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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설교가 맛있다] (금요기도회) 겟세마네엔 문제 해결이 있다! (마태복음 26:36~46)

by 강정훈말씀닷컴 2026.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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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엔 문제 해결이 있다! 

마태복음 26장 36~46절

 

 

세상에 문제없는 곳은 없습니다. 문제가 없다면 공동묘지입니다. 죽은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없습니다. 반대로, 살아있다면 누구에게나 문제는 있습니다. 문제는 살아있는 자들이 치러야 할 대가입니다.

예수님에게도 문제가 생겼다. 인류 구원을 위해 오셨지만,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는 길이 예비되었습니다. 처음부터 각오하고 성육신하셨지만 주님 앞에 하나님의 외면, 십자가에서의 하나님의 외면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겟세마네가 있는가

예수님께서 문제만 생기면 찾아가는 장소는 겟세마네 동산입니다. 겟세마네는 문제를 해결하는 곳입니다. 제자들에게 하소연하지 않고 상대와 싸우지 않고 온유하신 마음으로 수용하면서 겟세마네를 찾아 치유와 회복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도 거기만 가면문제가 해결되는 습관적으로 가는 곳이 있어야 합니다. 친정에서 실컷 울고 오면 가슴은 후련하지만, 눈물로 하소연한 아픔과 상처들이 어머니에게로 고스란히 이동합니다. 어머니에게 아픔을 안겨주고 돌아와서 나는 이제 괜찮다고 하지만 어머니는 괜찮지 않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어머니에게 상처가 나고 어머니가 힘든 것입니다.

 

유대 전승에, 이삭은 어려운 문제만 발생하면 모리아산에서 죽을 뻔한 바위를 찾아 기도하며 매달렸다고 합니다. 이삭은 모리아산의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자기 대신에 희생될 제물을 손수 준비해 두셨던 하나님을 생각하며 어려움을 아뢰고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사는 게 힘들고 어려우면 뽕나무로 달려가 그 아래에 앉아 울며 예수님을 회상했다고 합니다. 모두 전승이지만 그럴듯합니다.

다윗은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을 찾아 여호와는 나의 도움이시요 산성이시여 나의 피할 바위시라하나님을 찾아 고백하며 어려움을 타개합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찾은 대신에 신접한 여인을 찾았다. 무당 점쟁이를 찾은 것입니다. 이후, 전쟁에서 세 아들과 함께 비참하게 전사했습니다. 하나님을 찾은 사람은 문제가 해결되고 점쟁이를 찾았던 사람은 자기만 죽은 것이 아니라 일가족이 몰살되는 참극을 당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겟세마네는 교회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교회를 욕하고 비난해도 교회는 내가 주님을 만난 곳이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한 곳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던 곳입니다. 교회의 내 자리가 신앙의 친정집, 겟세마네가 되어야 합니다. 울어도 못 하고 힘써도 못 하는 문제는 오직 하나님을 만나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요 믿음입니다. 하나님 안에 문제 해결이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하려 습관적으로 겟세마네를 찾으셨던 것입니다.

겟세마네에서 결사적으로 기도하시다

예수님께 문제가 생겼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생겨난 문제입니다. 얼핏 보면 십자가를 져야 하는가, 피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겟세마네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심정은 고민하고 슬퍼하사’(37)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38)다고 할 정도입니다.

얼마나 죽기 살기로 기도했으면 의사 신분인 누가는 리얼(real)하게 기록합니다.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22:44)

 

간절히 기도한다는 말은 간()이 저릴 정도로 기도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셨으면 땀과 피가 나왔을까? 땀이 핏방울같이 보이는 이런 현상은 혈액의 빛깔을 가진 땀이 나는 색한증의 일종입니다. 피부의 작은 출혈로 혈액이 모세관벽(毛細管壁)을 통하여 땀샘에 들어가기 때문에 생기는 드문 질환입니다.

이처럼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셨던 그 날의 기도는 결사적(決死的)입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힘을 다하는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사적으로 기도하셨는데 어떤 면에서 그리 결사적이었을까.

 

우선, 시간에서 결사적입니다. 예수님은 모두가 잠자리에 들었던 시간에 기도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모세부터 지켜 왔습니다. ‘하가다라는 유월절 예식서가 있습니다. 보통 4시간 정도 걸려야 이 예식을 다 마칠 수가 있습니다. 해가 지면 시작됩니다.

예수님도 저물 때 마가 다락방에서 유월절 예식을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도 일일이 씻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로 오셨습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피곤했는지 곤히 잠들었다. 그런 시간에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남들이 잘 때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장소에서도 결사적입니다. 갈멜산이나 변화산으로 가신 것이 아닙니다. 겟세마네는 쥐어짠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 날 밤에 겟세마네에서 쥐어짜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하셨습니다. 보통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들고 기도하는데 얼굴을 땅에 파묻고 기도하였다는 말은 성경에 이 곳 밖에 없습니다. 그런 자세는 결사적으로 기도하시는 모습입니다.

 

간절히 반복하는 기도에서도 얼마나 결사적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같은 기도를 세 번 반복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세 번 반복하여 잤다. 같은 기도를 한 장소에서 한 시간에 반복하였습니다. 기도는 반복입니다. 이루어질 때까지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확신이 올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승리의 확신이 올 때까지 부르짖어야 합니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올 때까지 기도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처절하리만큼 결사적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기도는 위선적이었습니다. 이중적인 저의(底意)가 있었다. 예수님의 기도는 솔직하게 심정을 토로하는 기도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처럼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무엇이 그리 두려웠기에 기도에 결사적이었을까. 주님은 바로 이것을 가장 두려워했습니다.

할 수 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하옵소서

이 잔(), 육신의 고통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런 것이었다면 공격을 피함으로 그 잔을 피할 수도 있습니다. 그분이 두려웠던 것은 하나님의 외면입니다. 하나님의 외면 없이 죽고 사역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하나님의 사랑의 눈길이 멈추고 관계가 단절되는 것, 그것이 바로 피하고 싶은 잔으로 주님은 그걸 두려워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이런 것입니다.

아버지. 십자가는 내 몫이니 지겠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린 나를 죗덩이로 보시고 혐오함으로 나를 외면하지는 말아주세요. 그런 순간은 피하고 싶습니다. 그런 잔은 마시지 않는 은총을 허락하소서.”

우리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보다 하나님의 외면을 더 두려워하셨던, 오직 하나님 사랑 안에서, 인정 속에서만 살아가고자 했던 분입니다. 그래서 다음 날, 십자가에서 정오의 빛이 사라졌을 때 그분의 임재가 철회된 것을 느끼고 너무 두려워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부르짖는다. 그만큼 하나님의 외면이 피하고 싶었던 잔이었던 것입니다.  

겟세마네에서 순종의 기도로 응답받다

예수님께서는 앞에 있는 잔을 피해보고자 세 번의 기도를 계속하십니다. 같은 문장이요 같은 기도의 반복 같지만, 기도가 계속될수록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살필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기도:“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39)

두 번째 기도:“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입니다. 하시고”(42)

세 번째기도:“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44)

 

세 번의 기도를 정리하면 이렇다.

첫 번째 기도, “아버지, 어찌 안 되겠습니까?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소서

이 기도에는 내 의지가 강하게 어필되고 있습니다. ‘잔을 피하고 싶으니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되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습니다!’라는 의지입니다.

 

두 번째 기도, “아버지, 아무래도 안 되겠지요? 그러니 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에서는, 내 의지보다는 아버지의 의지가 앞선다. 그러면서도 내 의지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세 번째 기도, “아버지, 아버지께서 정하신 뜻대로 하옵소서. 내가 따르겠습니다.”라는 기도에는, 아예 처음부터 내 의지는 없습니다. 아버지의 뜻에만 철저히 순종하겠다는 결심이 보입니다.

 

기도는 이런 것입니다. 내 의지를 앞세우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내 생각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내 생애에서 이루어지도록 그분에게 모든 결정권을 드리는 것입니다.

 

덴마크 철학자 키르케고르(Soeren A. Kierkegaard) 기도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도자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니 금식하고 그게 안 되면 기도원의 결사 기도로 들어갑니다. 그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이는 자칫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포기시키려 합니다. 기도의 원래 뜻과는 반대로 가는 기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 응답을 받았다. 처음에는 고난의 잔을 피하려 기도 했지만 응답은 고난의 잔을 마시는 것입니다. 고난의 잔을 피하려 그곳에 갔는데 하나님께서는 대답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고난의 잔을 마시라는 기도 응답입니다.

고난의 잔을 마시지 않으면 문제 해결이 없다! 내가 십자가를 져야만 하고 하나님의 일시적인 외면을 받아야 하는구나십자가밖에 없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응답으로 받아들이고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46)

예수님께서는 기도 시작 전에는 고민하셨습니다. 심히 슬퍼하셨습니다. 함께 기도해 달라 부탁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기도하고 나서는 당당하셨습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기도하신 예수님에게는 고민이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일어나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잔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일만 남았습니다. 기도 후에 일어난 능력의 역사입니다.

 

겟세마네 기도는 기도의 교본입니다. 겟세마네 기도는 내 뜻을 포기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만든 센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내 뜻을 포기하게 할만큼이나 힘이 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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