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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좋은 밭 만들기] 당신의 마음 밭은, 가시 밭입니까?(마가복음 4:3~9)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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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밭 만들기]

당신의 마음 밭은, 가시 밭입니까?

마가복음 4장 3~9절

서론

한 숟갈의 황토 속에는 2억 마리의 미생물이 살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보통 흙이지만 태양이나 습기에 접촉되면 엄청난 생명력을 발휘합니다. 인생이 이런 흙의 요소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속에 엄청난 생명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죽어버리면 생기가 없기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살아있다면 엄청난 생명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생명력으로 우리가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지금까지의 두 종류의 마음 밭은 밭 자체가 문제입니다.

첫 번째 마음 밭은 길바닥 마음-너무 딱딱해서 믿음의 열매는 물론 행복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강퍅한 마음입니다.

 

두 번째의 밭은 바윗돌-뭔가에 눌려있는 마음입니다. 무엇이 한(恨)이 되어 눌러있고 학벌이나 가정에나 불행한 어떤 사건이 바윗돌이 되어 가슴을 누른 마음 밭입니다. 행복하다가도 그 생각만 하면 쇼크가 오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그러면 마음의 상한 운전사는 지난 시절의 그 불행의 시간으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행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세 번째 밭은 아주 좋은 밭입니다.

7절,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는 기름진 곳에서 잘 자랍니다. 기름진 곳에는 풀도 잘 자라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성품은 좋아서 잘 자라는 데 주변 환경을 정리해 주지 못해서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1. 가시밭은 염려로 가득 찬 심령입니다.  

우리 마음은 굉장한 에너지를 갖고 있습니다. 한 숟갈에 2억 마리의 미생물이 있다면 우리 육체를 흙으로 따진다면 얼마나 많은 미생물들이 있겠어요? 그만큼 기름진 땅입니다. 거기다가 8만 4천 개의 수많은 감성들이 움직이면 인생의 풍성함이란 말할 수 없습니다.

 

행복은 인간만이 갖고 있는 특권입니다. 들의 꽃도 날아가는 새들도 하나님께서 입히시고 먹이시는 것은 틀림없지만 인생처럼 행복을 느끼며 누리며 살아가는 에너지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좋은 행복의 에너지를 가졌음에도 왜 행복한 삶을 누리지 못합니까? 그 에너지를 행복의 방향으로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씨앗이 뿌려졌으면 믿음이 점점 자라나야 하고 믿음의 능력과 믿음으로부터 오는 즐거움과 기쁨들을 맛보아야 하는데 전혀 그런 기쁨들을 누리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행복의 에너지, 생명의 에너지가 자꾸 다른 쪽으로 나가버리기 때문입니다.

어떤 쪽? 주님께서 해석하셨습니다.

 

18, 19절-“또 어떤 이는…” “세상의 염려와”

 

염려와 걱정으로 자꾸 에너지가 쏟아져 버립니다. 부질없는 염려, 걱정으로 에너지를 쏟아버린다면 행복으로 나가야 할 에너지도 빼앗겨 버리기에 행복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자랄 만 하면 걱정으로 날려버리고 행복할만한 하면 염려로 날려버립니다. 이런 경우에는, 염려와 걱정의 가지치기부터 먼저 해야 합니다.

 

인디언들 사이에서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 한 토막입니다.

고양이에 대한 두려움으로 끊임없이 고통받는 쥐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고양이로 인해 너무 고통스러워하자 마법사가 쥐를 고양이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고양이가 된 쥐는 편안할 줄 알았는데 개 때문에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마법사에게 부탁해서 개로 변신했습니다. 개로 변신하면 두려움이 없겠다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호랑이가 무서워졌습니다. 호랑이로 변신시켜 주었더니 이번에는 사냥꾼이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마법사가 말했습니다.

“다시 쥐가 되어라! 쥐의 심장밖에 가질 수 없으니 나도 어쩔 수 없구나!”

항상 불안해하는 인간을 꾸짖고 있는 작은 이야기입니다.

 

노먼 빈센트 필 박사에 의하면, 사람의 걱정 중에 절대로 발생하지 않을 사건에 대한 걱정이 40%,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한 걱정이 30%, 별로 신경 쓸 일이 아닌 작은 것에 대한 걱정이 22%, 어떻게 바꿀 수 없는 사건에 대한 걱정이 4%, 나머지 걱정의 4%만이 우리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96%의 쓸데없는 걱정 때문에 평생의 기쁨을 쏟아버리며 살다가는 존재입니다.

어니 젤린스키는 그의 책에서 이를 “모르고 사는 즐거움”이라고 말했습니다.

 

믿음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믿음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마음을 가꾸는 일도 함께 중요합니다. 같은 설교를 들으며 같은 은혜를 받으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행복해 하고 어떤 사람들은 행복하지 못하는 것은 걱정과 염려라는 인생의 가시덤불을 정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생쥐의 심장이 아니라 헛된 염려들을 하지 못하게 주님의 심장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폭풍 속에서도 주무시던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이기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맡기는 삶-이거 없으면 행복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거 놓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2. 가시밭은 돈으로 가득 찬 심령입니다.

믿음생활을 하면서도 믿음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뭔가에 노예가 되어있습니다. 그 노예에 매여 믿음이 자라지 못합니다. 마치 개들이 매여있고 코끼리들이 매여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믿음을 어느 선 이상으로 자라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19절 “재리의 유혹과”-돈입니다.

돈 욕심-이거 욕심 중에서 큰 욕심입니다. 이런 욕심은 결정적으로 믿음의 성장을 방해하며 인생의 즐거움을 돈으로 왔다 갔다 하게 만듭니다. 모든 사람을 돈으로 평가해 버립니다. 부부간의 진정한 사랑도 돈으로 전락시켜 버립니다.

 

평생 예수 믿어도 아파트 사고 파는 것 이상으로 믿음이 자라지 못합니다. 예수 믿어 돈을 벌고 예수 믿어 축복 받는 것 이상으로 자라지 못합니다.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이다가도 돈 이야기만 나오면 움추러 듭니다. 설교를 잘 듣다가도 돈 이야기만 나오면 순식간에 “설교가 죽 썼다!”며 설교자를 매도해 버립니다.

돈 때문에 우정이 자라지 못하고 돈 때문에 형제간에도, 시댁 식구들과도 화합하지 못합니다. 돈에 대해서 어떻게 욕심이 많은지… 돈에서 풀리지 않는 한 믿음의 즐거움은 한계가 있습니다. 왜? 돈의 즐거움은 믿음의 즐거움을 삭혀버리기 때문입니다.  

 

정조 때의 인물 김학성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의 삯바느질로 서당공부를 했습니다. 비 오는 날 낙숫물 소리가 이상해서 어머니가 파보았더니 금은보화가 가득한 솥이 묻혀있었습니다. 난리에 묻어놓고 피란 가서 죽은 사람의 재물이겠지요. 어머니는 다시 묻고 이사했습니다. 자식 둘이 대성한 후 ‘재(財)는 재(災)’이기에 이사 했노라며 눈을 감았습니다.

 

남미에 이민 간 교포가 돈독으로 죽었습니다. 종이돈을 손에 침을 뱉어가며 일일이 세는 재미로 살다가 돈의 균이 옮겨 결국 죽었다는 것입니다.

 

돈은 욕심의 대상이 아니라 숭배의 대상이 되었기에 믿음이 자라는 것만큼 돈 믿음으로 자라기에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돈은 하인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돈을 주인으로 숭배하면 그것처럼 추저분한 주인이 없습니다. 남을 위해서 희생한다는 것,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 것을 나눠준다는 것-돈에서 해방이 되어야 우리 믿음이 제대로 열매를 맺습니다.

3. 가시밭은 허영과 사치로 가득 차 있는 심령입니다.

우리 마음 밭에는 생명의 에너지가 있습니다. 이것을 좋은 쪽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쓸데없는 곳으로 생명의 에너지를 사용합니다. 그러면 생명의 에너지가 소모되고 행복할 수 있는 에너지도 소멸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19절에서 “기타 욕심이 들어와” 결실을 방해한다고 했습니다. 기타 욕심-남에게 보이기 위한 믿음, 체면 중심의 믿음은 생명의 에너지를 풍성히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부질없는 경쟁심입니다. 남편끼리 비교하고 자식들을 비교합니다.

이웃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것도 결국은 가시덤불입니다.

남들이 인정받으면 나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그 함정에 빠졌습니다.

한국의 며느리들은 생명 에너지를 시어머니에게 빼앗겨 버립니다.

 

이런 허례의식은 목회자들에게도 있습니다. 건물, 교인 수, 좋은 승용차-이런 것들이 결국은 부질없이 바쁘도록 합니다. 행복을 잃어버리도록 합니다.

 

어느 목사는 최면술을 배우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쓰러뜨립니다. 사람들을 넘어뜨리기 위해서-그것 기독교 아닙니다. 최면술로 넘어지는 것-그것 기독교가 아닙니다. 진정한 기독교는 내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넘어져야 합니다. 교만이 넘어지고 혈기가 넘어지고 진실하지 못한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엎드려져야 합니다. 그래야 기독교에 능력이 있고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기독교가 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목회자의 능력은 남을 넘어뜨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신이 넘어져야 합니다. 자신들이 욕심을 버릴 때 능력이 일어납니다. 물질에 대해 욕심을 버리고 목회에 대해 인간적인 인기와 명예심을 버릴 때 거기에서 진정한 목회자의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 방법들은 육신의 믿음으로 자라나도록 합니다. 교회를 철저히 자기 중심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 내 자신을 내어놓고 십자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접붙임을 당하고 새로운 믿음의 싹들을 피워내야 하는데 허위와 체면으로 포장합니다. 마음 속에는 욕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허영과 사치로 채워진 마음 속에는 옥토가 제대로 자리잡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들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결론

이제 우리 자신들을 돌아봅시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어떤 덤불들이 가득 있습니까? 걱정, 염려, 욕심, 허영과 사치… 이것 끊지 않으면 생명의 에너지를 빼앗기게 됩니다.

 

생명의 에너지가 빼앗기면 내 마음에는 상한 운전사가 들어와 앉습니다. 술 취한 운전사는 판단력과 분별력을 잃습니다. 그러면 잠시 보이는 넓은 길로 가게 되고 인생을 허비하게 됩니다. 덤불을 끊어야 합니다. 주님에게 운전석을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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