 세워놓고 있습니다. 승천의 은총을 내리시고 남은 사역은 엘리사를 세우고 사역을 이어갈 계획을 세워놓았는데 그 형편을 보지 않고 이세벨의 형편만을 보았기에 엘리야는 그 형편에 굴복하고 달아나 버립니다. 아무리 대단한 능력자였지만 하나님의 형편으로 보지 않고 사람의 형편으로 보니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우리는 엘리야의 실수를 봅니다. 반면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이 형편, 이세벨이 깔아놓은 형편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께서 깔아놓으시는 형편을 보며 이기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2. 사람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였지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막았습니다.

2절,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이세벨의 협박소리가 크게 들렸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내가 엘리야를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시키려는데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론 성경에는 없는 이야기입니다. 만약에 엘리야가 사람 목숨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형편과 하나님의 계획을 기대하고 있었다면 이렇게 도망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자꾸 사람들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옵니다. 욥에게는 고통 그 자체도 힘들었지만 친구들의 목소리가 더 힘들었습니다. 오죽했으면 “너희들은 나에게 재난을 주는 위로자”(욥16:2)라고 제발 그만하라는 말까지 했겠습니까?

 

우리가 어려운 형편에 처하면 사람의 목소리, 해결방법, 비판… 등의 목소리가 크게 들립니다. 이런 소리에 너무 휘둘리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이 시편 11편 1절에서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잃어버린 회중시계를 찾는 법은 고요히 침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선가 채각채각! 소리가 들립니다. 지금과 같은 위기일수록 뉴스에, sns를 끄고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의 형편에서 하나님의 형편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예배중단 현실 앞에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합니까? 예배를 드렸느니 말았느니… 영상예배가 은혜가 있느니 없느니… 영상예배가 예배냐 아니냐… 그걸 논할 때가 아닙니다. 한국교회 137년의 역사에 왜 예배당 문을 닫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는가, 그걸 봐야 합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재림신앙이 빠져버리면서 교회를 세속주의로 흘러갔습니다. 위선과 갈등들이 교회 안에 바이러스처럼 퍼졌습니다. 교회는 형식주의가 되었습니다. 이번 일을 당했을 때 교회는 세상의 공격대상 1순위가 되었습니다. 신천지의 영향이지만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라기에서 말한 것처럼 한국교회의 문을 닫아줄 누가 나왔으면 좋겠다(말1:10) 그런 심정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문이 닫혔습니다. 문을 닫을 ‘그 누가’가 신천지라는 것이 속상합니다. 그래도 문을 닫았으면 예배의 형식을 놓고 왈가왈부하기 전에 회개의 역사들이 일어나야 했습니다. 베옷을 뒤집어쓰지는 못해도 잘못했습니다! 회개의 영으로 한국교회가 충만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런 형편에서도 행정당국의 소리에나 귀를 기울이고 세상 민심의 소리에나 귀를 기울여 예배를 중단하고 예배형식을 바꾸는 일에 분주합니다. 코로나를 통해 교회 문을 닫게 하고 예배를 중단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읽지 못한다면 한국교회는 국가정책에 동조하느라 아주 잘못된 선례를 남기는 걸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이후의 한국교회는 머리카락을 잃고 영성을 잃은 삼손처럼 우스운 모양새로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생명을 잃은 한국교회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런 형편 앞에 도망을 가고 숨을 생각들을 하지 말고 그 앞에서 회개의 예배로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교회가 승천합니다!

3. 이세벨의 눈만 보았지 순결한 7천 명의 눈을 보지 못했습니다.

죽을 형편에 광야로 도망 간 엘리야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10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이는 무릎을 꿇은 변절자들을 말합니다.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이는 믿음을 지키자 순교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오직 나만 남았는데…. 이는 교만한 말이기도 했지만 영적 폐쇄공포증에 걸려있습니다. 나만 당하고 나만 걸리고 나만 문제가 있다! 남들은 모두 평안한데 나 혼자만이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착각할 때 엘리야는 좌절하게 됩니다. 사실 엘리야만 당하고 있는 형편이 아닙니다.

 

18절,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칠천 명, 참으로 귀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적을 행한 적도 없고 갈멜산에서 폼 나게 이름을 날린 적도 없습니다. 그냥 무명의 선지자들로 시련을 견디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엘리야는 혼자만 당한다고 생각했기에 낙심 중에 있게 된 것입니다. 이세벨의 눈동자가 아니라 숨어있는 7천명의 눈동자를 보았다면 훨씬 더 그들과 함께 용기 있게 처신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번에 예배중단의 사태를 보면서 그래도 주일예배를 지켜내는 것은 능력과 실력을 갖춘 엘리야와 같은 대형교회가 아닙니다. 작은 교회들, 개척교회들이 한국교회 주일예배를 지켜냈습니다. 평소에 실력도 없고 규모가 작아 노회나 총회나 동창회에 나가서도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던 그 평범한 목사들이 주일예배를 지켜낸 7천 명의 무명의 목사가 되고 교회가 된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토를 큰 강들만이 기름지게 하는 것입니다. 샛강들이 대한민국을 푸르게 합니다. 작은 교회들이라고 그 힘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명의 목사요 교회들이라고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바로 무명의 7천명이고 여론의 향방에 관계없이 오직 하나님의 얼굴만을 구하며 한국교회를 지켜나갈 교회들입니다.

 

우리에게 들려오는 이세벨의 소리, 너를 죽이겠다, 자녀를 죽이겠다, 내 사업장을 죽이겠다-코로나 바이러스를 통해 지금 우리가 듣고 있습니다. 이 기회에 도망갈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 중심으로 세우고 무명의 7천 명들을 발견하고 같은 믿음으로 견디어야 합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내야 합니다.

 

2002년 중국은 사스(SARS,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로 수백 명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사스를 통해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한 회사가 있습니다. 중국 전자상거래 시장에서 80%에 이르는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 알리바바입니다. 영어강사 출신 마윈이 1999년 창립한 온라인쇼핑몰 알라바바는 사스를 통해 성장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큰 혜택을 봤습니다. 사스로 밖에 나가기 두려웠던 사람들이 온라인 쇼핑에 나서면서 급성장 기회를 얻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모든 게 불운처럼 보였습니다. 알리바바는 당시 중국시장 90%를 선점한 세계적인 전자상거래 쇼핑몰인 미국 회사 이베이(eBay)에 맞서 소비자끼리 물건을 사고 파는 전자상거래 플랫폼을 준비 중이었습니다. 내부에서조차 “도대체 이베이에 어떻게 맞선단 말인가”라는 반발이 심했습니다. 하지만 마윈은 고집을 꺾지 않았고 비밀스럽게 준비했습니다.

 

마침 알리바바 직원 중 사스 의심 환자가 나왔습니다. 마윈은 전 직원에게 마스크를 배포하고, 모든 직원을 한 주간 집에 있게 했습니다. 소문 없이 새 서비스를 준비하기 딱 좋은 환경에서 알리바바는 새 플랫폼 타오바오를 선보일 수 있었습니다. 우한에서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하자마자 알리바바가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마스크를 신속하게 사들인 데는 이런 사스 때의 경험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결론

한 소년이 벌에 쏘였습니다. 세상의 벌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실수하셨다면서 웁니다. 어머니가 아이들 달래며 토스토에 꿀을 발라줍니다. 맛있게 먹습니다. 그것은 벌꿀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하자 소년은 “벌에게도 좋은 면이 있군요!” 하면서 생각을 새롭게 했습니다. 꿀벌을 보면서 괴로움을 주는 원수로도 볼 수 있고 맛과 건강을 주는 친구로도 만들 수 있습니다.

 

이 형편을 보고…

“상황은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 그 사람의 본질을 보여줄 뿐이다”

 

상황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 그것은 우리의 일생을 변화시킵니다. 어떤 관점에서 이 형편을 보고 내게 주어진 삶을 보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아야 하고 긍정마인드로 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삶을 수도 없이 공격해오는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이세벨들을 물리치며 이기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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